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화] 연회 (10)
에단의 입에서 연신 흘러나오는 폭탄 발언.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에단의 말에 내포한 의미를 알아차렸다.
도전.
이건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그간 숨죽이던 블란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단이 곁에 서 있던 칼베리안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칼베리안의 표정이 굳어 있자 에단이 웃으며 말했다.
“표정 좀 펴.”
“…….”
칼베리안이 기괴한 미소를 짓는 걸 본 에단이 피식 웃었다.
사람들의 주목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황제는 멀쩡히 살아 있고, 태자는 책봉되지도 않았는데, 황자가 황제 노릇을 하는 게 웃기지 않아?”
코웃음을 치며 내뱉은 에단의 폭탄 발언에 귀족들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그들이라고 모를 리가 있을까. 이것은 알고서도 건드리지 못하는 벌집이자, 1황자의 역린이었다.
귀족들이 1황자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1황자는 격노하지 않았다. 그저 입꼬리를 올린 채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에단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공식적으로 이 녀석을 지원할 거야. 1황자 측에 붙은 애들이 많은 건 알고 있지만.”
에단이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블란테와 비견될 만한 것들은 없어 보이는데?”
오만하기 짝이 없는 발언.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에단을 비난하지 못했다.
귀족들의 목줄은 에단이 쥐고 있었고, 황제의 혈족인 2황자라는 명분까지 얻은 상태.
더불어 에단의 말대로 블란테의 위명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서늘한 눈으로 좌중을 훑어본 에단이 입을 열었다.
“내가 할 말은 이게 전부야. 반박하고 싶은 사람 있나?”
그 물음에 유일하게 손을 든 자가 있었다. 바로 1황자 크리스토였다.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겨서 말이야. 질문해도 되겠나?”
“말해 봐.”
“블란테가 제국을 욕심내는 이유가 궁금한데. 갑자기 심경에 변화가 생긴 이유가 뭐지? 협약까지 무시한 채 말이야.”
‘그놈의 협약.’
에단은 협약의 내용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킬 생각도 없었다.
‘그러게 누가 먼저 엿을 먹이래?’
시작은 저쪽이 먼저다.
에단은 한 번 얻어맞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를 대비하려면.’
힘을 통합해 놔야 한다. 통합까지는 불가능할지 몰라도, 에단 자체의 영향력을 키워야 하는 건 확실했다.
‘레벨린, 신성왕국, 카이제르, 제국.’
이들이 모종의 협약을 맺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이것은 그것을 깨부수고 견제하기 위한 초석이었다.
“시작은 너희가 먼저였잖아?”
“흐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는데.”
“왜? 구체적인 이름도 언급해 줘? 물론 발뺌하겠지만, 그래도 의심하기에는 충분할 것 같은데.”
“하하,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될 것 같군. 아무튼 자네의 의사는 잘 알겠어.”
크리스토가 은은한 안광을 빛내며 에단을 응시했다.
“정말 우리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못 할 건 뭐가 있어?”
“제국의 힘을 얕잡아 보는 거 아닌가?”
“너야말로 블란테를 우습게 보는 거 아니야? 그리고 누가 보면 황제 취임식이라도 올린 줄 알겠네.”
“하하하,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크리스토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에단을 향한 회유가 통하지 않을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만일 예상을 깨고 회유가 된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것이다.
“그럼 앞으로도 기대하지.”
“그래, 기대하는 게 좋을 거야. 이게 전부가 아니거든.”
에단이 칼베리안과 함께 단상을 내려왔다. 크리스토가 칼베리안을 향해 속삭이듯 읊조렸다.
“달라졌군.”
악의나 견제가 느껴지지 않는 어조였다. 오히려 기특함이 섞여 있었다.
칼베리안은 순간 멈칫했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분위기는 이렇게 됐지만, 어떤가? 계속 연회를 이어 가는 게.”
“다음에 제대로 준비했을 때 불러.”
“이것 참 아쉽군. 저기 저 아리따운 영애는 열심히 준비해서 지금 막 도착한 것 같은데.”
에밀라는 멍하니 서서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화려하게 단장한 에밀라의 모습을 본 에단이 피식 웃었다.
“……제 꼴이 웃깁니까?”
에밀라가 뾰족한 눈초리로 에단을 노려봤다.
“아니, 의외라서.”
에단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뒤, 연회장을 걸어 나섰다. 멍하니 서 있던 에밀라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에단의 뒤를 따라갔다.
‘역시 이런 옷은 나랑은 맞지 않아.’
연회장을 나서는 에밀라는 웃고 있었다.
* * *
에단은 휴식조차 없이,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는 황성을 나섰다.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블란테의 예복은 비교적 단출했지만, 그래도 예복인 만큼 편한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물론 아무리 불편하다 한들 에밀라가 입었던 화려한 드레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에단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에밀라를 바라보자, 에밀라는 시선을 회피하며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피식 웃은 에단은 도시를 걷다가 에밀라를 불러 세웠다.
“일단 멈춰 보지?”
“…….”
에밀라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에단은 칼베리안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왔다. 이전에도 몇 번 방문했던 식당이었다.
“앗! 또 오셨네요!”
“그래. 저번에 먹은 걸로 인원수에 맞춰서.”
“넵! 금방 준비해 드릴게요!”
반갑게 맞이하는 종업원에게 주문을 한 에단이 전에 앉았던 자리로 갔다.
“몇 번 왔나 보군.”
칼베리안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묻자,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은 그 뒤로 별다른 말 없이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들이 나왔다.
“……이거 기대 이상인데.”
음식을 입에 넣은 칼베리안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밀라도 꽤나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에단은 피식 웃으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에단의 시선은 어느 한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바로 테이블 중앙부에 위치한 상처.
‘우연의 일치인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었다.
이곳은 유동 인구가 넘치는 제국의 수도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장소이며, 테이블에 이러한 상처가 새겨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거슬려.’
뭔가가 있다고밖에 생각이 되지 않는다.
사라진 주인공, 달라진 룬어, 살아 있는 드래곤.
무언가가 비틀려 있었다. 하지만 선뜻 조사할 수도 없었다.
‘비밀이 밝혀지는 건 최대한 조심해야 해.’
해야 할 일들이 산재해 있었다.
‘카이제르와 신성왕국.’
녀석들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에단은 알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밝혀지겠지.’
지금 와서 불안감과 초조함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에단이 커다란 고기를 입에 넣어 그대로 씹었다.
콰직.
* * *
“후우.”
카론이 가쁜 숨을 내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그러고는 꽤나 한산한 연무장을 둘러봤다.
‘……정말 이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 둔다고?’
기분이 오묘했다.
블란테의 연무장은 언제나 사람들이 가득했다. 검술명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기사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기사들은 아카데미로 이주했고, 가문의 야장들도 거의 사라졌다. 남아 있는 자들이라고는 기사 몇 명과 수습 기사들이 전부였다.
‘……아버지와 첸 경도 아카데미로 갔고.’
어째서 재수 없는 에단에게만 그렇게 신경을 쏟는지 이해가…….
‘되네…….’
카론이 고개를 푹 숙였다.
블란테의 가훈은 약육강식이다. 검술 명가답게 힘과 무력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 명분이다.
과거 카론이 에단을 괄시하고, 에단보다 높은 입지를 다질 수 있던 것도 에단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기분이 우울해진 카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형까지 당해 버릴 줄이야.’
모룬은 형제 중 가장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20대의 나이에 최상급이라는 경지는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보기에는 성에 차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블란테의 주인은 모두 괴물 같은 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세간에서 보기에 모룬의 성취는 분명 뛰어났지만, 블란테의 기준에서는 애매했다.
그래도 순수한 무력으로는 간신히 합격점에 가까웠지만.
‘문제는…….’
모룬의 성격이 너무 단순무식하다는 것이다. 가문의 사람들도 그 점을 우려했다. 자고로 지도자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줄 알아야 했으니까.
‘그러던 와중에 대련에서 졌으니…….’
에단은 토벌에서도 블랙 오우거 사냥이라는 압도적인 성과를 냈다. 모룬의 입지가 흔들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 뒤로 모룬은 두문불출하기 시작했다. 훈련은 물론이고, 가문 밖으로도 잘 나오지 않았다.
소문은 빠르게 번지기 마련이다. 가문에서는 벌써 차기 가주로 에단을 지목하는 상황이었다.
자연스레 모룬을 지지하던 세력도 흩어지기 시작하면서 가문 내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훈련할 맛도 안 나네.”
카론이 들고 있던 목검을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터벅터벅 걸어가 수통을 들어 그대로 들이켰다. 물은 미지근했지만 갈증은 해소되었다.
“크으.”
수통을 비운 카론이 입을 닦아 냈다. 머릿속을 헤집던 잡념을 털어 내려던 그때.
스스스.
카론의 표정이 굳었다. 오싹함과 함께 전신에 솜털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동공이 좁아지고 피가 식는다. 소름이 등골을 타고 질주한다.
의심이나 의문 따윈 없었다. 카론은 지금 상황을 명백하게 인식했다.
두근두근.
‘누구지?’
카론이 주위를 둘러봤다. 몇몇의 수습 기사들은 아직 이 기운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차가워졌다.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한다. 카론의 손이 허리춤에 채워진 칼자루를 향해 올라갔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카론의 고개가 획 하고 돌아간다. 문이 열린 곳에서 우람한 덩치의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형님?”
연무장에 들어온 것은 모룬이었다. 모룬은 담담한 눈으로 카론을 바라봤다.
“오랜만이구나.”
카론은 모룬의 말투에서 짙은 이질감을 느꼈다. 무감정한 표정.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꺼림칙함.
두근―!
심장이 뛰었다. 지금 자신이 착각하는 게 아닐까.
카론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은 이미 땀에 절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이게 착각이라고?’
웃기지도 않았다. 이게 착각이라면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카론이 침을 꿀꺽 삼키며 호흡을 들이마셨다.
흐읍―
그러고는 모든 힘을 다해 소리쳤다.
“도망쳐라―!”
카론이 검을 뽑고 모룬에게 달려들었다. 모룬은 그런 카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알았지?”
모룬의 입꼬리가 주욱 찢어지며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모룬에게서 검은 기운이 분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