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화] 벨몬트 (1)
식사를 마친 에단은 곧장 아카데미에 복귀했다.
그렇게 일행과 함께 아카데미를 걷던 에단이 문득 에밀라를 바라봤다.
“갑자기 궁금해서 그런데, 넌 진짜 왜 따라갔던 거야?”
에밀라의 확고한 의사 때문에 연회에 데리고 가기는 했지만, 어째서 따라나서고자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에밀라 덕에 습격을 쉽게 막아 내긴 했으나 궁금한 것은 별개였다.
에단의 질문에 에밀라의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
에밀라는 답도 하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이해 못 할 행동에 에단의 이마에 줄이 그어졌다.
“……바보 같은 놈.”
“넌 왜 대뜸 시비냐?”
“됐다.”
칼베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다. 이제는 정말 돌이키기에는 멀리 와 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정말…….’
전면전이다.
칼베리안은 그 누구보다도 크리스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에단을 향한 크리스토의 호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대놓고 귀족들을 향해 선전포고한 이상 제국은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민심.’
시작부터 전면전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블란테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닐뿐더러, 전쟁에 피해를 입는 것은 제국민들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미 소문은 퍼질 대로 퍼졌을 거야.’
에단의 발언과 함께 정보 길드와 한니발이 움직였을 게 분명하다.
입을 타고 달리는 말은 그 어떤 명마보다도 빠르다. 귀족이 애를 써 봤자 소문이 퍼지는 것을 저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칼베리안이 눈을 질끈 감았다. 벌써부터 정신이 아득해졌다.
칼베리안이 앞으로의 일을 그려 보던 중 에단의 배낭에서 마나의 기운과 함께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왔다.
“……수정구?”
에단이 배낭을 열고 수정구를 쥐었다.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자 빛이 밝혀졌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잔뜩 굳어 있는 표정들을 보니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뭔가 있구나.’
에단이 표정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야?”
[에단 님…….]
줄리엔이 최대한 일목요연하게 예측 가능한 상황을 설명했다. 눈앞에서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었기에 구체적인 설명은 힘들었다.
[안 좋은 기운. 느껴져.]
줄리엔의 말에 타미가 첨언했다.
수인의 예민한 직감은 좌시할 수 없었다.
말 한마디 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에단의 눈은 유리처럼 번들거렸다.
곁에 있던 칼베리안이 흠칫 몸을 떨었다. 에단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로 피부가 저릿했다.
“지금 바로 갈 테니 기다려.”
[그리고…….]
줄리엔이 말끝을 흐렸다.
“무슨 일인데?”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줄리엔은 얼른 수정구를 돌려 쓰러져 있는 카론을 비쳐 주었다.
[카론 님이…….]
“…….”
에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론의 상태는 수정구 너머로 보기에도 매우 좋지 않았다. 지금 바로 치료를 받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몰랐다.
“기다려.”
에단의 입에서 흘러나온 짧은 한마디.
그 한마디에 이글거리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통신을 끊은 에단이 들고 있던 수정구를 칼베리안에게 건넸다. 칼베리안은 얼떨결에 수정구를 받아들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곁에서 하는 대화만 지켜봐도 예사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에단은 눈을 돌려 칼베리안을 흘겨봤다.
꿀꺽.
칼베리안이 침을 삼켰다. 에단의 분위기에는 날이 서 있었다.
“알아서 들어가 있어.”
칼베리안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에단의 모습이 사라졌다.
에단은 거칠 것 없이 곧장 빈센트의 학장실로 향했다.
콰앙!
에단이 학장실의 문을 걷어찬 에단이 빈센트와 마주 섰다.
“……무슨 일이지?”
빈센트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에단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에단은 까득 소리를 내며 이를 갈았다. 그러고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뭐?”
“지금 바로 영지로 향해야 합니다.”
“설명할 시간도 없는 거냐?”
“네.”
망설임 없는 확답에 빈센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사로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바로 출발하지.”
곁에 있던 검을 허리춤에 찬 빈센트가 이어 말했다.
“블란테로 돌아간다.”
* * *
에단은 가늠했다. 블란테의 전부를 끌어모을 수는 없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될 뿐이야.’
전력의 분배가 필요하다.
‘영지로 가는 건.’
자신과 아버지 둘이면 충분하다.
도보로 움직이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
에단은 곧장 수업을 진행 중이던 에르미온을 찾아갔다.
쾅!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에르미온이 앙칼진 눈초리로 에단을 노려봤다.
“나와.”
낮게 깔린 에단의 목소리.
에르미온이 표정을 굳혔다. 그녀의 곁에서 수업을 참관 중이던 크러쉬를 향해 말했다.
“……일단 네가 수업 진행해.”
싸늘한 목소리에 크러쉬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에르미온은 인상을 쓰면서도 몸을 돌려 나가는 에단을 따라나섰다.
에르미온이 건물을 나서자, 그 앞에 빈센트가 서 있었다. 둘의 표정을 본 에르미온이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설명할 시간 없어. 블란테와 가장 가까운 마법진으로 이동할 거야.”
강압적인 어조에 불쾌함을 느낄 수도 있었지만, 에르미온은 에단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이건 빚이야.”
“그래. 명심하지.”
에르미온은 곧장 마법진으로 향했다.
빈센트와 에단이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마법진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마법이 발현되자 둘의 모습이 자취를 감췄다.
“영광으로 알아.”
에르미온이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 * *
카론의 동공이 흐릿했다. 기억도 선명하지 않았다. 그저 살기 위해 달린 기억뿐이었다.
눈앞에 벌어진 참사.
가슴이 옥죄이는 기분이 들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카론은 목숨을 부지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순전한 여흥이었다. 마치 벌레를 죽이려다 놓아주듯, 카론을 놓아줬을 뿐이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누구지?
왜?
습격한다고?
블란테를?
형은?
형은 어떻게 된 거지?
죽었어?
전부?
나는?
나는…….
나는 뭘 했지?
구역질이 치밀었다. 카론은 먹은 것을 게워 내며 달렸다. 뛰는 것은 생존을 위한 원초적인 욕망 때문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전해야만 했다.
지금 이 상황.
이것을 아버지와 형에게 전달해야만 한다.
그 뒤로 카론은 그저 무의식적으로 발만 놀렸다. 누가 뒤에 따라오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 장난은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산을 향해 뛰었다.
카론은 본능적으로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이성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그저 의식을 잃은 채로 달리고 있었을 뿐이었고, 조금 더 가기 수월한 방향으로 뛰었을 뿐이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에는 누군가 있었다. 카론은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 * *
“……허억!”
눈을 뜬 카론은 벌떡 일어나 다급하게 주변을 경계했다.
어둠 속에서 여러 시선이 느껴졌다. 카론은 본능적으로 검을 찾았다. 그러나 허리춤에는 있어야 할 검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진정하시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론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획 하고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줄리엔이라고 합니다. 일단 저희 상황을 먼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줄리엔이 최대한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카론은 에단에게 말을 전했다는 얘기를 듣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 형한테…….”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진정되지 않는 건 알고 있지만,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대체 영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
카론이 입술을 깨물었다.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나도 잘 모른다.”
사태는 갑작스럽게 벌어졌다. 그리고 모두가 죽었다. 카론은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그리고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했다.
“……잠깐 군주라고 했다고?”
또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카론이 고개를 돌리자, 벨몬트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너는 누구지?”
카론이 경계하며 물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미약하지만 그것들과 비슷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 정말로 군주라고…… 말을 했다고?”
“…….”
카론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벨몬트를 노려보고 있자 줄리엔이 나섰다.
“카론 님, 믿어도 되는 분입니다.”
“……제기랄. 그래, 분명히 군주라고 했어. 나는 도통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허.”
확답을 들은 벨몬트가 침음을 흘렸다.
“벨몬트 님, 무언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 겁니까?”
“……나도 군주라는 이름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건 아니야…… 단지 들은 기억이 있는 것뿐이지.”
쿵.
벨몬트가 말을 이으려던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벨몬트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발각됐다.”
어둠 속에 숨어들게 되면 찰나의 시간은 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안일한 착각이었다.
어둠은 벨몬트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 오, 기회를 준 보람이 있구나. 재밌는 것들이 같이 있어.
귀가 아닌 머릿속에 직접적으로 우겨 넣어지는 목소리였다. 이질적이었다. 목소리와 함께 강렬한 두통도 엄습해 왔다.
― 하하, 아주 좋군. 만족스러워.
목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카론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 모습을 힐긋 지켜본 벨몬트가 몸을 일으켰고, 줄리엔의 어깨 위에 앉아있던 타미도 폴짝 뛰어내렸다.
“……타미?”
줄리엔이 타미를 불렀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타미가 벨몬트의 뒤에 섰다.
“……무슨 생각이지?”
“나, 강해. 너보다.”
“……허.”
타미의 순수하면서도 직설적인 말에 벨몬트가 헛웃음을 지었다.
안타깝게도 부정하진 못했다.
“그래 봤자 이길 순 없을 텐데?”
“나도 알아. 하지만 단장은 약한 애들 지켜야 해.”
타미가 줄리엔과 단원들을 가리켰다. 줄리엔과 단원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흑, 형님. 타미는 진짜…… 예전 형님과는 비교가 안 되네요.”
“그래…… 뭐라고 이 새끼야?”
줄리엔과 단원들이 티격태격하는 걸 지켜본 벨몬트가 피식 웃었다.
“지켜야 한다라…….”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뭔가 가슴속이 간질거리는 느낌과 함께 공포와 두려움이 옅어졌다.
벨몬트가 정면을 바라봤다. 샛노란 눈에 붉은 동공이 가늘어졌다.
“나는…… 위대한 밤의 귀족이다.”
스스로에게 선언하듯 읊조렸다. 여기서 도망치는 것은 고고한 귀족의 품위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벨몬트 님.”
“그만.”
줄리엔이 뒤따르려 하자, 벨몬트가 고개를 돌려 매섭게 노려봤다.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건가?”
“……네?”
“나의 결정을, 아니, 우리의 결정을 우롱하는 게 아니라면.”
벨몬트가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벨몬트의 등에서 검은 날개가 돋아났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나서야 할 자는 정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