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8화] 연회 (9)
덜덜덜.
에밀라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압박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당장 문을 열어야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의지와는 별개로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머리에서는 시끄러운 경종이 쳐 대고 있었다.
‘도망가야 해.’
에밀라는 경지에 이른 검사이자, 암살자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공포란 조절할 수 있는 감정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공포는 제 의지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
‘대체…….’
에밀라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그렇게 망부석처럼 서 있던 와중.
에밀라를 압박하던 기운이 갑작스레 사라졌다. 그녀는 의문을 느끼며 문 앞으로 다가섰다.
빠악―!
콰앙!
그때 굉음이 터져 나왔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던 에밀라는 문을 열어젖혔고.
“…….”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입을 벌리며 할 말을 잃었다.
* * *
에단은 핸더슨을 후려치고 난 뒤, 속이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털어 냈다.
“아, 이제야 좀 묵은 체증이 내려가네.”
에단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크리스토를 기괴한 눈으로 바라봤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서 웃어?”
“아, 이거 꽤나 의외라서 말이야.”
크리스토의 눈이 검신으로 향했다. 그의 검을 막아 낸 이들은 이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맨손으로 붙잡힌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름 끼치는 금속음이 들렸음에도 크리스토의 검은 날이 상한 흔적조차 없이 영롱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씨익 웃은 크리스토가 검집에 검을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연회장의 문을 바라봤다.
“오, 저것 참 아름다운 영애가 아닌가.”
악동 같은 표정의 크리스토가 에단을 힐긋 바라봤다. 에단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에밀라를 바라봤다.
“왜 이렇게 늦었어?”
“……죄송합니다.”
또각또각.
에밀라가 침묵에 휩싸인 연회장을 걸었다. 주저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에밀라에게 이끌린다.
여러 상황이 그녀가 주목받게끔 만들어졌다.
“이거 주인공을 빼앗겨서 어쩌지?”
크리스토가 웃음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에단은 코웃음을 치며 가볍게 대꾸했다.
“어차피 내 일행인데, 뭐.”
“오, 정말로 그런 사이인가? 그렇다면 진심으로 축하하지.”
“장난해?”
에단이 미간을 좁히며 대꾸하자, 걸어 나오던 에밀라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푸른빛이 감도는 동공이 흔들렸다.
‘호오.’
표정의 변화를 눈치챈 크리스토가 흥미를 가졌지만, 이내 에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이제는 좀 분이 풀렸나?”
“분? 아직 남아 있는 게 있는데 풀리긴 뭐가 풀려.”
“아, 그건 그렇군.”
크리스토가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아직 청산해야 할 것이 남았다.
넋을 잃은 채 주저앉아 있는 여성.
‘그래……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꽤나 이름 있는 가문의 영애라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크리스토는 널리고 널린 귀족들의 이름을 외우지 않는다. 크리스토가 무감정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자, 그녀가 흠칫 몸을 떨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인지, 저 멀리 벽에 처박힌 채 피를 흘리고 있는 핸더슨의 모습과 자신을 바라보는 귀족들의 시선을 확인했다.
“아…… 아아…….”
사색이 된 얼굴로 이상한 소리를 내던 그녀가 엉금엉금 기어서 에단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려 들었다.
에단은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고, 그녀는 흐느끼며 에단을 바라봤다.
“에, 에단 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부, 부디 용서를…….”
에단이 물끄러미 전 약혼자를 바라봤다.
‘이름을 듣긴 한 거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애써 기억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별로 관심도 없고.’
이름을 알아서 어디에 쓴단 말인가. 이미 끝난 인연이었다.
에단의 싸늘한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녀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녀 또한 사교계에서 치열하게 살아오며 입지를 다진 귀족이었다.
‘나, 나는 끝났어…….’
귀족들의 차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이제 자신은 저들의 가십거리이자,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사교계에 몸담은 여자 귀족에게 있어 이와 같은 상황은 귀족 사회에서의 퇴출을 의미한다.
그녀가 힐긋 고개를 들어, 이번에는 크리스토를 바라봤다. 크리스토는 흥미가 식은 것인지 경멸과 지루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덜덜덜.
이제야 실감이 났다. 자신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감히 누구를 건드리고 말았는지.
귀족들 사이에서 입지를 다지기 위해, 해서는 안 되는 짓을 벌이고 말았다. 가문은 그녀를 지켜 주지 못한다.
그녀의 가문은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가문이 강성했다고 한들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1황자의 눈 밖에 났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문은 멸망의 길을 걷는다.
지켜보는 귀족들 중 어느 누구도 중재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녀 앞에 있는 이가 바로 블란테의 이공자와 제국의 1황자였고.
그녀는 겁도 없이 그들을 모욕했으니까.
“이것 참 신기하군. 이렇게 벌벌 떨 거면서 무슨 배짱으로 제국을 모욕한 거지?”
크리스토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여성을 바라봤다.
그녀는 감히 눈을 마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입을 뻐끔거렸다.
‘모, 모욕이라고……?’
그녀는 2황자의 입지를 알고 있었다. 황제의 피를 이었음에도 유명무실한 제국의 꼭두각시.
제국의 실권은 1황자가 움켜쥐고 있었고, 제국 내의 모든 귀족들은 1황자의 눈치를 살핀다.
그녀의 도발은 다분히 계획적이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블란테의 이공자와 2황자의 기를 죽여 놓으면, 자신의 위신이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어, 어째서…….’
1황자가 자신의 동생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번 일도 그걸 감안한 행동. 오히려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1황자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녀의 예측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믿고 있던 약혼자는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고, 잔혹한 성정으로 유명한 1황자는 싸늘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 죽을 거야…….’
피어에서 빠져나오자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기 시작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머리가 하얘지고 이성이 유지가 되지 않는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장소에는 에단이 있었다.
“제, 제발…… 제가 잘못했어요, 멍청했어요……. 다, 당신을 놔두고 다른 남자를 택하다니……. 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이번에는 달라질게요……. 제발…….”
그녀가 애절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두 손을 비비는 모습이 더없이 간절해 보였다. 하지만 에단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그녀의 고개가 돌아갔다.
“저, 저 여자 때문인가요? 제, 제가 더 잘할 수 있어요……. 첩이라도 괜찮아요. 시키기만 하시면…….”
“흐음, 참 보기 흉한 추태구먼. 더 보고 있을 텐가? 여자한테 손을 대기 싫다거나 그런 거라면 내가 대신…….”
“뭐라는 거야.”
에단이 표정을 구기며 대꾸했다. 그러고 나서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래도 주먹은 안 쓸게.”
“……네?”
그녀가 고개를 치켜든 그때.
짜악!
에단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핸더슨과 마찬가지로 허공에 붕 뜬 여자는 핸더슨 곁에 안착한 뒤 고개를 푹 떨궜다.
“…….”
다시금 정적이 내리깔렸다. 에단은 손을 털어 내며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별 같잖은 연놈들이 까불고 있어. 짜증 나게.”
“……하하핫!”
크리스토가 다시 웃음을 터트리자, 에단이 얼굴을 구겼다.
“넌 뭐가 그렇게 웃겨서 계속 웃어.”
“크흐흐, 미안하군. 내가 자네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여자라서 망설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여자면 목숨이 두 개라도 되나?”
“큭큭큭, 맞는 말이지. 통렬하게 동감하네. 하지만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연회장의 분위기가 아주 망가졌군.”
“쯧, 알아서 관리를 잘했어야지.”
“이건 따로 보상을 하지.”
“보상은 필요 없고, 어차피 여기 놀러 온 게 아니라서 말이야.”
“흐음? 그런가?”
에단이 몸을 돌려 칼베리안의 팔을 붙잡아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향한 장소는 크리스토가 있는 연회장의 단상 위였다.
단상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에는 충분한 높이였다.
크리스토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칼베리안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
순간 비명을 내지를 뻔한 칼베리안이 이를 악물며 에단을 노려봤다.
에단은 칼베리안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표정 관리 잘해라. 머저리같이 멍 때리지 말라고.”
“…….”
칼베리안이 표정을 굳혔다.
그것을 지켜본 에단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에단이 품에서 종이를 몇 장 꺼내 들었다.
후우.
천천히 숨을 내뱉은 에단이 공기를 삼킨 채 외쳤다.
“주목―!”
피어를 섞은 웅혼한 외침에 연회장이 흔들거렸다.
이미 모든 시선이 에단을 향하고 있었지만, 기를 죽여 둘 필요성이 있었다.
에단을 바라보는 자들의 표정들은 가지각색이었다.
공포, 두려움, 불안감, 초조함, 등등. 딱히 좋은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근데 이미 늦었어.’
애초에 이러려고 왔던 거라서 말이야.
“낯이 익은 얼굴들이 꽤 많아.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
에단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귀족들이 흠칫했다. 당장에라도 에단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감히 에단의 말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키야, 많기도 하네.”
에단이 명부에 쓰인 이름들을 하나하나 호명하기 시작했다. 이름이 호명된 귀족들의 안색이 파리해지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호명을 이어 간 에단은 종이를 넘겼다.
“탈세, 도박, 감금, 약탈, 살인, 조작……. 뭐, 각양각색이네.”
에단이 큭큭거리며 죄목들을 하나하나 읊어 나갔다.
상세한 것들은 아니지만, 죄를 저지른 당사자들에게 있어서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들이었다.
“아카데미에 관해서도 비리가 장난 아니네, 부정 입학부터 시작해서 말이야. 키야, 이러면서 권리를 주장한다고?”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종이에 적힌 내용을 모두 읽은 뒤, 그것들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러고는 찢은 종이들을 귀족들을 향해 흩뿌렸다.
“이 지랄들을 해 놓고, 양심이 있으면 알아서 찌그러져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에단의 흉흉한 안광이 귀족들을 향했다.
“아, 여기에는 없지만 증거자료도 다 있으니까 발뺌할 생각은 지우는 게 좋아. 뭐, 이제 와서 그럴 새끼들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히죽 웃은 에단은 칼베리안을 앞에 세웠다.
“이쯤 되면 신하들이 문제가 아니라 지도자가 문제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애초에 황제도 멀쩡히 살아 있는데 말이야.”
에단의 눈이 이번에는 1황자를 향했다.
1황자는 엷은 미소를 지은 채 단상 위에 있는 에단을 응시했다.
에단은 1황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1황자라고 너무 설치고 다니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