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화] 연회 (1)
에단에게 선전포고를 한다는 언질은 들었었다.
하지만 가주 앞에서 공언한 이상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약점을 전부 터트린다고?’
제국을 상대로?
이제는 형 앞에 서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형식적인 선전포고 정도가 아닌, 대놓고 엿을 먹이는 도발이다.
‘그 상황에서 앞에 나서라고?’
등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벌어질 상황을 떠올리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이 녀석이 우리들의 방패막…… 아니, 지지자인 2황자입니다.”
‘……지금 뭐라고?’
칼베리안이 기괴한 표정을 지으며 에단을 응시했다. 에단은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칼베리안을 돌아보지 않았다.
“하하, 꽤나 재밌겠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하.”
에단과 빈센트가 웃었다. 칼베리안은 저 둘의 대화를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뭐, 그런 의미에서 얼굴이나 비치려고 데리고 왔습니다.”
칼베리안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빈센트를 바라봤다. 동공의 떨림이 멎었다. 푸른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빈센트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봤고, 칼베리안은 입술을 뗐다.
“처음에는 무모하다고 생각했지만…….”
칼베리안이 에단을 힐긋 바라보더니 씨익 미소 지었다.
“한번 해 보려고 합니다.”
예상외의 대답에 빈센트가 말없이 칼베리안을 응시하다 웃음을 터트렸다.
“기대하도록 하지.”
빈센트가 말했다. 그로 인해 공식적인 블란테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 * *
“하이고, 내 팔자야…….”
에르미온이 학생들 앞에 섰다. 많은 학생들이 눈을 빛내며 에르미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시선들이었다.
‘마탑 애들도 직접 안 가르치는데…….’
밑에 깔린 후배들만 해도 산더미다. 구태여 귀찮게 직접 지도할 필요가 없단 소리였다.
가끔 심심할 때 조언 한마디만 던져 줘도 감격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직접 가르치라고?’
돈으로 환산해도 얼마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 방증으로 같은 교수인 크러쉬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에르미온이 이마를 짚었다. 당장에라도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부산물이나 마저 연구하고 싶었다. 새로운 마법을 창안할 기회이기도 했고.
‘그래도 그딴 취급을 받고는 못살지.’
식충이 취급을 하던 에단의 모습을 떠올리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에르미온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학생들을 훑어봤다.
“알 사람은 알 거라고 생각한다. 몰라도 그냥 그러려니 해. 귀찮은 건 질색이니까.”
교실을 완전히 장악한 위압감에 학생들이 긴장한 기색으로 에르미온을 바라봤다.
마탑의 탑주.
마법을 수행하는 모든 이들이 염원하는 위치.
홍염의 관장자라는 수식어답게, 화염을 다루는 분야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
그런 에르미온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 * *
수업이 끝난 학생들은 넋을 잃은 얼굴로 터덜터덜 교실을 나왔다. 퀭한 눈을 한 학생들의 모습을 흠칫거리며 바라본 리사가 말했다.
“……쟤네 상태 왜 저래?”
시체처럼 비척대는 동급생의 상태는 언뜻 봐도 좋지 않아 보였다. 리사 곁에 있던 율리가 답했다.
“아, 쟤네? 이번에 새로 수업 시작했잖아. 그 너도 봤던 에르미온 님…….”
“그분? 근데 수업을 더 늘릴 게 있어?”
“나도 없을 줄 알았는데 늘린다고 하더라고. 그러고 보니 그 일 뒤로 검술에만 너무 편향되어 있었잖아. 그래서 보충할 겸 한다고 하더라고. 원래 마법도 있었긴 한데…….”
“마법이라면 그 재수탱이?”
“리사야…… 목소리 좀…….”
리사에 입에서 나온 가감 없는 말에 율리가 당황해했다.
“내가 뭐 틀린 말했어? 걔 수업만 들어가면 아주 지 자랑만 하루 종일 늘어놓는데, 전부터 맘에 안 들었어. 오빠한테 개처럼 처맞을 때 내가 속이 다 시원했다니까?”
“그런데 맞은 건 너도…….”
“뭐라고?”
리사가 율리를 향해 쌍심지를 치켜뜨자, 율리가 쭈그러들었다.
“그런데 마법 수업은 우리는 안 들어도 되는 거 아니야?”
“필수 과목은 아니라고 한 것 같은데…… 어떻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런데 오빠란 인간이 어떻게 얼굴 한번 안 비치냐?”
리사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카데미에 도착하자마자 와도 모자랄 판에, 아직 얼굴도 비치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이구, 나 찾고 있었어?”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리사와 율리가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뒤편에 서 있던 에단은 묘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 리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어?”
리사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쏘아보면서 묻자, 에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처음부터.”
“이익!”
리사가 분통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단이 히죽 웃었다.
“보고 싶으면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
“누가 보고 싶대?! 웃기지도 않네 정말! 그냥 한 대 쥐어박고 싶어서 그랬거든!”
“쥐어박기는 무슨.”
에단이 풋, 하고 웃더니 말을 이었다.
“너 휴고랑 가토한테도 얻어터졌다며? 나한테 뭘 하고 싶으면 걔네나 이기고 말해.”
능글거리는 에단의 말투에, 리사가 부아가 치민 얼굴로 노려봤다.
당장에라도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사실에 기반한 말인 터라 할 말이 없었다.
재밌다는 듯이 리사를 바라보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드레이, 걔 어디 있는지 알아?”
“……드레이? 아마 기숙사에 있을걸?”
리사는 묘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보다가 드레이의 위치를 말해 줬다.
“그래? 수업 잘 들어라.”
“……그게 끝이야?”
“그럼 뭘 더 해 주랴?”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린 에단은 곧장 기숙사로 향했다.
그러고는 계단을 올라 방문을 벌컥 열자, 드레이가 화들짝 놀라며 에단을 바라봤다.
“교, 교수님?! 갑자기 이게 무슨…….”
“할 말 있어서 왔으니까 따라와.”
에단이 드레이를 이끌고 폐건물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드레이는 어안이 벙벙한 기색으로 에단을 따라 나왔다. 분위기가 사뭇 심각했다.
익숙한 건물 내부로 들어가자, 망령들이 질겁하며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겁에 질린 채 오들오들 떠는 망령들을 지나친 에단은 아무 교실 안에 들어갔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이거 들어 봐.”
에단이 칼집 채로 아슬란을 던졌고, 드레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검을 받아 들었다.
“이건……?”
드레이가 받아 든 검을 보며 눈을 깜빡였고, 에단은 물끄러미 드레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반응 없네.”
“네? 어…….”
드레이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검을 바라봤다. 분명 칼자루를 쥐고 있었지만 강한 반발력은 느껴지고 있지 않았다.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야…….’
다만,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미약한 기운이었다.
물론 그때와 비교했을 때 미약하다 정도이지, 내포한 신성력은 충분히 막강했다.
드레이는 검을 바라보다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간략하게 일전의 상황들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드레이가 멍항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는 말은 이 검이 성검이 아닐 수도 있다는 소리입니까?”
“아마도.”
에단이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동안 카이나는 단 한 번도 이 검을 성검이라고 지칭한 적이 없었다.
늘 부르던 호칭은 검의 이름인 아슬란.
과연 카이나과 아슬란이 어떤 비밀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그녀의 힘에는 제약이 가해졌다는 것이다.’
더 이상 드레이는 아슬란을 통제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전과 같은 무시무시한 신성력을 뿜어낼 수는 없겠지만, 통제되고 절제된 신성력이 위력적인 측면에서는 더욱 유리했다.
‘성녀와의 비교는…….’
직접 본 적이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드레이의 모습을 봐서는 딱히 밀릴 것 같지는 않았다.
드레이가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그럼 저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합니까?”
“달라진 건 없어. 장애물도 사라졌으니 때를 기다리면 되겠지.”
“때라고 하면……?”
“얼마 남지 않았어. 이번에 제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할 거거든.”
“…….”
드레이가 넋을 잃은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제국과 싸우겠다는 말을 이렇게 태연하게 내뱉을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되면 슬슬 신성 왕국도 대놓고 움직일 거야. 우리한테도 적대감을 표출하겠지. 그렇게 되면 민심도 자연스럽게 흉흉해질 테고. 비리가 가득한 귀족들과 신성 왕국이 적대하는 악의 세력. 이것 참 볼만해지겠는데.”
“……감당할 수 있을까요?”
“감당을 왜 못 해?”
에단이 자신감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말했잖아. 꼬우면 덤벼 보라고. 상대가 제아무리 신성 왕국이라고 해도, 단순한 힘 싸움에서 블란테의 적수가 될 것 같아?”
장담할 수 있다. 신성 왕국은 절대 정면승부를 걸지 못한다. 결국 그들이 사용할 수단은 무력이 아닌 정치와 민심이다.
“그를 위한 작업이야. 그 검이 성검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어. 사람들의 눈에 성검으로만 보이면 될 뿐이야.”
중요한 건 인식과 대중들의 시선.
‘그리고 그때가 되면 터트려야지.’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칭호를.
드래곤은 대륙을 떠들썩하게 할 만큼 거대한 떡밥이다. 에단은 그 떡밥을 충분히 활용할 생각이었다.
‘거슬리는 게 한두 개가 아니지만.’
지금은 계획한 일부터 처리해야 할 때였다.
그 얘기를 끝으로 에단과 드레이는 건물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네이드를 아직 못 봤군.’
아카데미로 복귀한 지 며칠의 시간이 흘렀지만, 네이드는 모습을 비치지 않았다.
의아한 일이었다. 네이드는 언제나 가장 먼저 에단의 곁을 지켜 왔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 때 익숙한 얼굴이 에단 앞에 나타났다.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네이드였다.
네이드를 본 에단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다?”
“오랜만입니다, 도련님.”
“뭐 하다가 이제 왔어?”
“잠시 볼일을 보고 오느라 그만……. 이야기는 대략 들었습니다. 많은 일이 있으셨다고요.”
“뭐…… 조금 귀찮은 일도 있었는데, 어찌어찌 해결은 됐어.”
“그것참 다행입니다.”
에단은 네이드와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이동했다.
드레이는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둘을 따라가다가 숲을 나온 뒤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 그래. 들어가 봐. 너무 관종 짓은 하지 말고.”
“관종…… 말입니까?”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는 드레이를 무시한 채로 걸어 나간 에단은 네이드를 향해 뜨뜻미지근한 눈길을 보냈다.
“하하, 시선이 부담스럽습니다.”
“별로 할 일도 없었을 텐데, 무슨 볼일을 보고 왔을까?”
“할 일이 없다니요. 이렇게 보여도 꽤나 바쁘답니다.”
네이드가 싱긋 웃자, 에단이 헛웃음을 지었다.
“뭐, 알아서 하겠지. 그래서 좀 쓸 만하던가?”
“네, 자질은 충분하더군요.”
“그렇겠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련님에 비할 바는 아니라서요.”
“알고 있어.”
“그것참 재수 없게 느껴지는 발언이군요.”
“당연히 그것도 알고 있지.”
하하.
워낙 많이 들었던 얘기라서 말이야.
에단이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