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화] 신경전 (2)
“…….”
렉사르에 관한 질문에 빈센트가 침묵했다. 평소와 같은 무덤덤하고 고요한 눈빛이었지만, 에단은 알 수 있었다. 그가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원래 저도 이런 걸 묻고 싶지는 않은데, 약속을 해서 말이죠.”
“……알고 싶느냐?”
“네, 이제는 알아야겠습니다.”
빈센트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에단을 응시하다가 입을 뗐다.
“……우리가 어째서 대륙에 영향력을 끼치지 않는지는 아직 모르겠지?”
“가주님.”
첸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 빈센트가 팔을 들어 괜찮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괜찮다 저놈에겐 알 만한 권한이 있으니.”
빈센트의 말에 첸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렉사르. 그 녀석이 어딘가 이질적이라는 것은 너 또한 알고 있겠지?”
“모르는 게 이상하죠. 그렇게 대놓고 광고하는데.”
에단의 허물없는 말에 빈센트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렇기에 녀석은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딱히 강요한 것은 아니다. 그 녀석의 선택이었지. 자신은 무리에 섞여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더군.”
“뭐 유별난 성격이긴 하더라고요.”
“유별나다라……. 그런 표현은 처음 듣지만 맞는 얘기 같군. 렉사르 그 녀석은 확실히 유별나. 자신이 인정한 자가 아니면 결코 따르지도 않지. 한마디로 나나 첸이 아니면 녀석을 통제할 수 없다는 거다.”
“그렇군요.”
빈센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에단을 바라봤다.
“너는 어떻지.”
“적당히 두들겨 주니 알아서 잘 듣던데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에단의 모습에 빈센트가 예상했다는 듯이 호쾌하게 웃었다.
“큭큭, 그 녀석을 그런 취급을 하는 것은 네가 처음일게다.”
“뭐, 저는 딱히 처음도 아니라서……. 그나저나 얘기가 산으로 가는 것 같은데, 그래서 녀석의 정체가 뭡니까?”
에단의 말에 빈센트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빈센트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녀석은…….”
빈센트가 입을 열었다.
* * *
블란테가 아카데미로 이동하면서 교수진이 대거 확충되었다.
기숙사에 마련된 식당으로는 수용이 불가능한 탓에, 식당을 확장 공사했다.
다행히 블란테의 기술자들에게 이런 내부 공사는 일도 아니었고, 덕분에 순식간에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식당이 완성되었다.
휴고는 식당에 들어서더니 탄성을 내뱉었다.
“와, 가문의 식당이랑 비슷한 규모인데?”
“나도 순식간에 지어져서 적지 않게 놀랐어. 음식은 그냥 그렇지만 넓어서 좋더라.”
“근데 그만큼 사람도 많네…….”
휴고가 몰리는 시선에 부담을 느꼈는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가토가 피식 웃으며 휴고의 등을 밀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배식이나 받아.”
휴고가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음식을 받고 식탁에 앉았다. 음식들은 꽤나 먹음직스러웠다.
“아, 여기도 먹는 건 자율이니까 먹고 싶으면 더 먹어도 돼.”
가토의 말에 휴고가 반색했다. 아이처럼 천진한 표정에 가토가 헛웃음을 지었다.
휴고가 여느 때처럼 허겁지겁 음식들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양 볼이 빵빵해지도록 음식을 밀어 넣은 휴고를 힐긋 본 가토도 이내 음식들을 입에 넣었다.
수업 지도가 끝난 직후 휴고와의 대련으로 허기진 상태인지라, 가토의 음식도 빠르게 줄기 시작했다.
“……가토 씨?”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에 가토가 고개를 들고는 눈을 끔뻑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에밀라였다.
“……많이 배고프셨나요?”
우물우물.
가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에밀라는 에르미온에게 간략하게 식당을 설명했다.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에르미온이 가토와 휴고를 힐긋 바라봤다.
“……더럽게 맛있게 먹네.”
먹는 모습만 바라봤는데 식욕이 돋을 지경이었다.
한창 식사를 하던 도중, 에단이 첸과 칼베리안과 함께 식당에 들어왔다. 에단은 식당을 둘러보더니 감탄 섞인 휘파람을 불었다.
“고생 좀 했겠는데?”
에단의 목소리에 음식을 오물거리던 네 명이 고개를 들어 에단을 바라봤다.
“……너희들 그동안 굶었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네 사람을 바라본 에단이, 음식을 배식받고 자리에 앉았다.
칼베리안도 에단 곁에 앉아, 묘한 표정으로 식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단이 음식을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먹으면서 들어. 지금 아카데미에 온 녀석들이 많지? 에밀라 너는 보지 못했겠지만, 드워프들도 꽤 있거든?”
“……드워프라고요?”
에밀라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뭐, 어쩌다 보니 데려오게 됐어. 처음에야 좀 혼란스럽겠지만 탈 없이 정착하면 도움이 많이 될 거야.”
드워프가 가지는 이점은 어마어마했다. 무언가를 만들고 수리하는 데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게 바로 드워프라는 존재들이다.
에단이 음식을 우물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엘프들도 정령술이나 활 같은 것들 다루는 데에는 워낙 정평이 나 있으니까, 필요에 따라서는 궁술 같은 과목을 만들어도 되겠네.”
궁술이나 승마 따위의 기술은 귀족들의 덕목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여러 혼란이 있을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많은 호응을 받을 것이다.
잠잠히 이야기를 듣던 에밀라가 입을 열었다.
“그건 누가 만들고 정리합니까……?”
에단이 우물거리면서 에밀라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거야 당연히 너희들이 해야지.”
“…….”
에밀라가 입을 다물었고, 곁에서 눈치를 살피던 가토가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인력은 충분하잖아. 저기 에르미온도 있고.”
“뭐? 지금 나더러 애새끼들이나 가르치라고?”
“그러면 여기서 한량처럼 백수 노릇이나 하려고 했냐? 지금 입에 넣고 있는 것도 다 돈인데.”
“야! 쪼잔하게! 내가 그동안 한 게 얼만데!”
“한 게 얼만데. 말해 보든가.”
할 말이 있으면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이 바라보는 에단의 눈빛에, 에르미온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당장에라도 반박하고 싶었지만, 막상 꺼내려고 해도 별달리 꺼낼 말이 없었다.
‘여기서 억지 부리면 또 드래곤 하트를 들먹이면서 협박할 텐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에르미온은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며 분을 가라앉혔다.
“……많이는 못 해.”
“마음대로 해.”
히죽 웃은 에단이 이번에는 칼베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이쪽은 아직 소개를 안 해 줬네. 뭐 내가 대신 말할까?”
칼베리안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뭘 그렇게 꼬나봐? 기껏 데리고 와서 밥 주는 사람한테.”
“……하아.”
에단의 태도에 칼베리안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칼베리안이 식기를 접시 위에 내려놓고는 말했다.
“칼베리안이라고 한다. 성은…… 레미안.”
칼베리안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에밀라와 가토가 들고 있던 식기를 놓쳤다.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아니, 잘 들은 거 맞을걸? 얘 제국의 황자야.”
에단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고, 가토와 에밀라는 넋을 잃었다.
“다들 표정이 왜 그래?”
우물우물.
에단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봤다.
* * *
식사를 마친 에단은 칼베리안을 이끌고 다시 빈센트의 집무실로 향했다. 에단은 빈센트의 말을 떠올렸다.
‘……이해는 되지만.’
뭔가가 꺼림칙했다. 마치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앞뒤가 안 맞는 게 아니야.’
모든 상황과 정황이 어색하게 맞물려 있었다. 억지로 납득하려면 할 수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다.
에단이 입을 다문 채 이동하고 있자, 긴장한 표정의 칼베리안이 에단의 팔을 잡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칼베리안의 말에 에단이 눈살을 찌푸렸다.
“말? 무슨 말을 해 줘?”
“……지금 내가 블란테의 가주를 만나러 가는 게 맞나?”
“어, 맞아. 일 치르기 전에 얼굴이라도 비추라고.”
“그러면 무슨 조언이라도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가령 이런 발언을 조심해야 된다거나…….”
칼베리안의 말에 에단이 기괴한 표정으로 칼베리안을 바라봤다.
“너 지금 장난하냐?”
“……뭐가 장난 같지?”
“애도 아니고, 무슨 조언이야 조언은. 그냥 얼굴 비추러 가는 건데. 남자가 그 정도 자신감도 없어?”
“……지금 이게 자신감을 거론할 문제라고?”
기막히다는 표정을 짓는 칼베리안을 놔두고 에단이 다시 발을 옮겼다.
“그냥 알아서 적당히 말해. 제국의 황자면 어느 정도 해 봤을 거 아니야? 면전에 대놓고 쌍욕만 하지 않으면 돼.”
“…….”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에단의 태도에 칼베리안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기대한 내가 머저리지.’
칼베리안은 결국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문 앞에 섰다. 몰려오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모습을 힐긋 바라본 에단이 문을 두드렸다. 빈센트의 대답이 들려왔고, 에단과 칼베리안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저자가 블란테의 가주.’
의자에 앉아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도 막강한 위압감에 솜털이 곤두섰다.
‘장난 아니군.’
하지만 여기서 기가 죽은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두려웠지만 칼베리안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슴을 폈다.
당당하게 빈센트를 마주 봤다. 빈센트가 칼베리안을 응시하더니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호오,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르군.”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칭찬한 게 맞으니 그리 받아들여도 된다네.”
칼베리안은 고개를 돌려 에단을 재촉하듯 바라봤다.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에 피식 웃은 에단이 입을 열었다.
“이제 본론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래, 두 차례나 날 귀찮게 한 이유를 한번 들어 봐야겠구나.”
“제국으로 가려고 합니다.”
“가려는 이유는?”
빈센트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마치 이번에는 무슨 대답이 나올지 기대하는 눈치였다.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놈들한테 엿 좀 먹이려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해서 견딜 수가 없네요.”
‘이, 이런 정신 나간 새끼!’
칼베리안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빈센트는 이제 익숙한 듯 에단의 말에도 씨익 웃고만 있었다.
“이제 대체 구체적으로 뭘 꾸미는지가 궁금하군.”
“그걸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돌아오니까 이런 게 있더라고요.”
에단이 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포장지에는 제국의 인장이 새겨져있었다.
“그건…….”
칼베리안이 흔들리는 눈으로 편지를 바라봤다. 에단이 편지를 펼치더니 읊었다.
“사족이 길어서 전부 읽지는 않겠습니다. 대충 말하자면 회포도 풀 겸 연회에 참석하라고 하네요.”
“그래서 그 연회에 참석할 생각이냐?”
“뭐, 당장 딱히 할 일도 없고,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자리에서 그것들을 터트리겠다?”
“안 될 거 있습니까?”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자, 빈센트가 실소했다.
“그것참 기대가 안 된다면 거짓말이겠구나.”
“그렇죠?”
둘의 만담을 듣고 있던 칼베리안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뭘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