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화] 분노 (3)
에단은 결국 다시 한번 페온의 이름을 팔았다. 그것 외에는 설명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첩 내에는 레벨린의 원한과 목표가 서술되어 있었다. 그리고 계획들을 무너트린 에단의 존재까지.
이야기를 모두 들은 빈센트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탓을 할 생각은 없다. 다시 한번 말하겠지만 책임은 블란테의 가주인 내가 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묻겠다. 이 이상 숨기는 것은 없나?”
에단을 응시하는 삭막한 눈.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
에단의 대답에 빈센트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래. 그러면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할 계획이지?”
“제 계획에 응해 주실 생각입니까?”
빈센트가 감았던 눈을 떴다.
“착각하지 말거라. 네가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드리고 있는지가 궁금할 뿐이니.”
잠시 침묵하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적어도 이렇게 사태를 관망할 생각은 없습니다.”
빈센트의 검은 동공은 계속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에단은 말을 이었다.
“저는 블란테의 방식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죠. 처음에는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뿐만은 아닌 것 같네요.”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빈센트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어떤 제약이 걸려 있는 겁니까? 누가 우리를 이렇게까지 속박하고 있던 거죠?”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블란테는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는 가문이었다.
국가 단위의 견제를 받을 정도의 단일 세력으로서, 대륙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 위용이 어느 정도냐 하면 블란테와 견줄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을 지닌 가문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평가되었다.
하지만.
‘잘못 생각했어.’
블란테는 단순한 가문 수준이 아니었다. 오늘 빈센트의 전투를 보고 깨달았다. 빈센트의 무력은 일반적인 마스터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제아무리 야심이 없더라도.’
이 정도까지 숨을 죽이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블란테가 가지고 있는 본질 자체가 약육강식이니.
하지만 블란테는 여전히 대륙의 끝자락에서 범람하는 몬스터를 막아 내는 요새 역할을 수행한다. 그저 고독하고 고고하게 홀로 서 있었다.
물론 상대가 도발했을 때 블란테는 움직인다. 하나 블란테는 언제나 명분 없이 힘을 휘두르지 않는다.
그것의 이유.
에단의 질문에 빈센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알 것 없다.”
“이번에도 그냥 넘어갈 생각이셨습니까?”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저는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요.”
말 그대로였다.
에단은 지고는 못 살고, 당하고는 살지 못하는 성격이다. 당한 게 있다면 언제나 그 배로 되갚아 줘야지만 직성이 풀린다. 에단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숨기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미 숨길 수도 없는 사태구요. 고작 이걸로 분을 삭이는 게 블란테의 방식입니까?”
“본론을 말해라.”
“이번 연회에서 저는 할 일을 했습니다. 카이제르와 신성 왕국 측에서는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죠. 수첩을 보니까 인과관계가 얼추 맞아떨어지는 것 같더군요. 그들은 준비하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
“전란의 시대입니다. 이미 도화선에 불은 붙었습니다.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게 지금 상황입니다. 불을 붙인 당사자가 저희입니까?”
에단은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니죠. 지속적으로 블란테를 끌어들이고 입지를 좁히려고 한 이들은 아카데미였습니다. 보시다피시 아카데미는 저희가 철저하게 응징했습니다. 이미 아카데미 자체를 꿀꺽했죠. 판단을 잘못했다고는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궁지에 몰린 쥐가 어떤 선택을 할지 몰랐을 뿐이죠.”
후우.
에단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어 빈센트를 바라보는 에단의 눈은 노을빛을 받아서인지 이글거리듯 타오르는 것 같았다.
“상대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여기서 입 다물고 세력을 회복하고 다시금 힘을 축적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죠? 블란테의 명예는 바닥에 곤두박질치게 될 게 눈에 훤합니다. 이대로 넘어가게 되었다가는 이빨 빠진 사자는커녕 고양이 새끼로도 취급 안 하겠죠.”
“거기까지.”
빈센트의 목소리가 웅혼하게 울렸다. 피부가 저릿거렸다. 빈센트의 싸늘한 섬뜩한 눈이 에단을 관통했다.
“본론만 말하거라.”
“……이미 돌이킬 수 없습니다. 전쟁을 각오할 때입니다.”
“전쟁? 전쟁이 그리 쉽게 나올 만한 얘기더냐?”
빈센트의 말에 에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모두가 죽었습니다. 꿈이 있는 아이들과 가문에 평생을 바쳐 충성을 다 한 이들이 죽었습니다.”
“……그렇게 만든 이들은 모두 죽였다.”
“피하지 마시죠.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도 그 정체 모를 ‘약속’ 때문입니까?”
“닥쳐라.”
빈센트의 살기가 가중되었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에단은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설 생각도 없었다.
에단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고는 드래곤의 피어를 끌어올렸다.
타닥.
빈센트와 에단의 피어가 부딪쳤다. 건물이 둘의 대립을 견디지 못하고 요동쳤다. 스파크가 튀겼다.
“운 좋게 알량한 힘을 얻더니, 눈에 뵈는 게 없는 게냐?”
“그런가 봅니다. 하지만 착각하시는 게 있습니다. 제 힘은 이게 전부가 아닐뿐더러…… 제 목표는 아직 멀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넘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제약, 약속과는 관계없습니다. 지금은 보여 줄 때입니다.”
에단의 형형한 안광이 번뜩였다.
“블란테가 과연 누구인지를.”
* * *
에단이 문을 닫고 나섰다.
빈센트가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복잡한 감정이 긴 한숨으로 이어졌다.
체력은 건재했지만 몸이 무거웠다.
짙은 피로가 어깨를 짓눌렀다.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빈센트의 눈은 황망했다.
지끈거리는 두통이 느껴졌다. 저택에 널브러진 수많은 시체들. 그들 모두가 블란테의 가족들이었다.
그리고 빈센트는 오늘, 진짜 자식도 죽이고 말았다. 비록 못난 자식이었지만 모룬은 그의 아들이었다.
빈센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목걸이.
화려함 따위는 없는 수수한 목걸이였다. 빈센트는 말없이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 * *
“카론, 몸은 좀 어때?”
카론이 고개를 돌려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을 응시한 카론이 피식 웃었다.
“보이는 대로 멀쩡해.”
“그 비싼 포션을 아주 들이부었는데 멀쩡해야지.”
“말을 해도 꼭.”
카론이 눈살을 찌푸렸다. 둘은 말없이 웃었다.
서로 티격태격하던 기억밖에 없는 사이였지만, 어쨌거나 둘은 형제였다.
미소 짓던 카론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형은 어떻게 됐지?”
“죽었어.”
에단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복잡한 심경 따위는 드러나지 않는 담담한 어조였다.
“……그래.”
그런 에단의 태도가 오히려 위로가 되는 기분이었다.
“……이유는?”
“내 탓이야.”
“……뭐?”
“내가 너무 오만했어.”
에단은 간략하게 상황들을 설명했다. 가문의 구성원인 카론도 알아야 할 이야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멍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카론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뭐 잘못 먹었어?”
“뭐, 인마?”
“그렇잖아. 어울리지 않게 무슨 소리야. 그게 에단 네 탓은 아니잖아. 탓은 나한테 있지.”
카론이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포션이 잘 들었는지 상처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날 카론이 할 수 있는 것은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양 손아귀가 모두 터져 나갈 때까지 제 목숨 하나 건사하는 게 전부.
“……결국 나는 그 정도 수준일 뿐이었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 블란테라는 가문을 믿고 거들먹거리던 애송이. 그게 전부야. 나 혼자선 아무것도 지키지 못해. 그 상황에서 떠오른 생각이 뭔 줄 알아?”
“…….”
“아버지랑 에단 네 얼굴이 떠오르더라고. 그렇게나 무시하고 멸시할 때는 언제고, 정작 내 목숨이 위험하니까 살고 싶었나 봐.”
카론이 입술을 깨물었다.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나를 믿던 기사들도, 가신들도, 가문의 식구들도, 그 무엇도 지키지 못했지. 내가 있었음에도.”
카론이 눈을 질끈 감았다. 기억이 선명했다. 얼마 전까지 같이 땀을 흘리던 자들의 죽음.
카론의 숨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제 알량한 직위에 대한 욕심은 없어. 주제를 알았거든.”
카론이 눈을 떴다. 카론의 검은 눈에 이채가 서렸다.
“강해져야 해. 모룬 형이 그렇게 된 것도 약해서이겠지. 내가 아무도 구하지 못한 것도 약해서야.”
카론과 에단이 눈을 마주쳤다. 카론의 눈에는 일렁이는 열의가 있었고, 에단의 눈은 차게 식었다.
“에단, 아니, 형……. 나는 강해지고 싶어.”
“…….”
카론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오늘 카론은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한참 동안 서로 응시하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회복되면 나와.”
에단이 방을 나섰다.
탁.
문이 닫혔고, 에단은 다시금 욕망이 들끓었다.
‘……나는 아직 강해져야 한다.’
방을 나선 에단은 이번에는 벨몬트와 타미, 다른 단원들이 지내는 곳으로 향했다.
그들은 더 이상 동굴 아닌, 영지의 저택에서 당당히 지내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줄리엔이 물었다. 에단이 천천히 주변을 훑어봤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들은 지금 에단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피식 웃은 에단이 입을 열었다.
“멀쩡해 보이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상황에 맡는 판단을 한 거야. 괜히 주제넘게 나서서 뒈지면 내가 좋아할 것 같아?”
“…….”
줄리엔과 단원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슬슬 실력에 자부심을 느낄 시기였다. 그 방증으로 용병단의 이름도 꽤나 높아졌으니.
지옥 같은 훈련을 견뎌 냈지만, 그날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공포에 떠는 것 말고는 없었다.
당당히 나선 자는 딸 같은 존재의 타미와 벨몬트뿐이었다.
“분위기가 왜 이래?”
에단이 이맛살을 좁혔다.
“축 처져 있지 마. 그따위로 있을 바엔 연병장이나 한 번 더 뛰어. 뭐라고 할 사람 없으니까.”
에단의 말에도 단원들이 입을 다물고 있자, 에단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장난 같아?”
그러자 단원들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단원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려 있었다.
“지금 당장 나가서 뛰어.”
에단이 으르렁거리자, 단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뛰쳐나갔다. 나간 단원들을 보며 에단이 볼을 긁적였다.
툭툭.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에단이 고개를 내렸다. 타미가 에단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뛰어, 나도?”
“아니, 넌 그냥 쉬어.”
건조한 미소를 지은 에단이 타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타미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에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에단이 주머니를 뒤적거리자, 작은 비닐에 쌓여 있는 사탕이 하나 나왔다. 에단은 타미에게 사탕을 건네며 말했다.
“고생했다.”
“응.”
에단의 말에 타미가 해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