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화] 모룬 (2)
달빛이 가려지고 방 안에 어둠이 드리우자, 모룬의 가슴속에 있던 어둠도 같이 머리를 들었다.
“……죽이고 싶냐고?”
에단은 모룬의 형제였다.
위대한 블란테의 혈족이기도 했으며, 비록 대련에서 패해 가진 것을 잃었지만 자신의 동생이었다.
하지만.
질투가 움직인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제 저 목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상관없었다.
에단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소로워하는 시선, 완벽한 승자의 얼굴.
뿌드득.
이가 으스러질 것처럼 갈렸다. 목에 핏대가 서고, 부릅뜬 눈은 터질 것 같았다.
‘녀석만 없으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자신은 다시 블란테에서의 입지를 되찾을 것이며, 멸시와 조롱 어린 시선 속에서 벗어난다.
기사들의 존경과 선망, 그리고 아버지의 인정.
모룬의 안광이 타오르는 것처럼 이글거렸다.
“……죽이고 싶다.”
모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그 순간 어둠이 흔들거렸다. 마치 웃고 기뻐하는 것 같은 모양이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모룬은 더 깊은 어둠 속에 집어삼켜졌다.
이윽고 어둠을 뚫고, 두 신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손쉬웠군.”
“절망에 빠진 사람을 현혹하는 건 어렵지 않은 법이죠.”
레벨린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마크가 날선 표정으로 레벨린을 노려봤다.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그럴 리가요. 저한테 하는 말입니다.”
“…….”
레벨린이 냉소를 지으며 어둠에 휩싸인 모룬을 바라봤다.
“지능은 조금 떨어지는 것 같지만, 재료로써는 충분합니다. 비록 마스터는 아니지만 마스터는 오히려 애로 사항이 많으니 이게 최적의 재료겠죠.”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자들은 하나같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정신력을 지니게 된다. 그런 이들은 레벨린조차 손을 대기가 까다로웠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남은 건 실행뿐이죠.”
“……그래.”
마크가 광기 어린 눈으로 모룬을 응시했다. 마크와 레벨린은 블란테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
이제는 빼앗을 시간이다.
“■■■■■■”
레벨린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흘러나왔다.
꺼림칙하고 음험한 단어는 곁에서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레벨린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바닥에 기괴한 문양이 그려졌다.
그려진 문양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위대하신 분을 뵙습니다.”
어둠 속에서 레벨린의 안광이 번뜩였다.
* * *
검을 섞는 순간 실력의 격차가 느껴진다. 검을 수행하는 검사라면 모두가 인정하는 말이었다.
‘제기랄!’
카론은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모룬은 카론을 상대로 적의를 표출하지 않았다.
그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군. 나를 적대하는 이유가 뭐지?”
“……그걸 몰라서 묻나?”
카론이 실소를 지으며 모룬을 노려봤다.
“정말 모르겠군. 이 녀석은 꽤나 손쉽게 넘어왔는데 말이야.”
“……뭐?”
“아무래도 이 녀석이 모룬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틀린 생각이야. 이 몸은 모룬이 맞아. 잠깐 내가 맡은 것뿐이지.”
카론의 눈동자가 길을 잃은 것처럼 흔들렸다.
“그게 무슨…….”
“아, 강제성을 띤 계약은 아니었으니 걱정하지 말게. 오히려 부탁은 이 녀석이 했지.”
모룬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 미소가 섬뜩하게 보였다. 카론이 칼자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저건 거짓말이다. 거짓된 말들로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 생각이리라.
“큭큭.”
모룬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
“…….”
카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떨리는 칼끝만이 카론의 흔들리는 심경을 대변해 줬다.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가 거짓말을 해서 남는 게 뭐가 있지?”
큭큭큭.
모룬이 연신 꺼림칙한 웃음을 토해 냈다. 웃음소리를 듣자 머리가 핑 돌고 구역질이 치밀 것 같았다.
하아, 하아.
호흡을 컨트롤하기가 버거워졌다. 숨소리가 점차 가빠진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오히려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푸는 거지.”
“……은혜라고?”
“그래. 은혜.”
모룬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하다. 모룬은 지금 카론의 반응을 지켜보며 즐기고 있었다.
“뭐 이쪽을 선택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 어차피 별로 쓸모도 없어 보이는 데다가 제물도 충분하니까 말이야.”
“제물……?”
“아, 모르고 있었나?”
모룬이 키득거리며 손을 들었다. 손의 방향은 연무장의 벽을 가리켰다. 모룬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콰아아앙!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굉음.
연무장의 벽면이 산산조각 나며 외부가 보였다.
“…….”
툭.
카론은 쥐고 있던 검을 놓쳤다. 전투에 들어선 검사가 결코 해서는 안 될 행위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번에는 조금 놀랐으려나?”
모룬이 싱글거렸다. 인간의 반응을 지켜보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이럴 수가…….’
카론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붉었다. 블란테의 새싹들이 밟혀 죽었다. 참혹한 시체였다.
사용인이나 기사 할 것 없이 모든 자들이 죽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피비린내 때문인지 구역질이 치밀었다.
“허억.”
카론이 숨을 쉬기 곤란해하자, 모룬이 턱을 긁적였다.
“이건 조금 재미없는데. 조금 더 격렬한 반응은 없는 건가?”
모룬이 잠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후드를 눌러쓴 레벨린이 허공에서 갑작스레 스르륵 등장했다.
“군주 님, 시간이…….”
“흐음?”
모룬의 표정이 바뀌었다. 마치 벌레를 보는 것 같은 경멸 어린 눈으로 레벨린을 응시한 모룬이 입을 열었다.
“지금 감히 나에게 재촉을 하는 것인가?”
서늘한 노기에 레벨린은 감히 말을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레벨린이 고개를 푹 숙였다.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알고 있다면 꺼져라. 알아서 할 테니.”
레벨린이 다시 스스륵 사라졌다. 모룬이 카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모룬의 눈은 차게 식어 있었다.
“흥이 깨졌군. 뭐 이대로 끝내도 좋지만, 내기 한번 하는 게 어떻겠는가?”
모룬은 카론을 놓아줬다.
* * *
“……조용히.”
벨몬트의 심각한 어조에 동굴 안에 있는 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벨몬트가 팔을 들었다. 창백한 벨몬트의 피부에는 소름이 돋아 있었다.
벨몬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냄새가 풍겼다. 진한 피비린내와 함께 위험하고 소름끼치는 냄새였다.
‘대체 뭐가 있길래…….’
벨몬트가 침을 삼켰다. 각인된 본능이 경고했다. 당장 이 자리를 뜨라고.
‘도주가 의미가 있을까?’
벨몬트가 뒤를 돌아봤다. 아직 사태를 눈치채지 못한 인간들이 눈을 끔뻑였다.
‘나 혼자라면.’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들을 모두 포기하고 도주하면 가능성이 있었다.
아직 거리는 멀었다. 그렇다면 시간은 충분하다. 상대가 아무리 강대한 존재라고 해도 벨몬트 하나에게까지 신경을 쏟을 확률은 낮았다.
‘……나는 위대한 밤의 일족이다.’
벨몬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예전처럼 가냘픈 팔뚝이 아니었다. 팔뚝에 힘줄이 불거졌다.
“모두 동굴 안으로 들어가라.”
“……네?”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인간들이 되물었다. 벨몬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재차 말했다.
“최대한 깊숙이 들어가.”
“…….”
그제야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인간들의 표정이 굳었다.
“야, 들어가자.”
“……어.”
인간들이 동굴 깊숙한 곳을 향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벨몬트는 격동하는 심장을 느꼈다. 아직 마음 한편에서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치라고.
고작 인간 놈들과의 장난질에 진심이었냐고.
쥐는 고양이를 이기지 못한다. 양은 늑대에게 도망칠 수 없다.
이건 정해진 섭리였다. 앞에서 풍겨 오는 기운. 생전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포악한 기운이다.
자신의 희미한 죽은 마나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벨몬트는 도망치지 않았다.
고작 인간들과의 정 때문에?
‘아니, 내 자존심 때문이다.’
벨몬트의 송곳니가 길어졌다. 동공이 가늘어지며 감각이 더없이 날카로워졌다.
예민해진 기감을 온 산중에 퍼트리자 갖은 산짐승들의 움직임이 세밀하게 느껴졌다.
짐승은 감각이 예민하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짐승들이 멀어지고 있었다.
‘이건…….’
짐승을 제외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무리. 인간의 기운이었다.
벨몬트가 경계하며 숲을 지켜보자, 수풀을 헤치며 등장한 무리가 보였다.
“벨몬트 님!”
“줄리엔?”
줄리엔과 단원들이 돌아왔다.
“……아래쪽은 지금 어떤 상태지?”
벨몬트의 심각한 어조에 줄리엔도 표정을 굳혔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가까웠으면 너 또한…….”
말을 잇던 벨몬트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줄리엔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는 어린 여자아이.
벨몬트는 한눈에 여자아이가 심상치 않은 존재라는 것을 눈치챘다.
“……수인인가?”
“알아보시는군요.”
줄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세하게 모든 상황을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쟤도, 이상해.”
타미가 벨몬트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하자 줄리엔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타미 님…….”
안절부절못하는 줄리엔의 모습에 벨몬트가 피식 웃었다.
“……확실히 나도 이상하긴 하지.”
감상에 젖은 채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벨몬트가 고개를 들었다. 여유롭게 만담을 나누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상황이 좋지 않아. 연락을 취할 방도는 있나?”
“……있습니다.”
줄리엔이 품에서 수정구를 꺼냈다. 이곳에 오기 전, 에단에게 받은 물건이었다.
“……뭔가가 또 온다.”
벨몬트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사납게 경계했다. 줄리엔이 흠칫 놀라며 거리를 벌렸다.
수풀을 헤치고 등장한 것은 인간이었다.
“하아, 하아.”
카론이 흐릿한 눈동자로 벨몬트와 줄리엔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고는 그대로 그곳에서 털썩 쓰러졌다.
“……아는 얼굴입니다.”
줄리엔은 카론과 조우했던 기억이 있었다.
“시간이 없어.”
벨몬트의 말에 줄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블란테의 혈족이 저런 상태로 산을 올라왔다는 건 예사로운 상황이 아니라는 증거.
벨몬트는 카론을 이끌고 동굴 안에 들어갔다. 동굴로 들어가면서 벨몬트는 몇 가지 조치를 취해 놨다.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이러한 기운을 풍기는 괴물이라면 이깟 눈속임은 순식간에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동굴 안에 들어간 카론이 마법적 조치를 통해 작은 빛을 만들었다. 줄리엔은 곧바로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배운 기간이 기간인지라 미약하기 그지없는 기운이었지만, 수정구를 연결하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제발…….”
줄리엔이 간절한 표정으로 수정구를 바라봤다. 수정구는 일방적인 연결이 불가능했다. 언제나 상대 쪽의 응답이 있어야만 한다.
[무슨 일이야?]
수정구가 켜지며 인상을 찌푸린 에단의 모습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