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대비 (1)
고된 여정 뒤에 달콤한 휴식이 주어졌다.
헨리는 늘 가던 주점으로 향했고, 에르미온과 데아티르는 소량의 드래곤 부산물을 연구하기 위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편하게 쉬도록.”
첸과 기사들도 휴식이 필요했는지 주점이 딸려 있는 여관으로 향했다.
휴고는 잠시 멀뚱거리다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휴식은 드워프 마을에서도 취한 탓에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엄청난 회복력 때문인지, 오히려 몸이 찌뿌둥할 지경이었다.
“……몸이라도 풀까.”
* * *
휴고가 저택 주변에 있는 공터에서 가볍게 몸을 놀리고 있었다.
몇몇의 사람들이 힐긋거리며 휴고를 바라보았는데, 그들이 보기에는 묘기나 다름없는 움직임이었다.
탓! 홱! 촤르륵!
공중에 뛰어오른 휴고가 몸을 비틀더니 그대로 빙그르 돌았다. 몸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 휴고는 더 이상 비견할 상대가 없었다.
“후우.”
휴고가 숨을 가다듬었다.
관절이 데워지고 근육이 슬슬 풀리고 있었으며, 머릿속으로는 전투를 상기했다.
‘난 다른 사람들과 달라.’
과거의 휴고였다면 그 사실을 강하게 부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휴고는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나뿐이 아니야.’
같은 수인인 타미, 정체를 알 수 없는 헨리와 렉사르.
드워프들도 많이 만나 왔다. 휴고는 더 이상 소외감을 느끼고 좌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괴물 같은 건 바로…….’
휴고의 머릿속에 에단의 얼굴이 떠올랐다. 에단의 여정을 들어 보면, 진짜 괴물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성장해도 에단과의 거리는 더욱더 벌어졌다. 과연 따라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
가토는 이 시간에도 검을 휘두르며 정진하고 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가토에게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다.
‘나의 가장 큰 장점은.’
휴고가 방향을 전환하며 지그재그로 내달렸다.
지면을 박차며 중심이 이동한다. 탄력적인 근육과 체중의 분배가 몸에 걸리는 부하를 덜어 준다.
정면에서 휴고를 본다면 그의 움직임을 쉽게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잔 동작이 많아.”
쇠를 긁는 것 같은 거친 음성이 휴고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휴고의 몸이 멈칫거렸다.
“……렉사르 씨?”
렉사르가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휴고에게 다가왔다.
휴고를 바라보는 렉사르의 눈에는 더 이상 적의가 보이지 않았다.
“……네 신체 능력은 평범한 범주를 넘어섰어. 활용하는 건 좋지만 동작이 크다. 좋은 예시가 근처에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
휴고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렉사르가 지칭하는 인물은 에단이었다.
“그건 따라 하려고 해도 따라 할 수 없어요…….”
“전부 카피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자세를 잡아라.”
렉사르가 로브 안에서 사슬 추를 꺼냈다. 그가 평소에 즐겨 쓰는 사슬낫보다는 살상력이 떨어지는 무기였다.
“너는 이미 나보다 강하거나, 나와 비등하다. 하지만 장담할 수 있어. 목숨을 걸고 전투하면 넌 나한테 죽는다.”
노랗게 물든 렉사르의 눈이 번들거렸다. 휴고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살아남는 게 강한 거고, 강한 자가 이기는 거다. 지도라는 거창한 말은 좋아하지 않으니…… 잠시 상대를 해 준다고 생각하거라.”
“감사합니다!”
휴고가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렉사르의 입가가 비틀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렉사르가 입을 열었다.
“피해 봐라.”
촤륵.
쇠사슬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마치 자아가 있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휴고의 동공이 사슬을 주시하고 있었다.
예민해진 감각은, 언제라도 몸이 사슬의 움직임에 반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촤악!
렉사르가 휘두른 사슬은 휴고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휴고가 순식간에 자리에서 벗어났다.
렉사르는 덤덤하게 휴고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봐도 놀라운 반사 신경과 움직임이었다.
렉사르가 품에서 단검을 몇 자루 꺼냈다. 손잡이가 따로 없는 투척용 단검이었다.
파바밧!
여러 개의 단검이 휴고를 향해 비산했다. 위협적이기는 했으나 반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휴고가 손으로 지면을 짚으며 방향을 틀었다. 눈이 빠르게 굴러간다. 퇴로가 막혔다.
남은 활로는.
휴고의 동공이 가늘어졌다. 렉사르와 휴고의 눈이 마주쳤다.
“와 봐라.”
탓!
휴고가 렉사르를 향해 질주했다. 사슬의 속도는 휴고를 쫓을 수 없었다. 렉사르가 손을 놓았다.
아니, 놓은 줄 알았다.
콰아앙!
사슬 추가 지면을 꿰뚫고 나타났다.
휴고가 눈을 부릅떴다.
그 짧은 찰나에도 반응해 위로 뛰어올랐지만, 렉사르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렉사르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 차례대로 던졌다. 시간차를 노린 공격이라 휴고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렉사르는 놓았던 사슬 추를 다시 붙잡았다. 마나 운용과 무기 조작 능력의 조화였다.
휴고의 눈이 빠르게 굴러갔지만, 이번에는 정말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휴고의 송곳니가 길어졌고, 손이 커지며 짐승의 손톱이 돋아났다.
크르르.
야성이 흘러나왔다.
쾅!
휴고를 노리던 단검이 손짓 한 번에 산산조각이 났다. 렉사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렉사르의 손에는 어느새 톱날 검이 들려 있었다.
톱날 검에 마나가 깃들었다.
렉사르의 어깨가 들썩이며 날카로운 검날이 휴고에게 휘몰아쳤다. 투박했지만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었다.
공세를 버티지 못한 휴고가 거리를 벌린 순간, 바닥에 있던 사슬이 휴고의 발목을 휘감았다.
“……졌습니다.”
발목을 칭칭 감고 있는 사슬을 보던 휴고가 난색을 표했다.
렉사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기들을 품 안에 집어넣었다. 휴고는 멀뚱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저 로브 안에 대체 얼마나 들어가는 거야?’
봐도 봐도 신기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무기가 수납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휴고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렉사르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곤 입을 열었다.
“소감을 말해 봐라.”
“음…… 제가 너무 안일했던 것 같습니다.”
휴고의 대답에 렉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일했다. 너는 신체 능력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어. 나도…… 그런 성향이 없지는 않지만, 너는 정도가 심하다.”
휴고는 본능적인 감각으로 움직인다. 매번 안전한 선택 대신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택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변칙적이지가 않아. 한마디로 읽기가 쉽다는 거다.”
휴고는 솔직하다.
본능적인 움직임인 만큼 빠르고 직관적이지만, 노련한 상대에게는 그만큼 손쉬운 먹잇감이 없었다.
뛰어난 검술에는 각각 초식과 검로가 있었다. 각각 지향하는 바는 달랐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였다.
상대를 쓰러트리는 것.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정직해서만은 안 된다. 상대를 현혹하고 속여야만, 목에 칼이 닿는다.
교활함.
비겁하다고 매도할 수도 있지만, 죽은 자의 매도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네가 모시는 도련님에게는 빠른 판단과 실행력이 있다. 단순한 행동이 아닌 판을 읽고 주도하는 능력이지.”
“…….”
휴고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말이었다.
“한 번에 이해하라고 한 소리는 아니다. 말을 단순하게 한다면…… 교활해지라는 소리니까.”
“……교활이요?”
“그래. 상대를 속이고 현혹해라. 네가 어디로 튈지 모르게 하고, 공격을 유도해.”
방심만큼 좋은 먹잇감은 없었다. 렉사르는 휴고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명심해. 정직함을 인정해 주는 이는 없어. 결국 남는 것은 승자와 패자로 갈린 결과뿐이니까.”
경고하듯 읊조리는 렉사르를 바라보며 휴고가 눈을 끔뻑였다.
* * *
메이와 한니발에게 통보하듯 말을 전한 에단은 곧장 칼베리안을 만나러 갔다.
이제 칼베리안은 저택에 딸린 객실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쾅!
에단이 노크도 없이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찻잔을 기울이고 있던 칼베리안은 이제 놀라지도 않는지 힐긋 바라보고 말았다.
“소식을 들었다. 드래곤을 무사히 처치했다지? 대단하…….”
“되도 않는 허세 부리지 말고, 가자.”
“말본새하고는……. 그런데 어디를 말하는 거지?”
“제국.”
“……뭐?”
칼베리안이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에단을 바라봤다.
“슬슬 너도 제대로 입지를 드러내야 할 거 아니야.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 지낼 생각인데?”
“……그건 그렇지만 너무 갑작스럽지 않은가. 무슨 계획이라도 있어야…….”
“계획은 있지.”
칼베리안의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뤄 볼 때, 에단의 계획은 정상의 범주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계획이 뭐지?”
“선전포고.”
“…….”
칼베리안이 눈을 질끈 감더니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안 될 게 뭐가 있어. 지금이 적기인데.”
순식간에 녹초가 된 칼베리안은 체념하듯 의자에 늘어지듯 앉았다.
“그래, 납득은 되지 않지만 어디 한번 이야기나 들어 보지.”
에단은 드래곤 토벌 때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칼베리안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이 녀석은 뭐 하는 놈이야?’
보면 볼수록 상식이 부정당하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형인 1황자도 괴물 같다고 생각했지만, 에단은 거기에서 한술 더 뜨고 있었다.
“걔들이 뭘 준비하고 있는지를 몰라. 너도 뭐…… 모르는 건 매한가지일 테고.”
묘하게 무시하듯 말하는 에단의 태도에 칼베리안의 볼이 꿈틀거렸다.
‘제기랄……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칼베리안은 황자란 타이틀만 있을 뿐, 속은 비어 있는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눈과 귀가 없으니, 아는 바가 없는 것도 당연했다.
칼베리안의 가슴에 비수를 박아 넣은 에단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대부분의 계획은 나 때문에 어그러졌겠지만, 그걸로는 안심할 수 없어. 이대로 있다가 뒤통수 맞는 건 질색이거든.”
에단의 분위기가 사나웠다. 칼베리안은 입을 다문 채 에단의 말을 듣고 있었다.
“선전포고라고 말했지만, 진짜 전쟁을 선포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이번 기회에 네가 앞에 나서는 건 나쁘지 않지.”
“……내가 형 앞에 나서라고?”
칼베리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1황자는 칼베리안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칼베리안의 동공이 흔들리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쫄 거 없어. 다시 말하지만 네 뒷배는 블란테야.”
“……안 쫄았어.”
“지랄, 꼴에 허세는.”
“…….”
칼베리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에단을 노려봤다. 에단은 콧방귀를 뀌며 마저 말했다.
“조만간 벌어지는 연회를 기대해도 좋아. 자그마치 2황자의 공식 데뷔전이니 축포도 거창하게 터트려야겠지?”
에단의 음흉한 미소에 칼베리안이 짐짓 몸을 떨었다.
‘……대체 이번엔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하는 거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