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화] 분노 (1)
모룬은 천천히 다가오는 에단을 보며 조소를 지었다.
“아, 너희들인가? 녀석을 죽인 것들이.”
쿡쿡거리며 웃은 모룬의 눈꼬리가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천진한 표정이다.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맞이한 표정 같았다.
“어, 맞아.”
에단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려 할 때, 어느새 빈센트가 에단의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에단은 앞서 나가는 빈센트를 향해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빈센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보고 있거라.”
“…….”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빈센트의 목소리였지만, 에단은 눈치챌 수 있었다.
빈센트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노기를.
“오, 너는 꽤나 쓸 만해 보이는구나.”
연신 이어지는 조롱에도 빈센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모룬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빈센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한심하구나.”
“……뭐?”
“패배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누구나 패배는 겪기 마련이니. 하지만 블란테의 장남이라는 녀석이 그런 놈에게 몸을 갈취당하고, 식구들을 지키지 못하다니.”
빈센트의 밤하늘처럼 깊고 고요한 눈이 모룬을 응시했다. 빈센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믿고 영지를 나섰다. 영지를 지켜야 하는 것은 내 몫이지만, 언젠가는 그 역할이 끝나기 마련이니 너를 믿은 것이다.”
“지금 이 녀석한테 하는 말인가? 계속 떠들어 봤자 쓸모가 없을 텐데 헛수고를…….”
“한데 결과가 고작 이것뿐이더냐?”
빈센트는 모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무시했다. 그러고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평이한 무늬가 새겨진 검집에서 검이 뽑혀 나온다.
키이잉.
빈센트의 불편한 심기를 대변하듯 뽑히고 있는 검에서는 꺼림칙하고 스산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해가 지고 있었다.
주위 풍경이 어둠에 잠식되어 갈 때, 차디찬 달빛과도 같은 빛이 빈센트가 뽑아 든 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에단과 벨몬트와 타미는 입을 다문 채 빈센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빈센트의 칼끝이 모룬에게로 향했다. 빈센트의 눈빛에는 더 이상 같잖은 인정 따위가 남아 있지 않았다.
싸늘한 시선으로 모룬을 바라본 빈센트가 낮게 읊조렸다.
“나를 원망해도 좋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었다.
강렬한 살기나 기세를 뿜어내는 것도 아니었지만, 빈센트에게서는 무거운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크흐흐흐흐…….”
말없이 빈센트를 응시하던 모룬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만히 떠드는 걸 지켜보고 있더니 하는 짓이 가관이구나.”
모룬의 주위에서 죽은 마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형체를 갖추며 유형화된 죽은 마나는 불쾌함을 여실히 드러내며 사납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섬찟한 모습에 지켜보고 있던 타미와 벨몬트가 움찔했다. 에단은 힐긋 둘을 바라보며 그들 곁에 다가섰다.
다가오는 에단을 바라본 벨몬트가 긴장이 풀린 것인지 바닥에 풀썩 주저않았다.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지만, 이상하게 안심이 되는군요.”
“안심해도 돼.”
태연한 에단의 대꾸에 더욱 긴장이 풀린 벨몬트가 피식 웃었다. 에단은 그런 벨몬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이유가 뭐지?”
“……무슨 이유를 묻는 겁니까?”
“너라면 충분히 도망갈 수 있었을 텐데.”
벨몬트는 이 넓고 깊은 산에서 오래도록 살아왔다.
비록 행동반경이 넓지는 않았지만, 동굴 안에 있는 인간들을 미끼 삼는다면 제 한 몸을 간수할 시간은 충분했을 터였다.
“…….”
에단의 물음에 벨몬트가 잠시 고민했다. 미간을 좁힌 채 골똘히 고민하던 벨몬트가 입을 열었다.
“단지…… 그러고 싶었습니다.”
예상 못 한 대답에 에단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음…… 대답이 안 되었습니까?”
“아니야. 충분해.”
피식 실소하는 에단을 본 벨몬트는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에단이 벨몬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죽은 마나를 불어넣었다.
“……괜찮으십니까?”
“어. 고생했다.”
충분히 죽은 마나를 불어넣은 에단이 이번에는 손목을 입에 가져갔다.
까득.
손목을 물어뜯자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입이나 대.”
“이, 이건…….”
“피 흐르는 거 안 보여? 빨리 입어나 벌려.”
에단이 쌍심지를 치켜세우자 벨몬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에단은 입을 벌린 벨몬트를 향해 피를 흘렸다.
꿀꺽. 꿀꺽.
에단의 피를 받아먹던 벨몬트의 눈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목에서부터 핏대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상처들이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정신을 못 차린 채 에단의 피를 탐닉하던 도중 흐르던 피가 멎었다.
에단의 상처가 아물었다.
정신을 차린 벨몬트의 눈에는 아쉬움과 함께 미약한 욕망이 서려 있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벨몬트를 바라보던 에단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빠악!
“정신 안 차리지?”
“……죄송합니다.”
벨몬트가 바닥을 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옷소매를 붙잡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자 타미가 눈을 깜빡거리며 에단을 바라봤다.
“넌 이따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진짜?”
타미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자 에단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진짜로.”
“응.”
타미가 에단의 소매를 붙잡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빈센트와 모룬의 대치가 끝났다. 먼저 움직인 것은 모룬이었다.
“……저분이 빈센트 님입니까?”
“맞아. 왜? 걱정되냐?”
“솔직히 좀 그렇습니다. 저희도 도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이라면…….”
“가만히 있어.”
“……네?”
“까불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모룬에게서 풍기는 기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전에 상대했던 베오드라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했다.
반면 빈센트에게서는 묵직한 위압감이 흘러나왔지만, 피부가 저릿하거나 하는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기세만을 놓고 본다면 드래곤과의 조우나, 페온과의 전투 전에 느낀 기세가 더욱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알 수 있었다.
‘안 지겠군.’
그동안 빈센트의 힘을 과소평가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았다. 소설 속에서도 빈센트는 압도적인 절대자로 군림해 왔었다.
지금 상대가 지하의 군주 중 하나였지만, 빈센트가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모룬이 위협적인 살기를 흩뿌리며 다가왔지만, 빈센트는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는 슬슬 불쾌할 지경이야.”
냉소 지은 모룬이 죽은 마나를 촉수처럼 휘둘렀다.
칼끝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휘둘러진 촉수는 바닥에 떨어졌다. 모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건 좀 재밌네.”
모룬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이번에는 촉수의 수가 증식했다. 열이 넘는 촉수가 눈을 어지럽혔다. 그 기괴하면서도 흉측한 모습에 빈센트가 눈살을 좁혔다.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군.”
“네 시체도 보기 좋지는 않을 거야.”
촉수가 예측 불허한 움직임으로 빈센트를 덮쳤다.
하나하나의 촉수가 오러에 맞먹는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빈센트는 촉수에 의해 완전히 둘러싸인 꼴이 되었다.
그럼에도 빈센트는 우두커니 서서 별다른 대처를 보이지 않았다.
툭.
투두두두두둑.
수많은 촉수가 바닥에 떨어졌다. 빈센트는 아직도 가만히 선 채 무심한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설마 이것밖에 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실망이 섞인 목소리. 그 말이 심기를 자극한 것인지 모룬의 이마에 굵은 혈관이 돋아났다.
“……건방을 떨 수준은 된다는 건가?”
모룬은 더 이상 의미 없는 촉수의 숫자를 늘리지 않았다. 검은 기운이 모룬을 감쌌다.
마치 검은 갑주를 착용한 모양새가 된 모룬의 입이 주욱 찢어졌다.
“이제는 조금 다를 거야.”
“방금보다 비위는 덜 상하는군.”
“……아, 그래?”
툭.
모룬이 발을 내디딘다고 생각한 순간 몸이 사라졌다.
캉!
귀를 때리는 파공성과 함께 모룬과 빈센트가 공격을 주고받았다.
눈으로 좇기가 어려울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무슨…….”
벨몬트는 황망한 눈빛으로 둘의 교전을 바라봤다. 그의 안목으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알기가 벅찼다.
번뜩이는 불똥과 휘몰아치는 바람만이 그들의 움직임을 어렴풋이 드러냈다.
말없이 둘의 교전을 지켜보던 에단이 씨익 웃었다.
‘더럽게 강하네.’
빈센트는 아직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모룬은 빈센트를 거칠게 몰아붙였다.
꿈틀거리는 근육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불거진 핏줄과 함께 휘둘러진 공격은 공성 병기의 위력과 맞먹었다.
캉!
하지만 빈센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공격들을 흘려 냈다.
까랑까랑한 소리와 함께 팔이 튕겨 나가면서 몸이 훤히 드러나자 빈센트가 무심하게 칼을 찔러 넣었다.
‘멍청한 놈.’
모룬이 빈센트의 행동을 비웃었다.
모룬은 지금 죽은 마나를 갑주처럼 두르고 있는 상태였다. 아무리 오러가 실린 검이라도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푸욱―
“……!”
빈센트의 검이 어깨에 깊게 틀어박혔다. 빈센트는 칼자루를 쥐고 있는 손을 비틀었다.
콰지직!
살과 근육이 찢어지며 모룬의 입이 벌어졌다.
“크아악!”
모룬이 순간 거리를 벌리며 멀어졌다. 어깨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조금만 더 깊게 박혔으면 그대로 팔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모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검이 어째서 자신의 어깨에 틀어박힌 것인지.
“……무슨 짓을 한 거지?”
모룬의 물음에 빈센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모양이군. 보고도 모르는 건가? 그냥 어깨에 칼을 박은 것뿐인데 말이야.”
“그래. 그렇단 말이지…….”
상처가 빠르게 아물며 피가 멎었다.
죽은 마나가 더욱 강하게 뿜어져 나오며 모룬의 눈이 검게 물들었다.
“그래. 인간 주제에 그 정도 경지까지 올라갔으면 오만해질 자격이 있지. 이곳이 지하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자네 많이 심심한가? 쓸데없는 말이 많구먼.”
빈센트가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한쪽 귀를 후볐다. 모룬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적당히 가지고 놀다가 모가지를 비틀어 줄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그 몸은 내가 가져야겠어.”
“미안하지만 넘겨줄 생각은 없다네.”
“그것참 안타까운 걸…… 그러면 강제로 가져가야지.”
모룬의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벌어진 입안은 심연처럼 새까맸다. 모룬이 무언가를 시도하려 하는 순간.
빈센트의 칼날이 하늘을 향했다.
역천(逆天).
바람이 성을 내기 시작하며 이내 광풍이 휘몰아쳤다.
에단이 고개를 치켜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푸른 하늘을 유영하던 구름이 어느새 몰려들어 있었다.
법칙과 규칙, 인과가 뒤틀리고 있었다. 크게 벌렸던 모룬의 입이 강제적으로 다물어졌다.
빠득. 빠드득.
빈센트는 일그러지는 모룬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빈센트의 눈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미안하구나.”
그 순간 모룬의 얼굴이 공포에 물들었다. 무언가 소리치기 위해 발버둥을 치려고 들었지만, 역천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모룬의 육체는 사정없이 뭉개졌다.
그리고 마침내 시체조차 남기지 않은 채 완전히 사라졌다.
스르릉.
빈센트가 검집에 칼을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