◈ [249화] 반격 (2)
침체되어 있는 아카데미 교정에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아카데미에는 주요 인사들의 자녀들이 대거 재학 중이었다.
그 말인즉, 정보를 습득할 경로가 다양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거 들었어? 이번에 신성 왕국에서…….”
“지금 카이제르가…….”
“아버지가 빨리 나오라고 하시던데…….”
“근데 그거 신빙성은 있어? 교황이 직접 공표한 건 아니잖아.”
“아니, 꼭 교황이 입을 열어야 해? 신성 왕국이라고…… 게다가 이번에 성녀도 등장했잖아? 시기를 봐.”
“그런가…….”
어딜 가나 아카데미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들뿐이었다. 리사가 눈살을 찌푸리자 율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리사.”
“난 괜찮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퉁명스럽게 말한 리사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학생들은 소문에 민감하다.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가 모든 이들이 선망하는 이유도 그만한 평판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카데미 재학생이라는 타이틀.
만일 아카데미의 입지가 흔들리고 이미지가 추락하게 된다면, 그들은 재학생이라는 신분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기사들의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빈센트는 절반이 넘는 기사들과 함께 아카데미를 떠나 영지로 돌아갔다.
학생들이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리사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도 하란 말이야.’
재수 없는 오빠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 *
에단이 다른 이들을 호출했다.
호출한 이는 가토와 휴고, 렉사르와 헨리, 그리고 르니엘과 사미라였다. 에단은 삭막한 눈으로 그들을 훑어봤다.
분위기가 무거웠다.
아직 소식을 접하지 못한 헨리, 르니엘, 사미라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다른 이들의 표정을 보고 이내 표정을 굳혔다.
“렉사르.”
렉사르는 대답 대신 눈을 빛냈다.
에단의 무감정한 눈이 렉사르를 응시했다.
“본업으로 돌아갈 때다.”
“……알겠습니다.”
히죽.
렉사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톱날 같은 이빨이 흉흉하게 빛났다.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수업과 개인 시간을 배려해 줄 여유가 없어.”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은 차게 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아주 우습게 보인 모양이야. 여기 눌러앉아서 애들이나 가르치고 있다고. 혹시 분위기에 동화된 머저리가 있으면 지금 나와. 정신 교육을 다시 시켜 주지.”
“…….”
다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에단의 눈에서는 서늘한 안광이 넘실거렸다.
“상인들을 건드리고 용병들에게 협박을 하는 우습지도 않은 짓들을 벌이고 있더군. 아주 눈에 잘 띄게 말이야. 그러면 우리가 나서면 되는 거지.”
에단이 렉사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주둔지는 흩어져 있을 거야. 거길 찾아내서 다 부숴 버려.”
“……죽여도 됩니까?”
“장난해?”
렉사르의 물음에 에단이 코웃음을 쳤다.
“쥐새끼 하나 살려 두지 마. 한 마리라도 기어 나오면 네가 뒈질 줄 알아.”
으르렁거리며 말하는 에단의 목소리에 멈칫한 렉사르가 씨익 웃었다.
“……알겠습니다.”
“자, 그럼 다음. 사미라.”
“어.”
“일 끝낸 지 얼마 안 지나고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런데, 다시 움직여 줘야겠어.”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애들을 끌어모아.”
“끌어모으라고?”
사미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지원은 충분할 거야. 기존의 단원들도 붙여 줄 거고, 기사들도 위장시킨 채 붙일 거니까. 단숨에 신흥 강자로 떠오르겠지.”
“단체명은 그럼…….”
사미라가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자, 에단이 곧장 입을 열었다.
“바꿔. 이제는 네가 우두머리야. 더 이상 장난은 없어.”
“……알겠어.”
진지한 분위기에 사미라가 답하자, 에단이 곧장 첨언했다.
“한 가지 기억해 둬.”
“……?”
“넌 이제 블란테의 소속이다.”
“……그 말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지?”
“말 그대로의 의미. 너와 다비를 건드리면 우리가 응징한다. 대신.”
“우리도 의무를 짊어져야 된다…… 그건가?”
“그래.”
“……후우, 내 의사는 없는 거지?”
에단은 대답 대신에 씨익 미소 지으며 화답했다. 에단의 대답에 사미라가 헛웃음을 지었다.
“염병할. 평화로운 은퇴는 다 갔네.”
“나한테 빌미를 잡힌 순간, 그 바람은 끝난 거지.”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
“말해 봐.”
“……다비 좀 자주 보러 가 줘.”
예상 못 한 조건에 묘한 표정을 짓던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최근에 자주 못 찾아가긴 했지. 정말 그거면 충분하나?”
“……그래, 그거면 됐어.”
사미라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르니엘.”
“네, 용사님. 말씀만 해 주세요!”
“…….”
오늘도 여지없이 용사라는 호칭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평소처럼 경고하거나 윽박지르지는 않았다.
“부탁할 게 있다.”
에단의 말에 르니엘의 눈이 잠깐 커졌다가 부드럽게 휘었다.
“말씀하세요.”
“엘프들. 엘프들의 공표가 필요해. 그리고 유인책.”
“공표라고 함은…….”
“엘프들이 공식적으로 아카데미를 지지하는 거야. 교수진으로 들어온다면 더할 나위 없지.”
아카데미의 교수로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은연중에 블란테를 지지한다는 것을 뜻하는 행위다.
“저희가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가볍게 말할 게 아니야. 강요하는 것은 아니니, 신중하게 대답해.”
“저희 일족의 지도자는 저입니다. 지도자는 선택하고 결정하는 역할이죠.”
르니엘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리고 저희는 용사님에게 평생 동안 갚아 나가도 전부 갚지 못할 정도의 큰 빚을 졌습니다. 무례를 인지하고 찾아온 이유도 은혜를 갚기 위해서죠.”
르니엘이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오히려 도움을 드리게 되어 진심으로 기쁩니다.”
진심 어린 미소에 피식 웃은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고맙게 받도록 하지. 조금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는 방법이라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야.”
“괜찮습니다.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르니엘이 싱긋 웃었다.
“이제 저희 일족은 과거의 나약한 모습을 벗어났습니다. 우려는 감사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미소 속에 드러나는 미묘한 스산함에 에단은 잠시 르니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에단의 눈이 이번에는 휴고에게로 향했다.
“휴고 너는 이제 렉사르와 같이 움직일 거야.”
“……제가 말입니까?”
“어, 기척을 숨기고 추격하는 데에는 너희 둘만 한 사람이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휴고는 옅은 불안감이 드러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토 너는 지금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면 돼.”
“지금 이대로요?”
가토가 되묻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그대로.”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기사들이 많이 빠져나갔어. 지금 아카데미의 평판을 유지하는 데 가장 큰 공훈을 하는 건 블란테가 ‘직접’ 지도한다는 거야. 보충된 인원이 빠져나간 만큼 여기서 더 차출할 수는 없어.”
“그게 이유라면 다른 기사들도…….”
“글쎄, 지금 급하게 교수진을 바꾸는 것보다는 네가 유지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은데?”
“…….”
가토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에도 자신은 함께할 수 없단 말인가?
복잡한 심경과 함께 자괴감이 치밀었다.
에단은 말없이 가토를 응시했다. 가토의 얼굴을 보니 어떤 심경인지 얼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개개인의 감정을 고려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제 곧 혼란이 벌어질 것이다.
표면상에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칼이 휘둘러지고 많은 피가 흐를 것이다.
그 상황 속에서 아카데미는 최대한 의심을 피해야 한다. 에단이 이번에는 헨리를 바라봤다.
“너는 나와 다닌다.”
“……네?”
“왜? 너는 놀고 있으려고 했나?”
“아, 아닙니다.”
헨리가 어벙한 웃음과 함께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대부분의 전달 사항은 끝났다.
“지시 사항은 따로 연락을 하지. 그럼 모두 해산해라.”
자리에 있던 이들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두 방을 빠져나갔다.
“렉사르, 너는 여기 잠깐 남아.”
에단의 말에 렉사르만 남고 모두가 방을 나섰다. 렉사르가 에단을 향해 물었다.
“……따로 하실 말씀이 계십니까?”
“내가 기다리라고 했지? 그 이유가 뭘 것 같아.”
에단의 질문에 렉사르는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든 걸 알고 있지는 않아서야.”
“…….”
“가지고 있는 건 단서밖에 없어 확답을 할 수 없었지. 미안하지만 지금까지도 그건 달라지지 않았어. 가지고 있는 건 심증뿐이야. 그래도 괜찮겠나?”
렉사르가 물끄러미 에단을 응시했다. 샛노란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 그 사실을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늦을까 봐.”
에단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내가 말을 하는 게 늦을까 봐. 그것 때문에 지금 말하는 거다.”
“……제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어, 넌 약하잖아.”
순간 렉사르의 볼이 꿈틀거렸다.
“…….”
잠시 렉사르의 반응을 즐기던 에단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농담 아니야. 이제는…… 너도, 나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어. 아무리 녀석들이 우리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한들, 녀석들은 커. 그리고 많지.”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듣고 싶으면 지금 들으라고.”
깊고도 고요한 에단의 눈을 바라보며 침묵하던 렉사르가 고민 끝에 말했다.
“……지금 제가 알면 복수할 수 있습니까?”
‘역시 짐작하고 있군.’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직 에단은 그 어떠한 것도 언질을 주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불가능해. 가 봤자 개죽음이겠지.”
“…….”
그 순간 렉사르에게서부터 절제하지 못한 흉성이 흘러넘쳤다. 에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저는…… 복수할 수 있을 때. 그때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작게 고개를 숙인 렉사르가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주위가 고요해졌다.
에단이 품에서 수정구를 꺼냈다. 마나를 불어넣자 수정구 안에 한니발의 얼굴이 떠올랐다.
― ……에단 님?
“아카데미에 보급품을 보내. 물자는 있는 대로 끌어모아서. 값은 오면 즉시 치르도록 하지.”
― 하지만…….
“걱정하지 말고 출발 장소만 말해. 호위 인력은 붙여 줄 거니까. 꼬리 내리지 말고 오히려 광고하고 움직여.”
날은 저물고 있었다. 노을이 붉게 타오른다. 그림자가 서서히 방을 잠식해 나가고 있었다.
“이번에 털리면 한니발이라도 휘청거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들도록 말이야.”
― ……준비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그리고 수정구도 준비해 놔.”
― 그것도 준비하도록 하죠.
유지하던 마나가 끊기고 통신이 끊어졌다.
뚜벅뚜벅.
에단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