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화] 수습 (1)
헨리가 회복되고 사체의 수습이 시작되었다. 시체를 수습하기에 앞서 에단이 먼저 드래곤 사체에 다가가 손을 얹었다.
‘과연 될지는 모르겠지만.’
될 것 같았다. 세계수와도 대등한 힘을 지니고 있던 죽은 나무였다. 드래곤의 사체라고 힘을 흡수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이제 더 이상 마나는 필요 없어.’
에단이 지닌 마나는 이미 무한대에 가까웠다. 가진 마나도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데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었다.
‘필요한 것은 드래곤의 특성과 성질.’
개중 에단이 가장 원하는 것은 ‘피어’.
생명체의 정점에 올랐다는 드래곤의 피어는 그 의미가 남달랐다.
‘유용하게 쓸 수 있겠지.’
에단은 눈을 감았다.
속에서 죽은 나무의 기운이 꿈틀댄다. 죽은 나무는 더 이상 을씨년스러운 귀곡성을 내지르지는 않았다.
‘필요한 것은 통제.’
에단은 죽은 나무의 힘을 완전히 통제했다.
스스스.
기운이 꿈틀거리며 드래곤을 잠식해 나간다. 눈을 감았음에도 드래곤의 형체와 함께 막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세계수와 비견될 정도는 아니지만, 엄청나긴 하군.’
사체에서 막대한 마나가 느껴졌다.
죽은 마나를 추출하게 된다면 엄청난 양을 추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에단은 마나의 추출을 자제했다. 이제 더 이상 마나의 욕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의식의 깊은 곳으로 빠져들었다. 시간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무의식 안에는 드래곤과 에단뿐이었다.
― 욕심도 많구나.
그때 에단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단이 고개를 들었다.
“뭐야, 죽은 거 아니었어?”
에단의 앞에는 드래곤이 팔장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보면 모르겠느냐. 네 말대로 나는 죽었다.
“드래곤쯤 되면 죽어서도 대화가 가능한가 보지?”
― 그럴 리가. 일시적인 상황에 불과하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드래곤의 육체가 가진 힘 때문이겠지.
“유세 떨려고 나온 거야?”
― 시체까지 처먹으려는 주제에 염치도 없군.
드래곤이 미간을 좁히며 에단을 응시했다.
― 큰 욕심에는 화가 따른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그 수준은 넘어섰구나.
“내가 원래 욕심이 좀 많아.”
에단이 피식 웃었다.
욕심과 자존심이 자신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결국 선택은 너의 몫이겠지. 이미 인간이라고 부를 수준은 넘어선 것 같으니.
“그래서 본론이 뭔데.”
― 안 그래도 지금 말하려고 했다. 묘한 녀석을 데리고 다니더구나. 인간의 욕심이 빚은 인위적인 존재.
에단이 눈살을 찌푸렸다. 드래곤은 지금 페온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렉사르를 말하는 건가?”
― 이름을 말한들 나는 알지 못해. 어쨌든 그자가 어떤 존재인지 명확히 알고 있나?
“몰라. 알고 있는 거라고는 수인과 관계가 있다. 그 정도뿐이지.”
― 녀석은 어딘가 비틀려 있다. 수인과 인간, 그 사이에 있지.
“반인반수라면 데리고 있는 애가 있는데.”
― 그것과는 달라. 너도 알고 있을 텐데.
“…….”
― 인세에는 관심을 끊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않지만, 한 가지 짚이는 구석은 있군.
에단은 머릿속에 가정하고 있던 것을 하나 언급했다.
“신성 왕국 놈들을 말하는 건가?”
― 그래. 신의 뜻을 이행한다고 말하는 오만한 녀석들이지. 정작 신의 존재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녀석들이 말이야.
드래곤이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신성 왕국이 수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박멸 때문일 텐데?”
― 그걸 알아보는 건 너의 몫이다.
“결국 별 도움도 안 되네.”
― 건방진 놈. 하지만…… 고맙다는 말은 전하고 싶군.
“너 정도 되는 녀석이 누구한테 당한 거지?”
에단의 물음에 드래곤은 고개를 저었다.
― 누군가에게 당한 것은 아니다. 그건…… 더 높은 존재의 변덕이겠지. 안타깝지만 이제 남은 시간은 없군. 원하는 것은 피어겠지?
“그것밖에 안 되나?”
― 더 욕심을 부려봤자 남는 건 없다. 드래곤은 강한 종이기는 하지만, 그 힘의 원천은 결국 드래곤 하트일 뿐이니.
“보니까 비늘도 단단하고 날기도 하던데.”
― 포기할 건 포기해라.
“쯧.”
― ……아무튼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려고 왔다. 너 정도의 존재라면 피어도 어렵지 않게 소화할 수 있겠지.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순탄하지는 않을 것 같군.
“바라던 바야.”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손쉬운 여정은 원하지 않았다.
― 그래, 응원하마. 너라면 뭔가가 달라질 수도 있겠군.
“이제 와서 묻기는 그런데 몸뚱이 좀 써도 돼? 쓸데가 좀 있어서.”
질문을 들은 드래곤이 피식 웃었다.
― 마음대로 하거라. 나에게 그 육체는 더 이상 의미가 없으니.
“그거 고맙군.”
드래곤의 모습이 흐릿해진 걸 확인한 에단이 감은 눈을 떠 심상에서 빠져나왔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지끈거렸다. 하지만 에단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게 피어인가.’
뭐라 설명하거나 형용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확실히 블랙 오우거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피어였다.
“후우.”
에단이 깊게 들이마신 숨을 내뱉었다. 이제 다시 해체를 시작할 때였다.
“자, 다들 작업하자.”
* * *
드래곤의 해체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먼저 드워프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깡!
“……비늘이 말도 안 되게 단단해. 이게 말이 되나?”
드워프는 경탄 어린 시선으로 사체를 바라봤다. 다루지 못하는 금속이 없다고 알려진 드워프들조차 난색을 표할 경도였다.
갖은 방법을 동원하며 작업을 이어 나가고 있었지만, 진전 속도는 매우 더뎠다.
“쯧, 글렀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단이 혀를 찼다. 이대로는 빠른 복귀는커녕 여기서 한세월을 보낼 것 같았다.
에단이 마을로 돌아가 인원들을 모두 모집했다.
“자, 여기서 다들 빨리 나가고 싶지? 그럼 가만히 보고만 있지 말고 일손 좀 돕자. 불만 있는 사람은 사체에서 손 떼.”
“…….”
결국 이들은 군말 없이 사체 해체 작업에 동원됐다.
엘프들이야 드워프와 협력해야 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불만이 없었기에 열과 성을 다해 도왔다.
에르미온과 데아티르도 드래곤의 사체라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 걸려 있으니 돕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경들도 빨리 돌아가려면 도와야겠죠? 여기 답답하지 않습니까?”
지하 굴은 숨이 턱턱 막히는 장소였다. 아무리 극한까지 단련된 블란테의 기사라도 있기 편할 리가 없었다.
“…….”
기사들이 검을 꺼내 들었다. 오러가 둘러진 검도 사체의 뼈와 살을 쉽게 분리하지는 못했다.
“……비켜라.”
지켜보던 첸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서걱.
지켜보는 이들의 눈이 커졌다. 갖은 노력을 해도 쉽지 않던 비늘이 손쉽게 잘려 나간 것이다.
첸이 나서자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에르미온과 데아티르가 마법적인 처리를 하고, 헨리가 지반의 유지와 옮기는 것을 도맡았다.
엘프들도 정령들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고, 드워프들은 전반적인 작업을 총괄했다.
뛰어난 기술과 전문성이 더해지자, 드래곤이 목적에 맞게끔 순식간에 분해되었다.
한편 팔짱을 낀 채 작업을 관망하던 에단은 헛웃음을 지었다.
‘살다 살다 드래곤이 도축되는 모습을 다 지켜보는군.’
마치 현대에서의 공사 현장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에단의 시선에 렉사르가 걸렸다. 렉사르는 입을 다문 채 드래곤을 해체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하고 있냐?”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일 안 해?”
“제가 가 봤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군요.”
렉사르의 말은 사실이었다. 렉사르가 다루는 무기들의 특성상 저런 작업에는 걸맞지 않았다.
에단이 눈살을 찌푸리며 렉사르를 응시했다.
“또 왜 꿍해 있냐?”
“……그런 적 없습니다.”
“지랄, 내 눈을 속이려고 드는 거야? 얼굴에 다 써져 있고만.”
“…….”
에단의 말을 들은 렉사르가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 행위를 지켜보던 에단이 헛웃음을 쳤다.
“너 지금 개그하는 거지?”
“정말 쓰여 있나 궁금해서…….”
“말이 그렇다고. 그래서 꿍해 있는 이유가 뭔데. 전에는 개망나니처럼 덤비던 놈이.”
“도련님만 하겠습니까?”
“야이, 씨…….”
에단이 이를 악물며 욕지거리를 억눌렀다. 그 모습을 힐긋 바라보던 렉사르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넌 그냥 웃지 마라. 웃는 거 더럽게 이상하니까.”
“…….”
렉사르가 표정을 찌푸렸다. 고개를 돌려 다시금 작업을 바라보던 렉사르가 중얼거렸다.
“제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계십니까?”
“갑자기 무게 잡기 있냐?”
“저는 과거의 기억이 없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적대감이나 살의 따위의 감정이죠. 제 첫 기억은 누군가를 죽인 기억입니다. 도련님께서 말씀하셨죠. 저라는 존재가 누구인지 알려 준다고.”
렉사르의 금빛 동공이 에단을 향했다. 에단은 렉사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듣지 않겠습니다. 블란테의 사냥개, 추적하는 사자…… 웃기지도 않는군요. 저는 이번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품은 기대가 무색하게도.”
꽈악.
렉사르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자존심이 강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렉사르의 자존심은 완전히 부서졌다.
“알긴 아네.”
에단이 무심하게 내뱉었다. 렉사르가 찌릿하고 노려봤지만, 에단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별 도움이 안 되는 건 너뿐이 아니야. 저기서 잡일하고 있는 휴고는 안 보이냐? 쟤도 별반 도움 안 됐어.”
“……저런 하룻강아지랑 저와 비교하는 겁니까?”
“또 꼴에 가오 잡네. 하룻강아지도 제압 못 하는 주제에 뭐라는 거야.”
“…….”
“나는 거짓말은 안 해. 너에 대해 별 관심은 없지만, 내뱉은 말은 지킬 거야.”
렉사르의 과거.
짚이는 구석은 있었고, 드래곤의 말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신중을 기해야 했다.
‘결국 녀석이 원하는 것은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니까.’
렉사르는 에단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군.’
에단을 같잖게 여기던 렉사르였지만, 에단은 이미 본인의 힘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위치를 각인시켰다.
이제 에단은 확실히 렉사르보다 서열이 높았고, 에단이 내뱉은 말에는 확실한 신뢰가 느껴졌다.
‘……차기 가주는 확정인가.’
그는 에단의 다른 형제들도 알고 있었다. 비록 렉사르는 가문 내에서 많은 발언을 내뱉지는 않았으나 영향력만큼은 확고했다.
렉사르는 가주의 자리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됐든지 가주에 위치에 오르려면 자신을 완전히 제압하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모룬과 카론은 에단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만 농땡이 피우고 이제 일해. 잡일이라도 하라고.”
에단이 렉사르의 엉덩이를 발로 밀었다. 그에 렉사르가 노려봤지만, 에단이 쌍심지를 치켜세우자 군말 없이 작업에 합류했다.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고, 어느 정도 끝이 보였다.
“……이건.”
한창 작업을 진행 중이던 누군가가 탄사를 내뱉었다.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드래곤 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