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화] 연회 (6)
들려오는 폭발음. 그리고 피부를 타고 오는 익숙한 기운.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에단이 살벌하게 웃었다. 거리는 멀지 않다. 지금 에단의 신체 능력이라면 순식간에 주파할 수 있는 거리였다.
에단이 마나를 끌어올렸다. 전신에서 힘이 들끓었다. 지면을 강하게 박차자 복도가 으스러졌다.
파바밧!
에단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굉음이 들려온 장소에 순식간에 도착한 에단은 즐비한 시체를 볼 수 있었다.
“…….”
검은 옷과 복면을 쓰고 있는 자들의 시체가.
예상은 적중했다.
에단은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여 칼베리안에게 마나를 한계까지 채운 세계수의 목걸이를 건넸다.
그리고 당부했다.
‘혹시라도 습격이 벌어지면 이걸 발동시켜.’
발동시키는 방법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기에 칼베리안은 고개를 끄덕였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이곳은 제국의 성이었고, 해가 떨어진 새벽도 아니었다.
그런 시간에 습격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터.
‘나를 병신으로 취급했다 그거지.’
에단의 눈이 살기를 머금었다. 이것은 블란테에 대한, 아니, 자신을 모욕한 행위였다.
복도와 객실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붉은 피가 곳곳에 난자되어 있었고, 죽은 이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에단이 발을 내딛자, 피 웅덩이에 파문이 생겼다. 회색의 마나가 감도는 보호막이 눈에 보였다.
“에, 에단?”
목걸이를 쥐고 있는 칼베리안이 보였다. 에단이 다가서자 펼쳐진 보호막이 사라졌다.
에단은 칼베리안에게 상황을 묻지 않았다. 칼베리안의 곁에 에밀라가 검을 빼 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습격이 있었습니다.”
에밀라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면 알아. 반응이 빨랐나 보군.”
“……이런 쪽은 익숙해서 말이죠.”
“그래.”
에단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습격한 이들의 무력 수준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만만치 않은 이들일 게 분명했다.
‘실력이 늘었나 보네.’
에밀라의 호흡은 평온했다. 쥐고 있는 검에도 피가 묻어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네이드 곁에서 지내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았다.
‘사고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심기는 더없이 불쾌했다. 포악한 살기가 에단의 주위에 넘실거렸다.
“이, 이게 무슨!”
뒤늦게 도착한 집사와 기사들이 참사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섬뜩한 눈빛에 집사와 기사들의 몸이 굳었다.
뚜벅뚜벅.
에단이 성큼성큼 걸어 나가자, 그들이 뒤로 물러났다. 집사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 잠시…….”
“잠시 뭐.”
에단이 집사의 멱살을 붙잡아 그대로 들어 올렸다.
“네가 꾸민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마스터에 이른 경지, 거기에 드래곤의 피어를 흡수한 에단이다.
살기를 실어 노려보는 행위만으로도 어지간한 사람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끄, 끄으으으…….”
집사가 눈을 까뒤집으며 덜덜 떨었다. 사타구니가 축축해지며 바닥에 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일단 손을…….”
기사 한 명이 멱살을 쥐고 있는 에단을 제지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에단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어쭈.”
에단의 눈이 사나워졌다.
퍼억!
에단의 발길질에 손을 뻗은 기사 하나가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단순한 발길질에 불과했지만, 벽에 처박힌 기사는 그대로 고개를 푹 떨궜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오?”
“무슨 짓?”
에단이 기사들을 노려보며 코웃음을 쳤다. 에단은 이런 엿 같은 경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쾅!
에단이 발로 바닥을 내려찍었다. 바닥이 박살 나며 거대한 충격이 주위를 휩쓸었다.
“지금 뭘 하는지 모르겠어?”
“사태의 전말도 파악하기 전에 제국을 적대하겠다는…….”
“큭큭, 지랄도 정도껏 해야 받아 주지.”
이대로 유야무야 넘어가 봤자, 제국에서 발을 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습격한 자들에게 되도 않는 복면을 씌워둔 것만 봐도 속셈이 빤히 보였다.
통하면 그만, 통하지 않아도 발뺌.
상대를 어지간히 우습게 보는 경우가 아니면 감히 시도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행위를 제국은 버젓이 저질렀다.
‘그것도 내 눈앞에서.’
하하.
이렇게 꼭지가 돌아 버린 적은 오랜만이다. 불쾌함이 조절이 되지 않았다.
저들이 습격해 놓고 저들이 해명하는 것을 두고 보라고?
내가 아주 상병신으로 보이는 건가?
“어떻게 할까.”
에단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응하려던 기사들의 몸이 움찔거렸다.
에단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내포한 의미를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검을 들고 있던 기사들의 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제국이 자랑하는 근위 기사가 떨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것도 단 한 명 앞에서.
“표정 한번 살벌하군그래.”
복도의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단과 기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곳에서 다가오는 이는 1황자 크리스토였다.
“화, 황자님!”
기사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1황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참혹한 광경을 훑어봤다.
“벌건 대낮에, 그것도 내 성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이것 참 탄식을 금할 수가 없네.”
크리스토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낯빛에는 씁쓸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눈빛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시체들에게 한 줌의 관심도 없다는 표현이 걸맞을 것 같았다.
크리스토는 입으로만 탄식했다. 그는 시체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정면으로 에단에게 다가왔다.
“이것 참 면목이 없군.”
“그럴만하지. 제국이 이딴 추태를 보였으니까.”
“하하, 그 점은 사과하지. 아, 말로만 사과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게.”
“말로만 안 한다면?”
“흠, 일단.”
크리스토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에단의 눈이 크리스토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크리스토의 어깨가 들썩이자 어느새 그의 손에 검이 쥐어져 있었다.
“쓰레기부터 정리했네. 하핫.”
크리스토가 해맑게 웃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기사들의 얼굴에 의문이 새겨지는 순간.
스르륵.
기사들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목을 잃은 기사들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아, 아직 까먹은 게 있었군?”
크리스토가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집사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쯧쯧, 얼마나 나를 부끄럽게 만들어야 만족할 셈인가?”
푸욱.
그러는 아무렇지 않게 기사의 심장부에 검을 박아 넣었다. 일말의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행위였다.
크리스토가 뒤편에 있는 기사들을 향해 검을 내밀자, 기사들은 공손히 크리스토의 검을 받아들었다. 이러한 행위가 아주 익숙한 듯 보였다.
“너 지금 뭐 하냐?”
“실수를 저질렀으면 책임을 져야 하지 않나? 이건 그것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럼 목이 잘려야 하는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에단이 비아냥거리며 묻자 크리스토가 웃으며 답했다.
“하하, 미안하지만 아직 죽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야. 불쾌한 것은 이해하지만 나의 결백함은 알아줬으면 좋겠군. 맹세하건대 이번에는 손을 쓴 적이 없네. 저번 방문 때 여관에서 습격한 적은 있지만.”
“그거 너 맞았구나?”
에단이 사납게 웃으며 크리스토를 향해 다가섰다.
크리스토의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이 움직이려 들었지만, 크리스토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결국에는 둘 다 무사하지 않았나?”
“그렇긴 하지.”
에단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크리스토를 스쳐 지나갔다.
후웅!
에단이 그대로 기사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기사가 에단의 공격을 피해 내기 위해 뒤로 물러섰지만, 에단은 더욱 가속했다.
퍼억!
기사의 얼굴이 그대로 박살났다. 오러가 실린 둔기에 얻어맞은 것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졌다.
“오오.”
크리스토가 감탄사를 내뱉으며 박수를 쳤다. 에단은 인상을 구기며 피 묻은 손을 털어 냈다.
“나도 분풀이는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불만 없지?”
“하하, 불만이 있을 리가. 오히려 호쾌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네.”
“연회에서도 볼 수 있을 거야.”
“그것참 기대가 되는군. 빨리 연회 시간이 되면 좋을 텐데.”
에단과 크리스토가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에단이 입을 열었다.
“객실이나 다시 안내해 주지?”
“아! 이거 계속해서 실례를 범하는 것 같군. 바로 다시 안내해 주지.”
크리스토가 시선을 돌려 칼베리안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칼베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오랜만이군.”
에단을 볼 때와 달리 칼베리안을 바라보는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잠시 칼베리안을 바라보던 크리스토는 이내 흥미를 잃은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럼 연회 때를 기대하겠네.”
멀어지는 크리스토를 보며 칼베리안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에단이 멀어지는 크리스토를 응시하다가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십 구가 넘는 시체가 즐비해 있었다. 에단이 다시 칼베리안을 응시했다. 칼베리안의 낯빛은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정신 차려.”
“……어.”
에단은 혀를 차며 칼베리안에게 다가가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뻐억!
“크윽!”
칼베리안이 정강이를 움켜잡으며 신음을 내뱉었다.
“에, 에단 씨?”
에밀라가 곁에서 당혹스러워하며 에단과 칼베리안을 지켜봤다. 에단은 경멸 어린 눈빛으로 칼베리안을 응시했다.
“내가 정신 차리라고 했지. 그딴 식으로 굴라고 여기에 데리고 온 줄 알아?”
에단이 으르렁거리며 말하자, 칼베리안이 입술을 깨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나더러 대체 어쩌라는 거지? 이번 습격. 그 녀석의 지시가 아니라는 건 사실일 거야. 녀석은 나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어. 녀석은…… 나에게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아.”
꽉 움켜쥔 주먹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칼베리안의 얼굴은 충격과 분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네 징징거리는 거 듣자고 여기까지 온 건 줄 알아?”
“……뭐?”
“관심이 없다고? 뭐, 관심받고 싶어서 왔어? 내가 정신 차리라고 했지?”
에단이 칼베리안을 거칠게 쏘아붙였다. 칼베리안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에단을 바라봤다.
“네가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는 머저리라는 건 나도 알아. 가진 거라고는 인정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알량한 핏줄뿐인 병신 새끼지.”
“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고?”
에단이 칼베리안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너 혼자서 쪽팔리거나 궁상떠는 건 신경 안 써. 근데 잊었어? 너는 지금 블란테의 지지와 후원을 받고 이 자리에 있는 거야. 아무것도 없는 병신 2황자가 아닌, 나와 블란테를 등에 업고 있는 2황자라고.”
“…….”
“방금 네가 저 새끼한테 개처럼 쪽 당한 거? 난 원래 네가 그런 새끼인 거 알고 있었어. 그걸 알고도 데리고 온 거고.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잖아?”
에단의 입가가 비틀렸다. 불편한 심기가 여실히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기억해. 이제는 우리가 엿 먹일 차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