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화] 신경전 (1)
휴고는 달려들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가토의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승패는 원래 찰나의 순간에 결정지어지고, 휴고는 지금 승기를 잡은 상태였다.
하지만 함부로 뛰어들 수는 없었다. 휴고의 본능이 말해 주고 있었다.
‘지금 뛰어들면 안 돼.’
압도적인 위압감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가토는 범상치 않았다.
‘언제까지 지켜볼 수는 없어.’
기다린다고 해결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휴고가 발끝에 힘을 줬다.
타앙!
휴고가 쏘아지듯 뛰쳐나갔다. 포착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먼저 확인부터.’
이건 어디까지나 실력의 향상을 위한 친선 대련이었다. 상대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휴고가 몸을 낮게 숙였다.
지면에 손을 짚고 바닥을 쓸듯 발을 휘둘렀다. 가토를 가늠하기 위한 공격이었다.
저벅.
가토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휴고의 눈이 커졌다. 종이 한 장 차이로 휴고의 발이 닿지가 않았다.
히죽.
어째서인지 미소가 그려졌다.
다시금 움직인 휴고는 탄력받은 덕에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가토는 눈을 감고 있었다.
격렬한 대련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파밧!
휴고가 순식간에 가토의 배후를 잡았다. 뒤를 잡혔음에도 가토는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믿는다.’
너무나도 무방비한 상태였기에 공격이 망설여졌지만, 휴고는 가토를 믿었다. 휴고가 손을 뻗었다.
챙!
휴고의 손이 튕겨 나갔다. 가토는 가만히 서 있는 채로 팔만 움직여서 휴고의 공격을 막아 냈다.
휴고가 가토의 검을 바라봤다. 보고 있지 않음에도 가토는 휴고의 공격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한 거지?’
당연히 방법은 알지 못했지만 호기심이 생겼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궁금해.’
휴고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재차 뛰어들려던 순간.
“여기까지 하자.”
휴고의 발이 멈칫했다. 가토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하아, 역시 아직은 힘드네.”
가토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련을 지속하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아쉽게도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체력이랑 심력이 바닥났어.’
근육이 경련하고, 머리가 핑 돌았다. 당장에라도 자리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머리는 지끈거렸지만 기분만큼은 어느 때보다 좋았다.
“어떻게 한 거야?”
휴고가 다가오며 물었다.
“으음…… 나도 설명하는 게 좀 어렵네.”
가토도 혼자서 고민해 봤지만 쉽게 답할 수가 없었다. 영감을 얻은 것은 빈센트와의 대련이었다.
그때 빈센트는 공간을 완전히 지배했고, 가토는 그 자리에서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괴물이야.’
가토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건 따라 하려고 해 봤자 따라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아무튼 놀랐어.”
“놀란 건 나야, 휴고. 이제 그거 컨트롤할 수 있는 거야?”
“응. 아직 뭐 완전한 건 아니지만…….”
휴고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표정 또한 순박한 시골 청년의 것으로 돌아왔다.
‘그것만은 아닌 것 같지만.’
가토가 휴고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휴고는 이전보다 훨씬 까다로워졌다. 까다로워진 이유는 비단 신체 능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꼬르륵.
휴고의 배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멍하니 휴고를 바라보던 가토가 웃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배가 고파진 건 가토도 마찬가지였다.
* * *
대강의 교통정리를 끝낸 에단은 빈센트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안에서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는데, 첸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똑똑.
에단이 노크를 한 뒤 서 있자, 빈센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에단이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예상대로 첸이 빈센트 곁에 서 있었다.
빈센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에단은 천연덕스럽게 빈센트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 빈센트는 미간을 좁혔다.
언뜻 봐도 심기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재밌었느냐?”
빈센트가 오히려 되물었다. 에단이 눈을 깜빡였다.
“뭐가 말입니까?”
에단의 말에 빈센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를 빼고 드래곤과 싸워서 즐거웠느냐는 말이다.”
“아, 그것 때문에 삐져…… 아니, 감정이 상해 계셨던 겁니까.”
에단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묻자, 빈센트가 언짢은 표정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내가 언제 감정이 상했다고 했지?”
“그러면 아무렇지도 않은 겁니까?”
“…….”
빈센트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에단이 하하, 소리 내어 웃다가 빈센트에게 말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부르고 싶었지만, 아시다시피 아버지는 지금 아카데미의 중축 아니십니까? 첸도 없는 상태에서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은 잘하는구나.”
“사실인 걸 어쩝니까. 그리고 별로 빚을 지고 싶지가 않아서 말이죠.”
에단이 히죽 웃자, 빈센트가 날카롭게 노려봤다. 한참을 노려보던 빈센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좋다.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드래곤도 처치했겠다, 온 대륙의 관심이 네게 쏠리겠군.”
“관심을 받는 건 상관없지만, 지금 공개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유는?”
“상대가 경계하고 대비하는 걸 원치 않으니까요.”
“호오.”
빈센트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저 앙큼한 놈이 무슨 꿍꿍이를 지니고 있는지 호기심이 들었다.
“부담스러우니까 그렇게 바라보지 마시죠. 그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에단이 빈센트와 첸을 번갈아 바라봤다. 빈센트의 표정이 굳었다.
“……페온이라는 자 말이더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빈센트가 한숨을 내쉬더니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이름은 알고 있으나 너무 오래된 선조이고, 그때의 자료는 유실된 지 오래니.”
“유실됐다고요?”
“그래. 사라졌다. 마치 누가 고의적으로 없앤 것처럼.”
쉽게 믿기지가 않았다. 누가 블란테의 자료를 훼손한단 말인가.
“……솔직히 쉽게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그 자리에 첸이 없었다면 믿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 묻지. 진즉 말하지 않은 이유가 뭐지?”
“믿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가뜩이나 미친놈 취급을 당하던 그때, 그런 소리를 해 봤자 믿어 줄 사람도 없을 것 같았고요.”
빈센트가 말없이 에단을 노려봤다. 에단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격투술도 그자에게 배웠나?”
“그렇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솔직히 독학으로 일구기는 힘든 수준 아닙니까?”
“건방지기는.”
에단의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빈센트의 이마에 줄이 그어졌다.
“그래,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지? 듣자 하니…… 예삿일은 아닌 것 같은데.”
“슬슬 입지를 넓혀야겠다고 생각한 것뿐입니다. 아버지가 보시기에도 자격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직 은퇴하려면 멀었으니까 설레발치지 말거라.”
“그 말의 뜻은 알아서 해석하겠습니다.”
“말 돌리지 말고 질문에나 답하거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제국에 한 번 더 가 보려고 합니다.”
“제국에?”
“생각해 보니 괘씸해서요. 그때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가서 별거 못 했지만, 지금은 좀 제대로 엿을 먹일 수 있을 것 같네요.”
“엿을 먹인다고?”
빈센트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상대가 제국이더라도 블란테를 건들면 대가를 치르게 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큭큭큭, 인정하기는 싫지만 맞는 말이군. 설사 제국의 황제라도 블란테를 우습게 볼 수는 없지.”
“동감입니다. 이번에 확실히 보여 주려고요. 우리가 누구인지를.”
에단이 눈을 빛냈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발언이었다.
에단의 나이는 아직 어렸고, 정식으로 공표된 블란테의 계승자도 아니었다.
‘따끔하게 혼내 주고 싶지만.’
에단의 입지는 확고했다.
다른 형제들이 비루하게 보일 정도로 많은 것을 일궈 냈다. 실력으로 보나 성과로 보나, 에단은 압도적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철없던 망나니 놈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달라졌다.
달라진 것으로도 모자라서 자신과 당당하게 협상하고 있었다. 빈센트가 물끄러미 바라보다 씨익 웃었다.
“마음대로 하거라.”
빈센트의 대답에 첸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볍게 느껴지는 대답이었지만, 저 말은 곧 에단에게 블란테의 이름을 휘둘러도 된다고 공식적으로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당부할 것이 있다. 결코 얕잡혀 보이지 말거라.”
“제가 누굽니까?”
에단의 시건방진 태도에 빈센트가 헛웃음을 지었다. 빈센트가 웃는 것을 보고 씨익 입꼬리를 올린 에단이 입을 열었다.
“그것 외에 한 가지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렉사르.”
렉사르를 언급하자, 빈센트의 표정이 굳었다.
“어디서 주워 온 녀석입니까?”
* * *
아카데미에는 또다시 소란이 일었다. 에단은 올 때마다 큰 화젯거리를 몰고 왔다.
소란이 생기는 것도 당연했다. 이번에 에단이 이끌고 온 자들은 엄청났으니까.
드워프와 엘프, 그리고 마탑의 탑주.
하나하나가 엄청났다.
에르미온은 이전에도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드워프와 엘프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모두 자리로 돌아가세요.”
몰려든 학생들을 에밀라가 통제하기 시작했다. 서릿발 같은 분위기에 학생들은 순순히 에밀라의 말을 따랐다.
‘대체 무슨 일인지…….’
상황을 정리한 에밀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밀라 교수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크러쉬가 에밀라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학생들은 이제 크러쉬의 말은 잘 따르지 않았다.
‘역시…….’
크러쉬가 묘한 눈초리로 에밀라를 바라봤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꺼림칙함을 느낀 에밀라가 크러쉬를 흘겨보며 답했다.
“해야 할 걸 했을 뿐입니다. ……에단 교수님은 어디 계시죠?”
이곳에서도 에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에밀라를 따라온 가토는 휴고와 함께 사라졌다.
“……글쎄요?”
크러쉬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에단의 실체를 알게 된 이후로 함부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에단에게 호의를 느끼지도 않았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혹시 식당이 어디지?”
에밀라가 고개를 돌렸다. 에르미온이 에밀라에게 다가오자, 에밀라는 굳은 표정으로 에르미온을 바라봤다.
“……또 오셨군요.”
“그렇게 됐네. 뭐, 내가 필요하다니 어쩔 수 없지.”
에르미온이 에밀라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씨익 웃었다. 에밀라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식당이라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크러쉬가 빛나는 눈빛으로 에르미온을 바라봤다. 스윽 고개를 돌린 에르미온이 가늘게 뜬 눈으로 크러쉬를 바라봤다.
“흐음, 좋아.”
에르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러쉬는 감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크러쉬의 인도를 받으며 따라가던 에르미온이 고개를 돌려 에밀라를 바라봤다.
“그쪽도 같이 밥이나 먹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