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화] 연회 (7)
사태는 단락되었다.
1황자는 그대로 자리를 떴고, 에단을 포함한 일행들은 남겨졌다. 칼베리안은 그 이후로 입을 열지 않았다.
“쯧.”
에단이 칼베리안을 보며 혀를 찼다.
‘곧 정신 차리겠지.’
에단이 알고 있는 칼베리안은 그렇게 나약한 심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상황이 되면 털어 낼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초면인 사용인이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예복을 준비해 드릴까요?”
“우리 둘은 괜찮아. 너는…….”
에단의 시선이 에밀라에게로 향했다. 에밀라는 우두커니 서서 눈을 끔뻑였다.
“차림새를 보니 챙겨온 건 없겠지?”
“……네.”
에밀라가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무작정 따라올 생각만 하였지 연회를 위한 예복 따위는 생각해 두지 않았다.
“드레스는 구비되어 있겠지?”
“당연합니다. 준비해 드릴까요?”
“부탁하지. 넌 쟤 좀 따라갔다 와.”
“……꼭 입어야 됩니까?”
“너 대체 여기 온 이유가 뭐냐?”
에단이 미간을 좁히며 묻자 에밀라가 고개를 숙인 채 문밖으로 나섰다.
에단은 따로 챙겨 온 예복을 꺼냈다. 블란테의 인장이 새겨진 가문의 예복이었다.
검은색 위주의 예복은 수수한 듯 보였지만, 가슴팍에는 블란테의 상징인 흑사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걸 입으란 소리인가?”
“어, 뭐 챙겨 온 거 없을 거 아니야.”
“허.”
예복을 받아 든 칼베리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블란테의 예복.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칼베리안은 멍청하지 않았다.
“……많은 시선이 끌릴 거야.”
“방금 내가 했던 말 기억 못 해?”
에단이 칼베리안을 응시했다.
어찌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칼베리안은 수치심에 입술을 깨물었다.
“기억해. 머저리 2황자로 살아가는 건 상관없는데, 나를 욕보이게 하지 말라고.”
에단은 무심하게 말했다. 칼베리안은 말없이 예복을 바라봤다. 흑사자가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명심하지.”
* * *
연회는 성대하게 벌어졌다.
제국이 주체하는 연회인 만큼 고위 귀족의 숫자도 많았다. 당연한 현상이었다.
아무리 제국에서 위명을 떨치는 귀족이라고 한들, 1황자의 눈밖에 들면 바람 앞에 촛불이나 다름이 없다. 모든 귀족들이 1황자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귀족들은 공포를 감춘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얘기 들었는가?”
“어떤 얘기?”
“블란테가 이번 연회에 참석한다고 하더군.”
“하하, 그것참 흥미로운 이야기군. 말도 안 되지만 말이야.”
“허허,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때 갑작스레 음악 소리가 멈췄다. 연미복을 입은 중년이 목을 가다듬더니 소리쳤다.
“1황자님께서 행차하십니다!”
문이 열리며 1황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연회에 참석한 모든 이들의 이목이 일제히 1황자에게 쏟아졌다. 1황자는 나른한 눈빛으로 귀족들을 훑어봤다.
“흠…….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보군.”
1황자는 이내 흥미를 잃었는지 몸을 돌려 옥좌에 앉았다. 그러고는 턱을 괸 채 다리를 꼬았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알아서들 놀게나.”
1황자 손을 들자, 음악 소리가 천천히 재개되었다. 잔뜩 경직된 분위기가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귀족들이 다시 이야기를 꽃피우고 있던 그때.
쾅!
굉음과 함께 거칠게 문이 열렸다. 귀족들의 이목이 쏠렸다.
1황자 때와는 다른 의미의 시선이었다. 문이 열린 그곳에는 에단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히죽 웃고 있었다.
“뭐야, 왜 이렇게 조용해?”
귀를 간질이던 음악 소리가 멎고, 적막만이 가득해졌다.
* * *
‘이건 진짜 미친 짓이야.’
칼베리안이 경악을 삼켰다. 에단의 대책 없는 성격을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 보인 행동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다.
“표정 관리해.”
에단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칼베리안이 최선을 다해서 표정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에단이 거침없이 걸어 나갔다. 모두가 넋을 잃은 그 상황에 한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큭큭큭! 정말 실망을 시키지 않는군.”
모두가 입을 다문 그때, 1황자의 웃음소리만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려 1황자를 바라본 에단이 피식 조소 지었다.
“넌 또 뭐라는 거야. 실성했냐?”
그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이제는 돌발 행동으로 치부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대체 어쩔 생각으로.’
제아무리 에단의 뒤에 블란테가 있고, 일신의 무력이 강하다고 한들 이곳은 적지 한복판이었다.
에단은 지금 명백히 선을 넘었고, 그걸 묵과할 이들은 많지 않았다.
연회장에 상주해 있는 기사들이 칼자루에 선을 얹었다. 소름 끼치는 적막이 맴돌았다.
기사들의 살기가 에단에게 집중되었다.
‘슬슬 시작해 볼까.’
이 도발은 에단이 계획한 것이다.
이곳에서 주목을 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에단이 정면에서 1황자를 바라봤다. 면전에서 모욕을 들었음에도 1황자는 전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흥미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의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행패를 멈추세요. 에단 블란테.”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
에단이 목소리의 발생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초면의 여인이 에단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얘는 또 뭐야?’
기억에 없는 인물이다.
에단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자, 에단 앞에 다가온 여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달라졌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나 했는데, 소문은 소문이었을 뿐이군요. 달라진 건 외모가 전부입니까?”
여인은 에단을 차갑게 쏘아붙였다.
눈을 끔뻑이며 여인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넌 누구냐?”
“……뭐라고요?”
“누군데 와서 아는 척이냐고, 아줌마.”
“아, 아줌마?”
여인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그어졌다.
하지만 에단은 정말 그녀가 누군지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얼굴을 본 기억도 없는 여자가 대뜸 와서 아는 척을 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었다.
“……말을 정정하겠습니다. 당신은 확실히 달라졌군요. 전보다 더 최악입니다.”
여인이 경멸 어린 눈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그쯤 되자 에단도 짜증이 일었다.
“뭐라는 거야. 짜증나게.”
“……잠깐.”
그때 칼베리안이 에단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칼베리안의 이야기를 들은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내 약혼자라고?”
“…….”
에단의 말에 여인이 고운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파혼을 당해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한들 지금 행동이 얼마나 부끄러운…….”
“이제부터는 제가 말하겠습니다.”
또다시 누군가가 개입했다. 다부진 체형을 가진 남자였다. 두꺼운 눈썹을 가진 남자가 에단 앞에 섰다.
‘얜 또 뭐야.’
이상한 애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두꺼운 눈썹의 남자가 에단을 사납게 노려봤다.
“하, 아무리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라고 하지만, 이건 좀 많이 심하군. 기사도라고는 모르는 이딴 망나니가 그러한 명성을 얻다니.”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에단을 조롱했다. 에단은 눈을 끔뻑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표정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재밌다는 듯 조소를 머금은 자들과 잔뜩 긴장한 채 굳어 있는 자들.
굳어 있는 이들은 낯이 익었다. 블랙마켓에서의 인연이 있는 이들이었다.
에단이 주위를 둘러보자 남자가 기고만장해져서 입을 열었다.
“하, 이제야 남들의 시선이 의식되나 보지? 왜 겁이 나나? 너의 그 알량한 가문이 너를 지켜 줄 거라고 생각했나 보지? 착각하지 마라. 블란테의 영광이 언제까지 지속될 거라…….”
“하여튼 말 존나게 많아요. 듣자 듣자 하니까 끝이 없네.”
“……뭐?”
에단이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남자를 응시했다. 에단의 얼굴에는 짜증이 서려 있었다.
“그래서 네가 누구냐고.”
“……끝까지 알량한 자존심을 부리는 건가? 나는 너희같이 몰락해 가는 가문이 아닌, 카이제르에 속해 있는 핸더슨…….”
에단은 핸더스라고 소개한 남자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귀를 후볐다.
“그래서 네가 쟤 새로운 약혼자라도 되냐?”
그 말에 핸더슨의 입이 주욱 찢어졌다. 그러고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너 같은 망나니 새끼보다는 나를 택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사태를 파악했으면 이제라도…….”
“닥쳐라.”
에단의 뒤에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2황자 칼베리안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에단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칼베리안을 바라봤다. 그가 앞으로 나오자, 핸더슨과 여인의 표정에 당혹감이 스쳤다.
“핸더슨, 내가 알기로 자네는 카이제르의 방계로 알고 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수많은 방계 중 하나면서, 말하는 건 꼭 직계 혈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껄이는군.”
“…….”
칼베리안이 같잖지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치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핸더슨은 2황자를 위아래로 훑으며 히죽 웃었다.
“2황자님, 지금 낄 장소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줄도 잘못 택한 것 같고요. 기껏 도망쳐서 붙어먹었으면 좀 제대로 된 놈과 붙어먹지 그러셨습니까.”
장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칼베리안이 차갑게 식은 눈으로 핸더슨과 여인을 번갈아 바라봤다.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고 있나?”
“네? 제가 무슨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핸더슨이 웃음기를 머금었다. 마치 자신의 말이 틀렸냐는 태도였다.
칼베리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 정도 위치였나.’
아무리 칼베리안이 실권을 잃었다고 한들 황제의 피를 이은 황족이었고, 계승권자 중 하나였다.
그런데 카이제르의 일개 방계 따위가 저따위 태도를 보이다니.
화가 치밀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건 자신만이 아닌 황족을 모욕한 것이다. 칼베리안이 크리스토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크리스토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개입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옥좌에 앉아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칼베리안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움켜쥔 손에 피가 배어 날 정도로.
“잘했다.”
에단이 칼베리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칼베리안이 입술을 깨문 채 뒤로 물러났다. 에단이 앞에 나오자, 핸더슨이 코웃음을 쳤다.
“결국 저딴 망나니 뒤에 숨으시려는 겁니까?”
“하하.”
핸더슨의 비아냥에 에단이 소리 내어 웃었다. 가만히 놔두니 아주 끝을 모르고 기어올랐다.
“지랄하네.”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에단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리고 압도적인 기세가 연회장에 휘몰아쳤다.
스스스스.
에단이 피어를 끌어 올렸다. 연회장의 건물이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느껴졌다.
드래곤에게 있어 피어는 권능이었다. 정점에 오른 종족에게 주어지는 권능.
하등 종족들이 감히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걸 용납하지 않는 권능이자 생사여탈권.
에단은 지금 연회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심장을 움켜쥐고 있었다.
“다시 한번 지껄여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