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화] 페온 (1)
“흠, 모르는 게 사실인가 보군.”
“아, 진짜 짜증나게 하네.”
에단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시간이 없다고 말해 놓고선 아까부터 말장난을 하는 것처럼 말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이거 타이탄의 장갑이니 뭐니 하는 거 아니야? 모르고 있으니까 너한테 묻는 거잖아. 시간도 없는데 빨리 말하기나 해.”
에단이 으르렁거렸다.
그 태도를 지켜보던 드래곤의 눈이 가늘어졌다.
“신세가 처량해졌군.”
“한탄을 들어줄 생각은 없어.”
“그자는 인간이 아니다.”
“…….”
드래곤의 말에 에단이 입을 다물었다.
인간이 아니라는 말.
페온의 현 상태에 대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제대로 설명해.”
“말을 정확히 할 필요가 있겠군. 그자는 ‘인간’을 버렸다.”
“인간을 버려?”
“네 손에 끼워져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하지?”
에단이 자신의 왼손을 바라봤다.
타이탄의 장갑.
타이탄이라는 이름.
모든 게 아직 베일에 싸여 있었다.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고만 생각했을 뿐,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그 기회를 잡아야만 했다.
에단이 고개를 들었다.
“타이탄, 타이탄과 관계가 있나?”
에단의 물음에 드래곤이 피식 웃었다.
“과도한 욕심의 말로는 정해져 있는 법이다. 그자의 욕심은…….”
드래곤이 말을 이으려고 하는 순간, 강대한 충격이 전해졌다.
쾅!
내부를 뒤흔드는 충격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지?’
이런 일은 지금껏 처음 겪었다.
드래곤은 사태를 파악했는지 미간을 좁혔다.
“그 녀석의 짓이군.”
“……페온이 했다고? 어떻게?”
“네 상식을 부여하지 마. 세상은 상식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쾅!
그 순간 다시 한번 충격이 덮쳤다. 고개를 치켜들자, 검은 돔에 균열이 그어지고 있었다.
“제기랄.”
에단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드래곤은 이런 상황에서도 표정의 변화 하나 없었다.
드래곤이 손을 뻗었다.
“……좌절.”
그녀의 고운 음성이 에단의 뇌리에 꽂혔다. 지금껏 드래곤이 무언가를 할 때 내뱉던 언어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번 단어만큼은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드래곤의 입에서 불길한 단어가 흘러나오자, 금이 가던 검은 돔이 순식간에 수복되기 시작했다.
에단의 얼굴이 굳었다. 드래곤이 다시 에단을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조금 전 말한 대로 이 몸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말을 하면서도 드래곤은 소름 끼치도록 무심했다.
에단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물어봐야 하는 게 아직 한참 남았다.
“지금 나랑 장난해?”
“나를 탓해 봤자 바뀌는 건 없다.”
까드득.
에단이 이를 악물었다.
화가 치밀었지만 그 말이 사실이었다. 지금은 뜨거워진 머리를 식혀야 할 필요가 있었다.
“페온과 타이탄. 무슨 연관이 있지?”
“마음 같아서는 장대하게 설명해 주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시간이 없구나.”
“……같은 소리를 몇 번 듣는지 모르겠군.”
드래곤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드래곤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타이탄은…… 잊힌 종족이다.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종족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타이탄이야말로 ‘신’과 근접한 종족이지.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타이탄은 인간과 가깝다는 소리인가?”
에단의 말에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에는 신이 존재하며 영향력을 끼친다.
사제들은 다친 이들을 치유할 수 있고, 성전사는 신의 가호를 등에 업어 강한 전투력을 보인다.
그런 식으로 신성력이라는 유형화된 힘은,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영향에 불과했다.
진짜 재앙이 세상을 덮쳤을 때, 신의 영향력은 한정적이다.
결국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건 인간.
‘그렇다는 말은…….’
타이탄이야말로 세상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소리다. 마치 드래곤과 같이.
“……오래된 이야기다. 이제 그걸 기억하고 있는 이도 남지 않았겠지.”
“대륙의 패권은 드래곤이 쥐고 있던 것 아니었나?”
“드래곤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우린 타이탄의 상대가 되지 못해.”
순순한 인정.
고고한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드래곤이 내뱉은 말이었다.
“타이탄은 신과 달리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그게 허상에 불과하다는 건 알지 못한 채 말이야.”
드래곤의 말은 누군가를 지칭하고 있었다. 에단의 머릿속에 어떤 인물이 떠올랐다.
쾅!
검은 돔이 흔들린다. 드래곤의 눈살이 가늘어졌다.
“포기를 모르는군. 이 정도 설명이면 충분한 것 같은데, 또 물을 게 남았나?”
드래곤의 눈은 매우 피로해 보였다. 마치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내 귀에 들렸던 건 뭐지?”
“그건…….”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드래곤의 검은 동공이 미세하게 떨렸다.
쾅!
그때 다시금 돔이 흔들렸다. 이 기운은 어딘가 익숙했다.
이전에 페온이 보여 줬던 것과 비슷했다.
‘개입하려고 한다.’
이유는?
‘숨기고 싶은 것이 있어서.’
페온은 모든 것을 시원하게 말해 주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했다.
에단의 눈이 깊어졌다.
에단이 드래곤에게 다가갔다.
드래곤의 동공이 흐려졌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제 그녀의 생은 거의 끝나가고 있다.
정보를 검증하고 유추할 시간은 남아 있지 않았다.
믿을 건 자신의 직감.
“……그 소리는 룬어인가?”
“……이런 쪽에서는 눈치가 빠르네.”
그녀의 답변에 에단이 납득했다. 들린 단어는 에단의 기억과 달랐다.
‘주인공이 드래곤의 사체에서 습득한 룬어는…….’
용기.
주인공에게 어울리는 희망찬 뜻을 내포하고 있는 룬어였다.
그러나 그녀가 내뱉은 룬어는 좌절이었다.
도서관에서와 마찬가지로 역시나 상반된 의미에 룬어.
에단이 끝까지 드래곤을 응시한 채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너의 지금 그 상태. 인간이나, ‘지하’와 연관이 있나?”
에단이 죽은 마나를 뽑아내기 전까지, 그녀에게는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드래곤의 탁한 동공이 에단을 응시했다.
그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아니.”
“그럼 됐어. 고생했다.”
“별말씀을…….”
드래곤이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몸이 허물어졌고, 에단은 허물어지는 몸을 안전하게 받았다. 심장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에단은 그녀의 몸을 천천히 눕혔다.
우웅.
진동이 느껴지며 알 수 없는 단어가 떠올랐다.
알아볼 수 없는 기괴한 단어였지만, 에단은 그 단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좌절.’
본래 주인공이 가졌던 룬어와는 완전히 상반된 의미에 단어.
둥실 떠오른 룬어가 에단의 몸에 스며들었다.
에단이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유지되고 있던 검은 돔이 허물어졌다. 그러자 에단의 앞에 페온이 다가왔다.
“…….”
페온과 에단은 입을 다문 채 서로를 바라봤다.
“어떤 말을 들었지?”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페온이었다. 그 질문을 들은 에단이 피식 웃었다.
“어떻게 싸웠냐가 아니라 어떤 말을 들었느냐라…….”
“…….”
에단의 대답에 페온이 입을 다물었다.
묵묵히 서 있는 페온의 발쪽으로 에단의 시선이 향했다.
페온의 발은 마치 성검의 심상에서 느꼈던 것처럼 선명했다.
‘유추할 수 있는 건 역시 죽은 나무인가.’
이것은 어디까지나 증명되지 않은 가정이다. 하지만 에단은 이제 스스로 추리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페온은 죽은 나무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에단이 죽은 나무를 얻으며 페온도 에단과 함께 움직였다.
이후 에단이 죽은 나무를 흡수하며 점점 죽은 나무의 힘이 강해졌다.
그리고 후에는 세계수의 힘까지 흡수해 더 이상 부작용을 걱정할 필요도 없어졌다.
뚜렷해진 페온의 육체는 망령임에도 분명한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었다.
하지만 페온의 무력은 아직 완벽하지 않았다.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에단이 피식 웃었다.
“페온.”
더 이상 존칭을 쓰지 않았다. 페온이 에단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도대체 뭘 숨기고 있지?”
그와 동시에 에단이 왼손을 들었다.
타이탄의 장갑.
블란테의 무기고에는 고명한 무기가 즐비했다.
그래, 타이탄의 장갑 같은 말도 안 되는 무기가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면.’
주인공이 가져갔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블란테의 무기고에서 세계수의 목걸이 하나만 챙겨갔다.
‘이걸 알아보지 못해서?’
에단은 고개를 저었다. 주인공은 온갖 기연을 독식해 가며 규격 외의 성장세를 보였다.
이 세계의 흐름은 온전히 주인공에게 맞춰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타이탄의 장갑만 놓쳤다?
‘이해가 되지 않아.’
꺼림칙하다.
더 이상 속내를 감춘 채 불편한 동거를 이어 나갈 생각은 없었다.
페온의 검은 눈이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빛은 이전과 달리 스산했다.
“아직 알기는 이르다.”
“뭘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
“무슨 말을 들었냐고 물었지?”
에단이 왼손을 꽈악 움켜쥐었다.
“당신, 인간이 아니지?”
에단의 물음에 페온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 나서는 사납게 일그러졌다.
“감히 도마뱀 새끼 따위가…….”
페온의 노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피부가 저릿한 기분이다. 그 반응에 에단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건 당신이 아닐 텐데?”
“지금 나보다 도마뱀 새끼의 말을 믿는 것이냐?”
“딱히 믿는 건 아니야. 단지 당신을 의심하는 거지.”
페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후우.”
페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행은 페온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페온이 튕겨 나오는 순간부터 지켜봤다.
튕겨 나온 페온이 분노하며 검은 돔을 두드리고 있는 모습까지도.
페온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머릿속에서 계산을 하고 있는 모습이 에단에게 느껴졌다.
그 모습에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왜? 한번 해볼 만하다고 느껴지나?”
“……안타깝게도 아직은 아닌 것 같군.”
페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단은 지금 페온의 힘이 느껴진다. 가늠할 수 없는 기세와 기운이었다.
‘아버지를 보는 것 같군.’
하지만 그 힘은 유한하다.
결국 페온의 힘은 에단에게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와서 꽁무니를 빼려고?”
페온의 눈살이 가늘어졌다. 그때, 에단이 제안했다.
“제안을 하나 하지. 개입되는 인원 없이. 우리 둘만 한번 붙어 보는 거야.”
“허.”
가늘어졌던 페온의 눈이 커졌다.
에단이 고개를 돌리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시선은 페온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전부터 궁금했었거든. 격투? 나도 어디 가서 격투로는 꿀린 적이 없어서 말이야.”
에단이 뚜벅뚜벅 다가갔다.
페온을 노려보고 있는 에단의 안광이 일렁거렸다.
“계급장 떼고, 한판 붙자고.”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