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화] 어이가 없네 (1)
에단이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섬뜩한 모습에 몇몇이 침을 삼켰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르미온이 물었다.
“……갑자기 물어서 미안한데. 그게 말이 되는 얘기야? 2대 가주라고? 그럼 대체 몇 년이 흘렀는데…….”
“눈치 못 챘어? 저번에 비슷한 거 봤잖아.”
“대체 무슨 소리를…… 설마……?”
에르미온의 동공이 커졌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가 떠올랐다. 에르미온이 그 생각을 부정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있을 수 없어. 망령 따위가 그 정도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너도 봤으니까 알 거 아니야. 영향력은 한정돼 있어.”
“평범한 경우라면 그렇겠지.”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에단이 손을 들었다. 에단이 마나를 끌어올리자 손에서 회색 마나가 흘러나왔다.
“…….”
“이게 어떤 것 같지?”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수준급 경지에 오른 자들이었다.
에단이 다루는 마나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게 단순한 마나로 보이나?”
“전부터 궁금했어. 그건 대체 뭐지? 내가 알고 있던 마나랑은 너무…….”
에르미온이 말끝을 흐렸다. 규칙을 비틀고 마나를 재구성하는 마법사인 그녀에게조차 낯선 마나였다.
마나의 정체에 대해 이전부터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을 묻는 행위 자체가 예민한 사항이었기에, 그녀는 궁금증을 억누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에단이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죽은 나무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 순간, 에단의 손 위에 있던 마나의 성질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 것보다 훨씬 음험하고 꺼림직한 기운이었다.
“……죽은 마나.”
데아티르가 에단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을 보고 말했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건 죽은 마나다.”
에단이 순순히 인정하자, 에르미온이 충격받은 얼굴로 에단을 응시했다.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죽은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거지?”
“지금부터 설명해 줄 테니까 기다려.”
에단은 페온과의 조우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있는 그대로를 설명한 것은 아니었다.
원작의 비밀을 밝히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가감을 해 가며 이야기했다.
“……죽은 나무라고?”
에르미온과 데아티르는 죽은 나무에 관해 들은 게 있었는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래. 페온의 말로는 죽은 나무의 힘으로 인해 존재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
“……그건 이상한데.”
“어. 이제 와서이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해.”
페온의 말에는 분명히 거짓이 섞여 있었다. 그것도 에단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교묘한 거짓이었다.
“그럼 도련님의 격투술도…….”
첸의 질문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페온의 지도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제가 격투술에 재능이 있다고는 하나, 독학으로는 한계가 분명하죠.”
첸은 그제야 납득이 됐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분은 설명하기 까다로우니까 대충 넘어가자고.’
사실 페온에게 전수받은 격투술은 조금도 없었지만, 그렇게 얼버무리지 않으면 일이 귀찮아질 것 같았다.
“……한데 이상하군요.”
생각에 잠겨 있던 첸이 입을 열었다. 에단이 마른침을 삼키며 첸에게 물었다.
“어떤 점이 말이죠?”
“……2대 가주님에 관해서입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분도 분명히 검을 다룬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
‘이것도 거짓말이었어?’
이제는 웃음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단순한 변심이 생겼을 수도 있죠.”
“그건 제가 가문으로 복귀한 이후,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첸의 말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르미온이 입을 열었다.
“가정사 얘기 중일 때 미안한데, 아직 듣지 못한 게 있거든? 여기 이 엘프들, 그리고 저 여자. 이것도 뭐가 있지?”
에르미온의 질문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세계수의 목걸이었다.
“……그건.”
“세계수의 목걸이. 가문의 무기고에서 얻은 것 중 하나지.”
에단이 말을 이어 나갈 때, 순간 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하나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또 다른 게 있다는…….”
‘아차.’
에단이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가문의 무기고에서 공식적으로 가져온 것은 하나였다.
‘이건 못 숨기겠네.’
작은 한숨을 내쉰 에단이 왼손을 들었다.
“잠시 검 좀 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
기사에게 검을 빌려달라는 것은 대단한 무례였지만, 첸은 별말 없이 검을 뽑아 에단에게 건넸다.
‘직접 보여 주는 게 빠르겠지.’
백번의 설명보다 한 번 보는 게 이해가 빠를 것이다.
에단이 마나를 끌어올리자 검에 마나가 감돌았다.
완벽한 오러 소드라고는 볼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이 정도만 하더라도 인간의 연약한 살을 자르기엔 충분하다.
에단이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치켜든 검을 왼손이 있는 곳을 향해 강하게 내려쳤다.
그것을 지켜보던 몇몇이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 행위 자체가 자신의 손을 절단하는 행동이었으니까.
깡!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강한 반발력과 함께 검이 튕겨 나갔다. 칼자루를 쥔 손이 저릿했다.
몇몇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고, 누군가는 말없이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왼손을 들었다.
전력을 다한 오러 소드로 내려쳤음에도 작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누구는 봤을 거고, 누구는 낯설겠지. 이게 내가 가문의 무기고에서 얻은 또 다른 무기야.”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아.”
에단의 왼손을 유심히 응시하던 에르미온이 물었다.
“그건 나도 설명 못 하겠고, 이걸 얻게 된 것도 페온의 말 때문이야. 마치 이게 있다는 걸 아는 눈치더라고.”
에단의 말에 첸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이건 가주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페온이 말로는 ‘타이탄의 장갑’이라고 하더군.”
“타이탄?”
에르미온과 데아티르는 이번에도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지 서로를 마주 봤다.
“……그 말이 사실이야?”
“정확한 건 나도 몰라. 이것도 어디까지나 페온에게 전해 들은 얘기라서 말이야.”
“하, 진짜 별게 다 언급되는군.”
“짚이는 거라도 있나?”
“이건 드래곤 따위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허무맹랑한 소리야. 타이탄은…… 고대 신화에 가까운 얘기라고. 데아티르 너는 뭐 아는 게 있나?”
“……나도 없어. 종종 타이탄이 언급된 문헌들을 봤을 뿐이라서.”
에르미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 타이탄은 그만큼 정보도 없고, 신화나 전설에 가까운 것들이야.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우리가 모른다면…… 아는 이들은 극히 드물 거야.”
에르미온의 말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도 이곳에서 추가적인 정보를 습득할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이게 정말 타이탄과 연관된 것인지, 아니면 페온이 거짓말로 나를 우롱한 것인지는 알지 못해.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손에 깃든 힘은…… 간단한 게 아니란 거야.”
그야말로 무적의 방패.
그게 에단의 손에 깃들어 있었다.
능히 베지 못할 게 없다고 알려진 오러 소드도 에단의 왼손에는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에르미온이 무거운 표정으로 에단의 손을 바라봤다.
“……마탑으로 돌아가면 다시 한번 조사해 볼게. 그건 그렇고…… 아직 듣지 못한 얘기가 남아 있는데? 네가 들어간 검은 돔과 바닥에서 나타난 검은 손. 대체 정체가 뭐야?”
질문을 하는 에르미온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옅지만 공포가 서려 있었다.
“……난 한 번도 그런 기운을 겪어 본 적이 없어. 대체 그것의 정체가 뭐야?”
“…….”
에단이 입을 다물었다.
룬어에 대한 설명. 이것에 대해서는 에단도 어떠한 해답을 내려 줄 수가 없었다.
‘룬어가 달라진 이유는 나도 모른다.’
에단이 알고 있던 것은 룬어의 위치와 단어뿐. 위치는 그대로였다.
하나는 아카데미의 서고에서, 남은 하나는 드래곤에게서.
하지만 룬어의 의미와 발현되는 능력이 완전히 달라졌다.
본래 주인공이 사용하던 룬어의 단어는 희망, 그리고 용기.
하지만 에단이 얻은 룬어는 완전히 상반되는 단어였다. 절망, 그리고 좌절.
꺼림칙한 단어.
발현되는 능력조차 심상치 않았다.
타인을 가두는 검은 돔, 그리고 감각을 차단하는 암흑.
‘또 다른 룬어의 능력은 확인해 보지 못했지만.’
단어를 보고 유추하건대, 이것도 남들한테 자랑할 만한 능력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쓴 능력에 관해서는 말해 주기 힘들어.”
“그게 무슨…….”
“하지만 페온이 사라질 때에 관해서라면 짚이는 게 하나 있어.”
검게 물든 바닥, 그리고 바닥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검은 손. 거기에서 연상되는 것은 하나였다.
“지하.”
에단의 말에 에르미온이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예상은 했으나 결코 듣고 싶지 않던 말이었다.
“……마인족들이 관계되어 있단 소리인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미 비슷한 녀석을 한 번 봤던 적이 있거든.”
에단이 이전에 만났던 리치 베오드라도의 대해 설명했다. 에르미온이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염병, 점점 스케일이 커지고 있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건 없어.”
“지금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지금 언급된 것만 봐도 타이탄이랑 마인족인데.”
에르미온이 에단을 날카롭게 째려봤다. 에단이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에단은 헨리와 엘프들, 그리고 세계수에 관한 일들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에르미온과 데아티르는 이제 놀랄 기운도 없었는지 관자놀이를 누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가 지금 정신 나간 사람의 헛소리를 듣고 있는 건 아니지?”
“그때 용사님은 저희들의 구원자였습니다.”
지금껏 말없이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르니엘이 갑작스레 입을 열자,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에단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용사라고 하지 말랬지.”
“아차, 실수입니다.”
르니엘이 싱긋 웃으며 답하자, 에단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이런 마나를 다루게 됐고, 흔히 말하는 마스터의 벽도 넘게 된 거지.”
에단의 손에서 회색빛이 감도는 마나가 흘러나왔다.
“……이건 미쳤어.”
에르미온이 머리를 싸잡고 있는 사이, 에단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나를 관심 있게 지켜보던 데아티르가 입을 열었다.
“혹시 진지하게 연구해 볼 수 있나?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이군……. 이론상으로도 불가능한 일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어, 안 돼.”
에단은 당연히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데아티르는 한껏 풀 죽은 기색이 되었다.
“……도련님이 그 짧은 시간에 그 정도의 경지에 도달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군요.”
“맞습니다.”
유심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첸이 말했고,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에단을 바라보던 첸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상황은 아닙니다. 아시고 계십니까?”
그걸 모를 리가 있을까.
첸의 말에 에단이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