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화] 연회 (5)
에단과 일행이 성내에 들어섰다.
칼베리안은 감회가 새로웠는지 복잡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에단은 이미 한 번 와 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심드렁한 표정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일행이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동안, 칼베리안은 에단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종종 흠칫 놀라거나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쫄지 말고 어깨 펴.”
에단이 조용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 말에 칼베리안이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금발 벽안의 외모.
사람들의 시선이 칼베리안에게로 향했다.
애초에 시선이 쏠리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2황자가 실종되면서 성내에는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2황자 주변 인물들의 대대적인 처형이 벌어질 정도였다.
그런 2황자가 제국으로 복귀했다. 그것도 블란테의 차남과 함께.
당연히 바라보는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칼베리안을 응시하는 눈빛에는 날이 서 있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에단이 코웃음을 쳤다.
‘같잖군.’
아무리 칼베리안이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라고 한들 제국의 2황자였다.
그 말인즉, 황제의 피를 이은 적통이라는 소리.
그런데도 저따위 시선을 보내다니.
에단이 느끼기에는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생각될 수준이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서도.’
에단도 저와 비슷한 시선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이 몸에 처음 빙의했을 때, 가문의 사람들이 에단을 바라보던 눈빛이 딱 저것과 비슷했다.
그래서일까.
아니꼬운 기분이 든 에단이 슬며시 피어를 끌어올렸다. 최대한 조절해 극히 일부만을 표출했다.
‘눈깔 착하게 떠.’
에단이 속으로 되뇌었고, 그 순간 피어가 표출됐다.
그러자 칼베리안을 매섭게 노려보던 이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안색이 파리해진 이들은 양반이었다.
대다수의 사용인은 자리에 가만히 서 있지도 못한 채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개중에는 바지가 축축하게 젖은 이들도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칼베리안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에단은 칼베리안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는 손님 대접이 아주 형편없구만.”
모두가 들으라는 듯 선명한 목소리로 말한 에단은, 다시금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칼베리안이 빠른 걸음으로 에단을 뒤쫓았다.
“……쓸데없는 짓을.”
칼베리안의 말에 에단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뭔 개소리야?”
“…….”
시치미를 떼는 모습에 칼베리안의 눈썹이 잠시 경련했다. 에단은 다시 앞을 향해 발을 옮겼고, 칼베리안은 앞서 나가는 그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따라갔다.
그렇게 길게 늘어진 복도를 걷고 있자, 멀리서 중년 남성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황가의 집사로 보이는 남성은 에단 앞에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조금 더 늦었으면 돌아갈 뻔했어.”
에단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아무렇게나 내뱉었을 뿐이었지만, 집사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는지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집사가 고개를 드는 순간, 칼베리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
집사의 동공이 흔들렸지만 그는 당혹감을 지운 채 맡은 일을 수행했다.
일행은 각자의 방을 배정받았고, 에단은 집사를 향해 말했다.
“우리 둘은 같은 방을 썼으면 하는데?”
에단이 엄지손가락으로 곁에 있는 칼베리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집사는 잠시 난색을 표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제국이 어떤 개수작을 부릴지 알아야지.
집사는 다시 다른 객실들을 안내해 줬다.
에밀라는 개인용 독실을, 에단과 칼베리안은 같이 지낼 방을 받았다.
방에 들어선 에단은 비치되어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유가 가득한 에단의 행동에 칼베리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너는 걱정도 되지 않는 건가?”
“걱정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에단이 다리를 꼬며 말을 이었다.
“잊었어? 우리는 어디까지나 초대받은 입장이야. 기왕 초대받은 거 제대로 즐겨야지.”
“그런 모순적인 궤변이 과연 그놈들에게 통할지가…….”
“안 통하면 뭐 어쩔 건데.”
에단이 코웃음을 쳤다. 에단의 눈빛에 스산함이 맴돌았다.
“내가 말했잖아. 이번에는 경고로 끝나지 않는다고.”
“…….”
칼베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실감이 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금 전쟁을 선포하러 온 것이다.
* * *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래?”
기사의 보고에 크리스토가 흥미를 보였다.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꽤나 의외군. 이번에는 누구랑 왔지? 전에 왔던 마탑주인가?”
“두 분과 동행하셨습니다. 한 분은 아카데미의 교수이고, 한 분은…… 2황자님이십니다.”
“호오.”
크리스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사가 긴장한 기색으로 크리스토의 반응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불쾌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다는 듯 입가에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궁금하네. 이번에는 무슨 짓을 벌일지.”
“……괜찮으시겠습니까?”
“음?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건가?”
크리스토가 기사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기사는 그제야 본인의 실수를 인지했는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뭘 또 실례까지야. 궁금할 수도 있는 거지. 안 그래?”
크리스토는 관대함을 보였다. 기사에게는 낯선 모습이다. 그는 언제나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었기에.
크리스토가 잔뜩 굳어 있는 기사를 향해 킥킥거리며 웃었다.
“궁금하잖아.”
“어떤 점이 궁금하신 것일지…….”
“그 녀석이 과연 어떻게 변했을지.”
실망시키지만 않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 * *
에단은 객실에서 태연자약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칼베리안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 사나우니까 그만 좀 하지?”
에단이 연신 다리를 떨고 있는 칼베리안을 노려봤다. 칼베리안은 떨던 다리를 멈추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칼베리안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할 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자님께서 찾으십니다.”
황자의 호출로 인해 에단은 객실을 나섰다.
* * *
크리스토가 호출한 인물은 에단 하나였다. 칼베리안은 객실에 혼자 남아 있었다.
‘허튼짓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일을 대비해 에단은 몇 가지 조치를 취해 놨다.
“……이곳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기사들이 문을 열었다. 화려한 장식들이 수놓아진 응접실의 중심에는 1황자가 앉아 있었다.
옥좌에 앉은 채 거만하게 턱을 괴고 있는 1황자는 에단을 보자마자 히죽 웃었다.
“반가운 얼굴을 또 보게 되는군.”
“이거 어쩌지? 나는 별로 반갑지가 않은데.”
곧바로 빈정대는 에단의 대답에, 문을 연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에단의 도발에도 1황자는 개의치 않고 손을 휘저었다.
“신경 쓰지 말고 문이나 닫아. 간만에 만난 친우와 할 얘기가 많으니.”
1황자의 말에 기사들은 문을 닫았다. 호화스러운 방 안에는 에단과 크리스토 둘만이 남았다.
에단이 응접실의 내부를 둘러보더니 해괴한 표정으로 크리스토를 바라봤다.
“너는 이게 예쁘냐?”
“나도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때때로는 보이는 게 더 중요할 때가 있는 법이지.”
크리스토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정신 나간 새끼.’
에단이 그런 크리스토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에단은 크리스토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짙은 권태감에 빠져 있는 전무후무한 천재.
그것이 바로 크리스토라는 존재였다. 전례가 없을 정도의 재능과 무력. 그리고 그것을 받쳐 주는 1황자라는 폭력적인 신분.
‘인정하기는 싫지만.’
크리스토는 어딘가 모르게 류태신과 닮아 있었다.
‘나를 상대하던 녀석들이 이런 기분이었나?’
직접 마주하니까 구역질이 치밀 정도로 재수가 없었다.
“그래서, 잘 쉬고 있는 손님을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고작 돈 자랑하려는 것 때문이었나?”
“그럴 리가. 단지 궁금해서 부른 거다. 실례가 안 된다면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어, 실례야. 묻지 마.”
“이번에는 무슨 짓을 벌일 생각이지?”
“내 말 무시하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크리스토는 에단의 거친 언행에도 아랑곳없이 눈을 빛냈다.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이번 연회, 속셈이 빤히 보이지 않았나?”
“본론이 뭔데.”
“단지 개인적인 호기심일 뿐이야. 아, 미리 말하지만 나는 너한테 악감정이 없어.”
“이거 어쩌지? 난 있는데?”
대화의 흐름을 툭툭 끊어 대는 에단을, 크리스토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크리스토의 눈은 어딘지 모르게 소름 끼치는 기운을 풍겼지만, 에단은 그의 눈빛을 정면에서 받아 냈다.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건 네가 처음이군.”
“그것참 안타까운 사실이네.”
씨익.
에단과 크리스토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기대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조금 되더군. 이렇게 말하기는 뭐하지만 어디 내놓기에는 부끄러운 동생이라서 말이야.”
“그래? 쫄리는 건 아니고?”
에단이 코웃음을 쳤다. 에단은 크리스토를 알고 있다. 그는 분명한 천재로 잔혹한 성징을 지니고 있었지만, 집착이 있었다.
자기 것에 대한 집착.
지금의 삶에 더없는 권태를 느끼고 있었지만, 자신의 판이 어그러지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한다.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크리스토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겁을 먹는다라…… 내가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멀쩡한 동생을 뭐 하러 산송장을 만들어? 너 사실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그 추측은 조금 실망스러운데.”
“딱히 너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 온 건 아니라서 별 타격은 없네. 오히려 연회가 기대 이하면 내가 실망할 건데, 괜찮나?”
연이은 에단의 도발에 크리스토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최선을 다해 준비해 보지.”
“그래, 먼 길 찾아왔는데 실망시키면 안 되지.”
한마디도 밀리지 않는 에단을 보며 크리스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같이 온 일행은 무슨 사이지? 각별한 사이라도 되나?”
“누구를 말하는 거지? 에밀라? 각별한 사이는 무슨, 그냥 직장 동료일 뿐이야.”
“흐음? 직장 동료를 이런 자리에까지 부르나?”
“하녀 대신 데리고 왔다고 생각해. 너 진짜 쓸데없는 관심이 되게 많다?”
“말하지 않았나. 나는 너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다고.”
“미안하지만 사양하겠어. 남자한테 관심받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야.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간다?”
“그래, 즐거운 시간이었다. 연회 시간이 되면 따로 알리도록 하지. 이 연회는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보답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에단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러든지.”
그렇게 에단은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섰다. 그 순간.
쾅!
멀리서 굉음이 터져 나오며 익숙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주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에단이 사납게 웃으며 소리의 발생지를 향해 지면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