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화] 연회 (2)
에단은 오랜만에 조우한 네이드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뭘 알려 준 건데?”
“그건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겁니다.”
“비싸게 굴기는.”
빙그레 미소 짓는 네이드를 바라보던 에단이 피식하고 웃었다. 네이드가 무슨 속셈을 지니고 있는지 예상됐다.
‘음흉하기는.’
에단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맑은 하늘이다. 현대에서는 비가 갠 다음 날이 아니면 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그때보다 더 맑은가.’
에단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고, 네이드는 그런 에단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내린 에단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네이드를 보며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자.”
에단이 다시 발을 옮겼다. 이제는 정말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바람 잘 날이 없긴 하지만.’
지금 같은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 * *
다비는 아카데미에 완전히 적응했다.
처음에는 눈엣가시 취급하고 배척하던 아이들도, 시간이 지나자 다비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다비는 알게 모르게 학급 내의 분위기를 장악했다.
선생들이 보기에는 천진하고 해맑아 보이는 모습을 유지했지만, 순간순간 드러나는 스산한 표정을 아이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선생들에게 울먹이며 토로해도 의미가 없었다. 선생들에게 있어서 다비는 말 잘 듣는 모범생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다비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권력으로 다비를 짓누를 수도 없었다.
다비는 이미 무리의 흐름을 읽고 대다수의 아이들에게 호감을 샀다.
때 묻지 않은 아첨을 당해 낼 아이들은 없었다.
다비를 싫어하고 질투하는 아이들은 소수였고, 좋아하고 호감을 가진 아이들은 다수였다.
‘마음에 안 들어!’
다비를 싫어하는 여자아이 중 하나가 뾰족한 눈빛으로 다비를 노려봤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루이즈. 나름대로 이름 있는 가문인 헨리스 가문의 막내딸로, 막내딸인 만큼 사랑과 애정을 듬뿍 받으며 부족함 없이 자라왔다.
‘로이스는 내 거란 말이야!’
루이즈의 시선이 로이스에게로 돌아갔다. 로이스는 다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로이스의 눈빛이 품은 눈빛의 의미를.
원래 로이스도 처음에는 자신과 같이 다비를 배척하는 무리였다.
로이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아이들이 다비를 싫어했으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로이스는 그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 뒤부터는 항상 다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울컥한 루이즈의 마음속에서 질투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온통 다비에게로 옮겨 갔다.
아이들뿐만이 아닌, 선생들의 총애까지도 얻었다. 루이즈는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질투가 났다.
한편 다비는 뜨거운 두 명의 시선을 느끼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럽게 귀찮네.’
아이들은 순수한 만큼 단순했다. 거칠고 사나운 용병들을 상대하던 다비에게 아이들 몇 명을 구워삶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물론 개중 몇 명은 다비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뒷배경.
나이가 어린 만큼 아이들은 유치하다. 가진 배경으로 서로를 저울질한다. 상대가 나보다 낮으면 깔보고, 높으면 아양을 떤다.
‘그건 어른들도 마찬가지인가?’
용병들에게 고된 생활의 회포를 푸는 장소인 여관은 대화의 장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온갖 이야기를 듣고 자란 다비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약간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뭐, 생활은 편해졌지만…….’
아카데미에 블란테가 들어온 이후, 다비를 향한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다.
다비를 데리고 온 것이 바로 블란테의 적통이라는 이야기가 퍼지게 된 것이다.
‘대단한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털털하던 에단의 모습이 떠올랐다. 피식 웃은 다비의 표정이 다시 침울해졌다.
‘……어떻게 한 번을 보러 안 오는 거야.’
서운함이 밀려왔다. 아카데미의 생활은 썩 즐거웠지만 이상하게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여관 생활 때와 비교하면 너무 행복한데도…….’
사미라와 에단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비록 말투는 투박했지만, 그 둘이야말로 다비가 가감 없이 본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때, 수업 중이던 선생이 다비를 불렀다.
“다비야.”
“……네?”
생각에 빠져 있던 다비가 고개를 들어 선생을 바라봤다. 선생이 손짓하며 다비를 불렀다.
“잠깐 이쪽으로 와 볼래?”
다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선생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요……?”
“별일은 아니고, 너를 찾는 사람이 와서.”
“찾는 사람이요?”
찾는 사람이란 말에 다비가 눈을 빛냈다.
“건물 밖에서 기다린다고 하니 지금 가 볼래? 어차피 수업이 곧 끝나기도 하니까.”
“네!”
다비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선생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러면 어서 빨리 가 보렴.”
“감사합니다!”
다비가 고개를 꾸벅하더니 총총거리며 교실을 빠져나갔다. 아이들이 교실을 나가는 다비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교실을 나선 다비는 설레는 가슴을 붙잡았다.
‘에단 오빠인가?’
뭔가 에단일 것 같다는 느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쁜 건 알고 있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이곳에서도 사람의 입을 통해서 조금씩 소식을 접할 수가 있었고, 에단이 매우 바쁘다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섭섭한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번에 만나면 한 소리 해야겠어.’
투정 부리는 건 정말 싫어하지만, 이번에는 서운한 티를 낼 생각이었다.
다비가 건물을 뛰쳐나가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비야!”
사미라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비를 맞이했다. 순간 다비의 표정이 굳었다.
사미라는 반가움을 주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비를 안아 들었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 그동안 잘 지냈니?”
“……엄마?”
“하하, 그래 엄마란다.”
다비는 묘하게 실망한 표정으로 사미라를 바라봤다. 하지만 사미라는 다비의 표정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사미라가 다비에게 뺨을 비비적대자, 다비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
“하하하하.”
사미라가 밝게 웃었다.
* * *
팟! 파밧!
휴고와 가토가 거리를 벌렸다. 동공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서로를 좇았다. 둘의 실력은 비등했으나, 휴고가 야수화를 시전했을 때는 가토를 앞섰다.
가토가 수세에 몰렸다. 반면 휴고는 가토를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가토는 방어 일변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토는 낭패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침착한 눈으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조급해하지 마라.”
그때 쇠를 긁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가토와 휴고가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에는 렉사르가 서 있었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렉사르가 있는 것이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둘은 대련을 계속해 나갔다.
휴고는 여전히 가토를 밀어붙였고, 가토는 뒤로 물러나며 공격을 쳐 내거나 흘리고 있었다.
그때 가토의 어깨가 들썩였다. 위협을 느낀 휴고가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멍청하군.”
렉사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건 눈속임용 가짜였다.
가토가 제자리에서 빙그르 돌았다. 그러고는 휴고를 향해 검을 투척했다. 순간 휴고의 눈이 커졌다.
타닷!
가토가 휴고를 향해 질주했다. 휴고의 머릿속이 순간 복잡했다.
아무리 휴고의 반응속도가 빠르다고 할지라도 공격을 본 뒤에 반응하면 늦었다.
‘어떡하지?’
가토의 노림수가 과연 뭘까. 에단이 보여 준 그 무릎 차기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것 또한 가토의 노림수였다. 휴고의 눈이 길을 잃은 것처럼 떨리자, 가토가 씨익 웃었다.
“미안하지만 몸싸움은 특기가 아니라서!”
가토의 신형이 순간 사라졌다. 마나를 운용하여 가속한 가토가 휴고를 향해 날아가던 칼자루를 붙잡았다.
휘익!
가토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휴고가 상체를 깊게 숙이며 간발의 차로 공격을 피해 냈다.
가토의 공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가토의 공격이 휘몰아쳤다.
상황이 역전됐다.
“보이는 것에만 신경 쓰지 마라.”
그때 들려오는 렉사르의 조언.
속절없이 밀리고 있는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렉사르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보이는 것에만 신경 쓰지 말라고?’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검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휴고는 모든 공격을 간발의 차로 피해 내고 있었다.
휴고이기 때문에 그나마 이 공격들을 흘려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뭔지 알 것 같아.’
휴고의 머릿속에서 에단의 움직임이 떠올랐다. 에단은 언제나 상대의 예측을 벗어난다.
‘먼저.’
휴고가 상체를 깊게 숙였다. 휴고가 갑자기 거리를 좁히자 당황한 것은 가토였다.
가토의 몸이 순간 멈칫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휴고가 노림수를 던지기에는 충분했다.
휘익!
휴고가 발로 바닥을 쓸었다. 그곳에는 가토의 발이 있었다. 순간 가토의 무게 중심이 흔들렸다.
“제길!”
가토가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황급하게 중심을 잡으며 검을 휘둘렀지만, 온전히 자세를 갖추지 못한 채 내지르는 검격은, 방금 전과 비교하면 조금도 위협적이지가 않았다.
휴고가 가토에게 엉겨 붙었다.
둘이 몸싸움을 시작했다.
붙었을 때의 완력은 가토가 휴고를 이겨 낼 수가 없었다.
가토의 손목이 완전히 제압당했다.
어떻게는 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늑대와도 같이 누렇게 물든 휴고의 눈이 가토를 응시했다.
“……제기랄, 내가 졌다.”
“고생했어.”
그제야 휴고가 가토를 놓아줬다. 떨어진 가토가 손목을 매만졌다.
“제기랄, 더럽게 아프네.”
“미안…….”
휴고가 여느 때처럼 돌아와 뒷머리를 긁적였다. 휴고에게 잡혀 있던 손목에는 붉게 멍이 들어 있었다.
“뭐 손목이 아픈 건 아닌데…… 아쉽긴 하네. 거의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지는 줄 알았어. 사실 거의 졌다고 봤는데…… 조언 덕분에.”
휴고와 가토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이 바라본 장소에는 렉사르가 팔짱을 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가토와 휴고가 어색한 경례를 취한 다음에 렉사르에게 다가갔다.
“렉사르 경, 여긴 어쩐 일로……?”
가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토에게 렉사르는 상대하기에 더없이 어려운 존재였다.
“왜, 내가 와서는 안 될 곳에라도 온 건가?”
“그,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단지 궁금해서 여쭈어봤던 겁니다.”
렉사르가 무감정한 눈초리로 휴고를 바라봤다. 휴고는 멋쩍은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렉사르를 바라봤다.
최근 들어서는 렉사르와 많은 대화를 나누며 조언을 얻긴 했지만, 여전이 대하기가 어려운 존재였다.
렉사르는 말없이 휴고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뗐다.
“별 의미는 없다. 단지…… 더 이상 아집을 부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뿐이다.”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고?’
휴고와 가토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