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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명가 격투천재-246화 (246/398)

◈ [246화] 분노 (2)

현실감이 들지 않는 광경이었다.

에단의 눈앞에는 회색의 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우웅.

세계수의 목걸이는 진즉에 스스로 장막을 친 상태였다. 에단은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어이가 없을 지경이군.’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빈센트의 무력은 압도적이었다. 세계관 최강자라는 명칭이 아깝지 않았다.

‘이런 실력인데…… 대체 어째서?’

원작의 전개가 이해되지 않았다.

원작에서는 결국 블란테는 몰락하고 빈센트는 죽는다. 장렬한 죽음이었다고 서술되지만, 구체적인 묘사는 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대군은 대륙을 타고 내려오고 대륙은 혼란에 잠식된다.

에단이 본 빈센트의 무력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준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있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터벅.

빈센트가 몸을 돌리는 소리에, 생각에 잠겨 있던 에단이 고개를 들었다.

빈센트는 특유의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해명을 원한다는 듯이 벨몬트와 타미를 번갈아 바라봤다.

방금까지 빈센트의 모습을 봐서인지 시선이 닿는 순간 벨몬트가 흠칫 몸을 떨었다.

자신이 털끝 하나 스치지 못했던 괴물을 어떻게 압도했는지 지켜봤다. 당연히 벨몬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빈센트가 다시 에단을 응시했다. 빈센트의 눈은 깊고 고요했다.

“설명이 필요할 게다.”

빈센트의 물음에 에단은 잠시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 *

에단과 벨몬트, 타미는 동굴 안에 들어가 일행들에게 상황을 전했다.

카론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에 다른 일행들과 단원들이 동굴을 빠져나와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죽은 시체들의 상태는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참담했다.

“……우욱.”

단원 중 한 명이 시신을 수습하던 도중 헛구역질을 했다.

제법 비위가 강하다고 생각한 그들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시체의 상태는 끔찍했다.

에단은 헛구역질을 하는 이들을 힐긋 바라본 뒤, 마저 시체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블란테의 영지는 광활했고, 그만큼 가신들과 사용인들도 많았다. 아름답고 정갈하던 땅이 피에 젖어 있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질척한 바닥이 느껴졌다.

“…….”

적막이 내려앉았다. 일행들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시체들을 수습했다.

터벅터벅.

에단과 일행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영지민들이 힐긋거리며 조심스레 서 있었다.

“어떻게 이런…….”

영지민들은 눈앞에 펼쳐진 참극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잠시 주저하더니 에단 앞에 다가왔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에단은 도움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영지민들이 돕기 시작하자 사태는 빠르게 진전을 보였다. 무거운 분위기가 내리깔렸다.

시체들을 전부 매장할 수는 없었다. 피 냄새를 맡은 짐승들이나 몬스터들이 몰려들 것이 빤했기 때문이다.

화르륵.

불길이 치솟고 시체들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곁에 있던 영지민 중 한 명이 에단을 향해 물었다.

“복수는…… 하셨습니까?”

“네.”

“……그렇군요.”

“하지면 여기 끝낼 생각은 없습니다.”

“……네?”

“똑똑히 알려 줘야죠. 너희들이 감히 누구를 건드렸는지를.”

이번에 블란테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자라나는 새싹들과 더불어 대부분의 가신들을 잃었다.

가만히 웅크린 채 힘을 회복하려고 든다면 엄청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그 방식은 에단의 방식이 아니었다.

에단은 타오르는 불길에 시선을 옮겼다.

검은 눈동자 안에 불길이 비쳤다.

에단은 타들어 가는 이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가 아닌 복수가 블란테의 방식. 불길을 응시하는 에단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 * *

사태를 수습한 에단은 곧장 아카데미로 향했다. 블란테의 기사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게 먼저였기 때문이다.

게이트를 이용해 아카데미에 도착한 에단은 곧장 네이드와 첸에게 찾아갔다.

그 둘은 에단을 보자마자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블란테의 기사와 가신을 모두 소집해 주십시오.”

에단의 심각한 어조에 첸과 네이드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기사와 가신을 이끌고 왔다.

한자리에 소집된 기사들을 보며 지나가던 학생들이 숙덕거렸다.

에단은 차게 식은 눈으로 기사들을 천천히 훑어봤다.

“영지로 돌아간다. 하지만 전부 갈 수는 없다.”

게이트의 정원을 초과할뿐더러, 모든 기사들이 자리를 비웠다가는 또다시 같은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영지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에단의 눈이 질문한 기사에게로 향했다.

“습격을 당했다.”

“……네?”

“말 그대로야. 습격을 당했고…… 저택에 있던 모든 가신들과 수습 기사들이 죽었어.”

에단의 입에서 흘러나온 충격적인 말에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지금 사건의 전말을 들은 첸과 네이드의 동공도 길을 잃은 것처럼 흔들렸다.

“원망은 이후에 듣겠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기사들이 이곳을 비울 수는 없어. 선택해라. 누가 남을 거지?”

에단이 차게 식은 눈으로 기사들을 훑어봤다. 대답하는 이들은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지금 상황에 복귀하지 않고 이곳에 잔류하고 싶은 기사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가 남겠습니다.”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첸이 입을 열었다. 에단이 눈이 첸을 바라봤다.

“괜찮겠습니까?”

“같은 일이 벌어지면 안 되니.”

첸의 눈은 한기를 머금었다. 이 상황에 분노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이후 첸을 따르는 기사 몇몇이 잔류의 의사를 밝히며 손을 들었다.

“……남겠습니다.”

쇠를 긁는 것 같은 특유의 거친 목소리에 기사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렉사르 또한 의사를 밝혔다. 렉사르가 그렇게 말하자 가토와 휴고도 손을 들었다.

“저희도 남을게요.”

“……그래. 남을 인원이 정해졌으니 그럼 곧바로 움직이겠다. 챙길 것들이 있으면 간략하게 챙긴 뒤에 바로 모여.”

에단이 몸을 돌렸다. 블란테로 떠나기 전에 해야 할 것이 있었다.

에단은 칼베리안이 지내는 방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이제는 놀라지도 않은 칼베리안은 에단을 향해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걸 찾으러 왔나?”

칼베리안이 에단을 향해 수정구를 내밀었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정구를 받아 들었다.

수정구를 받아든 에단이 망설임 없이 몸을 돌리자, 칼베리안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다녀오면 말해 줄게.”

등을 돌린 채로 대답한 에단은 방을 나왔다. 에단은 움직이면서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구 안에 메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에단 님? 말씀하신 것들은…….]

말을 잇던 메이가 에단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에단의 얼굴이 섬뜩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어차피 곧 네 귀에도 들어갈 거야. 자세한 전말은 부하한테 들어. 신성 왕국과 카이제르. 두 새끼들 정보를 최대한 긁어모아. 그리고 소문을 퍼트려. 감히 블란테를 건드린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번뜩이는 에단의 눈을 본 메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알겠습니다.]

에단은 미련 없이 수정구의 통신을 끊은 후, 이번에는 한니발을 향해 통신을 걸었다.

[에단 님, 그렇지 않아도 드릴 말씀이…….]

한니발도 메이와 마찬가지로 에단의 표정을 보자 입을 다물었다.

“영지로 인력을 보내. 물자들과 같이. 최대한 많이. 값은 지불할 테니 걱정 말고.”

[……알겠습니다.]

통신을 끊은 에단은 대기하고 있는 기사들과 함께 영지로 향했다. 이번에도 에르미온이 마법진을 가동하는 역할을 맡았다.

“…….”

에르미온은 에단의 표정을 보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고맙다.”

“……됐어.”

에단의 짤막한 감사 인사를 퉁명스럽게 받은 에르미온이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마법진에서 빛이 흘러나오며 에단과 기사들을 집어삼켰다.

* * *

에단은 기사들과 함께 영지에 도착했다. 영지는 황량했고, 피해의 잔해들은 아직 복구되지 않았다.

흩뿌려진 피들이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보여 줬다.

“……도련님.”

에단은 네이드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곧장 영주실로 향했다. 에단이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빈센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에단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영주실에 가만히 앉아 있는 빈센트가 보였다. 낯익은 광경이었지만 어색했다.

영주실을 집어삼킨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했다.

“데리고 왔나 보군.”

“네.”

“그래.”

빈센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에단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착각하지 마라. 너는 가주가 아니야.”

에단이 고개를 들었다. 빈센트가 에단을 응시했다. 에단을 응시하는 검은 눈은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노을빛이 영주실을 삼켜 붉게 타올랐다.

빈센트는 평소와 달리 흘러내리는 머리를 정리하지도 않은 채 에단을 바라봤다.

“책임을 질 사람은 나다. 너는 제시했을 뿐이고, 결국 제시를 수락한 건 나이니.”

“…….”

에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슴속이 복잡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에단이 품에 손을 밀어 넣었다. 낡디낡은 수첩이 나왔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신…….”

“대신?”

“아버지께서 알고 계신 것도 말씀해 주십시오.”

“…….”

빈센트가 입을 다물었다. 에단이 수첩을 열었다. 레벨린이 써 내려간 일지였다.

슬픔과 절망, 복수로 물든 수첩의 내용이었다.

죽은 이의 과거는 궁금하지 않았다.

사연이 없는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이 자리에서 죽어 나간 이들도 각자의 사연이 있었다. 조연 따위가 아니었다.

에단은 말없이 수첩들을 넘겼다. 신성 왕국과 카이제르, 그리고 제국에 관한 언급이 있었다.

어떤 식으로 협력하였고, 어떤 유착 관계가 있었는지 자세하게 쓰여 있었다.

종국에 패배하고 가치를 잃자, 그들에게 어떻게 버림받게 되었는지까지.

결국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에단은 안일했다. 궁지에 몰린 쥐가 어떤 선택을 할지 고려하지 않았다.

에단은 수첩을 덮고, 들고 있는 수첩을 빈센트에게 건넸다. 빈센트는 수첩을 받아들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적막이 내리깔린 방 안에 사락거리며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눈살을 찌푸리며 수첩을 모두 읽은 빈센트가 수첩을 덮고 에단을 응시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처음부터는 아닙니다.”

에단은 고민했다.

진실을 밝히겠다고는 하였지만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읽던 책 속에 들어왔다는 말은 설득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될 것이다.

그렇다고 유야무야 대답하며 어물쩍 넘어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어떻게 말을 하는 게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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