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화] 모룬 (1)
유려한 칼의 궤도.
카론 또한 뼈를 깎는 수행을 거듭한 블란테의 일원이었다. 수도 없이 반복한 검격인 만큼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다.
쾅!
하지만 카론의 검은 허무하리만큼 손쉽게 막혔다.
모룬의 주위에 펼쳐진 검은 장막.
강력한 충격에 손아귀가 저릿했다.
“어떻게 알았지?”
모룬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름이 치밀었다.
카론이 뒤를 돌아보며 어리둥절하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뭐 하고 있어!”
카론의 노기 어린 포효에 그제야 수습 기사들이 반응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인지하고 칼자루를 쥐었다.
“저희도 돕겠…….”
“닥치고 빨리 꺼져!”
카론이 으르렁거렸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수습 기사들이 참전한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저게 형이라고?’
외향은 분명 모룬의 모습이었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모룬과 전혀 달랐다.
‘그리고 이 마나…….’
음험하기 그지없는 마나였다.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저릿했다.
“음, 어떻게 알았지?”
모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누구야?”
“네가 알고 있는 그 녀석은 맞아.”
“뭐?”
쾅!
모룬이 우악스러운 주먹을 휘두르자, 카론이 재빠르게 반응해 검을 들었다.
이윽고 주먹이 검을 가격했다. 강한 충격이 내장을 타고 전해졌다.
“커헉!”
순식간에 엄청난 거리를 밀려난 카론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고개를 든 카론의 얼굴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빨리 안 튀어 나가?!”
머뭇거리는 수습 기사들을 향해 카론이 포효했다. 지금 상황에 저들이 도움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보다 카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냥 나가게 둘 수는 없는데.”
모룬이 움직이려 들자, 카론이 달려들었다. 카론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안 된다니까.”
모룬이 코웃음을 쳤다.
다시금 나타난 검은 장벽에 카론이 움직임을 멈췄다. 카론의 눈동자가 모룬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후웅!
휘둘러지는 모룬의 주먹.
카론은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였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 적어도 수습 기사들이 자리를 피할 시간을.
카론이 상체를 숙여 모룬의 주먹을 피해 냈다. 반격을 꾀하려던 순간 다음 주먹이 곧바로 이어졌다.
‘제길!’
카론이 다시금 칼을 들어 방어했다.
그가 쥐고 있는 검은 뛰어난 명검이었지만, 연이은 공격을 버티는 것은 힘겨웠는지 이내 부러지고 말았다.
카론이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이를 악물며 이성을 유지했다. 고개를 드니 모룬이 느릿한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짜고짜 싸우는 것 대신 대화를 좀 나눠 보는 게 어떤가?”
모룬이 씨익 웃었다.
* * *
줄리엔과 용병들은 의뢰를 수행하며 영지로 복귀했다. 여러 의뢰를 수행하니 이름값이 올랐고, 덩달아 보수 또한 올라갔다.
“……이렇게 건전하게 돈을 벌 수도 있는 거군.”
줄리엔이 두둑한 주머니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걸을 때마다 돈주머니가 짤랑거리는 게 느껴졌다. 감회가 새로웠다.
“이제 와서 회개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회개는 무슨.”
단원의 우스갯소리에 줄리엔이 피식 웃었다. 늘 타인의 것을 빼앗는 삶을 살아오다가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게 되었다.
‘어찌 보면 다 그분 덕인가…….’
줄리엔의 머릿속에 에단이 떠올랐다. 에단과의 조우가 아니었으면 그들은 아직 약탈을 하면서 삶을 영위했을 것이다.
알량한 힘으로 타인을 핍박하면서 말이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세상은 넓었고, 넓은 세상에는 괴물들이 즐비했다.
당장 어깨 위에 올라타 있는 꼬맹이도 괴물 같은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달려들어도 상대가 안 될 만큼.
“이제 곧 도착하겠네요.”
“그러게, 녀석들은 뭐 하고 있었으려나.”
“큭큭 동굴에 처박혀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그건 맞네.”
단원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웃음소리를 듣자 줄리엔도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거의 도착을 했을 무렵, 줄리엔 위에 올라타 있는 타미가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윽! 왜 그러십니까?”
“…….”
줄리엔의 물음에도 타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선두에서 걷던 줄리엔이 발을 멈추자, 단원들도 어리둥절해하며 멈춰 섰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줄리엔이 고개를 들어 타미를 바라봤다. 타미가 이렇게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을 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안 돼, 가면.”
“……네?”
“저기, 위험해.”
타미의 말에 단원들이 흠칫했다. 타미의 감은 예리했고, 단원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닙니까?”
“……기다려 봐.”
그들이 향하는 곳은 블란테의 영지다. 다른 곳도 아닌 블란테의 영지가 위험하다니.
쿵― 쿵―
심장이 요동쳤다. 왠지 모르게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속도를 올리자.”
“들어가려고?”
타미의 물음에 줄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와서 방향을 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들 체력은 자신 있겠지?”
“말해 뭐 합니까.”
단원들이 가슴팍을 두드리며 자신감을 표출했다. 그간 지옥 같은 훈련들을 통해 체력이 일취월장했다.
“그럼 모두 뛰자.”
줄리엔이 지면을 강하게 박찼다. 단원들과 함께 동굴이 있는 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벌컥벌컥.
벨몬트와 인간들은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끝마치고 보충제를 들이켰다. 처음에는 역하다고 생각했던 보충제도, 여러 시행착오를 거듭하자 충분히 먹을 만한 맛이 되었다.
“……크으, 이거 진짜 효과는 끝내주는 것 같습니다, 벨몬트 님.”
“후후, 이것만 먹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건 너도 알고 있지 않나?”
벨몬트는 칭찬이 썩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벨몬트의 눈이 빛났다. 붉은 기가 감도는 눈이 사람들을 훑어봤다.
인간들은 육체적으로 많은 성장을 일궈 냈다. 이전에도 건장한 몸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지금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근육과 핏줄들이 꿈틀거렸다. 벨몬트가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앙상하기만 하던 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느새 벨몬트의 몸에는 탄탄한 근육들이 자리해 있었다.
단기간 내에 이렇게나 많은 변화가 생긴 이유는 운동도 있었지만, 지금 섭취하고 있는 보충제의 영향이 컸다.
이걸 먹으면 별다른 공복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벨몬트가 최적의 영양 성분을 적절히 분배했기 때문이다.
‘몬스터를 생포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그것에 대한 문제는 에단이 나서자 손쉽게 해결되었다. 경험이 쌓이자 노하우도 생겼다. 이제는 보충제를 양산하는 것에도 큰 무리가 없었다.
벨몬트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혼자 산속에서 은둔하며 지낼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보람찼다.
“그럼 이제 슬슬 정리하고 휴식을…….”
말을 이어 가던 찰나, 벨몬트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단원들은 갑자기 벨몬트가 입을 다물자 의문을 가졌다.
“벨몬트 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조용히.”
벨몬트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단원들이 눈치를 살폈다. 동굴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덜덜.
벨몬트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벨몬트는 이와 같은 감각을 알고 있다.
공포.
그래 이건 공포였다.
벨몬트의 공포를 유발하는 기운은 친숙하기도 했다.
‘……죽은 마나.’
풍겨 오는 기운은 죽은 마나였다. 벨몬트는 최대한 존재감을 지웠다.
발각당해서는 안 된다.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동굴을 나서서 산을 내려가면 바로 블란테의 영지가 나타난다. 다른 곳도 아닌, 블란테의 영지에서 죽은 마나의 기운이 흘러나오다니.
‘그것도…… 이렇게 소름 끼치는…….’
대체 아래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 * *
모룬은 칩거하고 있었다.
대량의 기사들이 아카데미로 향했을 때도 모룬은 방 밖을 나서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블란테는 냉혹하다.
패자에게는 동정을 보이지도, 연민을 느끼지도 않는다.
다시금 일어서는 것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다.
하지만 모룬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고, 그렇게 하루가 다르게 폐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방 안에 빈 술병만 쌓여 가고 있었다. 모룬의 몸은 빠르게 망가지고 있었다.
원망, 분노, 절망, 좌절 따위의 안 좋은 감정들이 모룬을 침식했다. 에단과의 대련에서 패한 직후, 모룬의 입지는 급속도로 좁아졌다.
끝까지 믿고 따를 것처럼 굴던 지지 세력들은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블란테에게서 패배란, 그 정도로 치명적인 것이었다.
까득.
모룬이 이를 갈았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술병을 그대로 벽에 집어 던졌다.
술병이 박살 나며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하하.”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모룬의 자존심은 저 술병처럼 완전히 박살 나고 말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실수를 한 걸까.’
모룬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명실상부한 블란테의 후계자. 정통성과 명분을 모두 지니고 있는 자였다.
모룬은 블란테의 장남이었으며, 무력 또한 형제 중에는 범접할 이가 없었다. 가문 내에서 모룬의 앞날은 탄탄대로나 다름없었다.
그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무난하게 후계가 되었을 터였다.
‘그런데…….’
모룬이 입술을 깨물었다. 일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은 미꾸라지 한 마리 때문이었다.
가문의 수치라고 불리는 망나니 하나가 건방지게 굴길래 가볍게 콧대를 짓눌러 줄 생각이었다.
마나는커녕, 검조차 제대로 쥐지 못하는 녀석을 상대로 심각해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 결과 모룬은 에단에게 처참히 패배했고, 가문의 첫째이자, 장남이 가진 입지는 순식간에 흩어지고 말았다.
허탈했다. 영지를 다닐 때면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빛 속에 담긴 비웃음.
이가 절로 갈리는 상황이었지만, 모룬은 화를 표출할 수 없었다. 결국에는 패자가 잘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잃은 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에단에게서 빼앗아 오는 수밖에 없었다.
꽈아악.
모룬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움켜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고, 눈동자가 길을 잃은 것처럼 흔들거렸다.
에단의 모습을 떠올리자 공포라는 감정이 머리를 내밀었다.
“하하하.”
웃음소리가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아버지도, 첸도 아닌, 동생에게 공포를 느끼다니.
자신의 인생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모룬이 다른 술병을 찾아가던 도중.
“……힘이 필요하시나요?”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던 달빛이 흐려졌다. 방 안에 어둠이 침식해 오기 시작했다.
재빠르게 몸을 일으킨 모룬이 경계를 갖췄다.
“……누구지?”
“저는 적이 아닙니다.”
“웃기고 있군.”
믿기지 않는 개소리에 모룬이 코웃음을 쳤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블란테를 상대로…….”
“에단.”
어둠 속에서 언급되는 이름에 모룬의 말이 순간 멈췄다.
“그자를 죽이고 싶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