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화] 드래곤 (22)
헨리의 장막이 걷힌다.
이제 일행의 몸을 숨겨 주는 보호막은 사라졌다. 그것을 알아차린 전위들이 뛰쳐나갔다. 몸이 오싹거리는 긴장감이다.
우우웅!
가장 먼저 뛰쳐나간 첸의 검에서 짙은 오러가 흘러나왔다.
렉사르와 휴고가 동시다발적으로 튀어 나갔고, 렉사르는 사슬낫을 집어 던졌다.
휴고와 에단은 드래곤에게 더욱 근접했다. 에단이 앞, 휴고가 뒤를 잡았다.
쩌엉―!
가장 먼저 부딪친 첸의 오러 소드와 드래곤이 부딪치며 굉음이 터져 나왔다.
막강한 충격이 엄습함에도 물러서는 이가 없었다.
꿈틀.
에단의 몸속에 똬리를 튼 마나가 움직였다. 그 크기를 가늠하기 힘든 마나가 움직인다.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마나를 방출시켰다.
에단이 내지른 주먹에서 회색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타이탄의 장갑이 둘린 왼손이 아니었다면 손이 너덜너덜해질 위력이었다.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은 드래곤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보호막이 순식간에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
드래곤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왔다. 깨져 나가던 보호막이 수복되고, 주변에서 검은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일행이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우우웅!
마나의 파동이 격동하며 그와 동시에 후끈한 열기도 느껴졌다. 에르미온의 머리카락이 펄럭였다.
“저게 용언인가?”
에르미온이 사납게 웃으며 팔을 들어 올리자 준비했던 마법진이 빛을 발했다.
데아티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기가 흘러나온다.
화염이 치솟고 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창이 덮친다.
그와 함께 드워프들이 준비한 기계장치도 불을 뿜어내며 무기들이 출수된다.
일행들의 모든 공격이 합쳐져 막강한 화력의 폭격이 쏟아져 내렸다.
드래곤이 사용한 검은 불길이 순식간에 진화됐다.
에단이 감탄 섞인 휘파람을 흘렸다. 예상보다도 화력이 어마어마했다.
드래곤의 미간이 좁혀졌다. 장막이 사라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헨리, 저건 못 없애?”
“저건 좀 힘들 것 같아요!”
헨리가 곧바로 대답했다. 드래곤이 사용하는 마나에는 개입이 되지 않았다.
에단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는 알겠군.’
드래곤에게서 무언가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떨어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친숙한 기운 또한 느껴진다.
드래곤이 사용하는 마법에서 죽은 마나의 냄새가 났다.
그때, 드래곤이 손을 들었다.
쏟아지는 공격을 제거해 나가고 장막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공세는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입이 벌어지는 위력.
저것들이 쏟아진다면 어떠한 요새라도 순식간에 함락당할 것이다.
첸이 검을 뽑은 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섬뜩한 모습이었다.
‘자,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아마 오랜 시간이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간중간 피어오르는 검은 불꽃은 전위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
드래곤의 입에서 다시금 알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갑자기 엄습한 불길함에 에단의 얼굴이 굳었다.
“에단 님!”
“염병할!”
에단과 동일한 감정을 느낀 헨리가 소리쳤다. 그녀가 손을 뻗자 지면이 바닥을 흔들었다.
에단이 달려들자, 화력을 쏟아 내던 이들이 공격을 멈췄다.
“……용사님?”
“저 새끼 지금 뭐 하는 거야?”
“…….”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후위에서 공격하던 이들의 표정이 굳었다.
아직 화력을 쏟아 낼 여유는 충분히 남아 있었다.
“……뭔가 옵니다.”
헨리가 딱딱하게 굳은 안색으로 말했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에단이 마나를 아낌없이 사용하며 검은 불길을 모조리 무시한 채 달려들었다.
꽝!
장막에 왼손이 부딪친다. 먼지구름이 가라앉으며 에단의 눈에 드래곤의 모습이 들어왔다.
검게 돋아난 비늘, 그리고 가늘어진 동공.
완전한 드래곤의 육체가 아닌, 인간의 몸에 나타난 드래곤의 흔적이 강렬하게 빛을 발했다.
모습이 바뀐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녀리고 추악한 것을 달고 다니는구나.”
그 말을 들은 에단의 이마에 주름이 새겨졌다.
― ……건방진 도마뱀 새끼가.
하지만 그 소리에 반응한 것은 에단이 아닌 페온이었다.
“페온!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에단이 소리쳤다. 하지만 페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꽈득!
에단이 이를 갈았다.
지금 페온에게 소리쳐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에단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드래곤을 바라봤다.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시간이 없네.”
“…….”
드래곤은 피로한 눈으로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길 무너뜨릴 생각이지?”
“…….”
드래곤은 대답하지 않았다.
드워프의 마을은 넓고 견고하다. 명장들이라 불리는 드워프들이 자신들의 터전을 소홀하게 만들 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이곳은 땅 밑이다. 드래곤에게 쏟아진 화력을 벽이나 천장에 쏟아부으면 버틸 재간이 없었다.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헨리가 있는 이상 생매장당하는 것은 어찌어찌 면할 수 있을 터.
하지만 문제는…….
이곳이 매몰되며 드래곤이 도망가는 순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금 드래곤이 입을 열려는 순간, 에단이 입을 벌렸다.
“절망.”
에단이 룬어를 외치자, 피로에 찌든 드래곤의 눈이 커졌다.
스스스스스―
에단의 주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꺼림칙하고 소름 끼치는 검은 연기는 순식간에 주위를 에워쌌다.
“뭐, 뭐야?!”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이 당황해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흘러나온 검은 연기는 순식간에 드래곤과 에단을 둘러쌌다.
그리고 그곳에서 페온은 자연스럽게 튕겨 나갔다. 페온의 눈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 * *
“이거 오랜만이군.”
룬어를 발현한 에단이 말했다.
주위를 둘러싼 검은 돔.
그리고 그곳에 갇힌 드래곤과 에단.
‘페온은 느껴지지 않는군.’
역시 이걸 발현하면 페온은 튕겨 나간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드래곤의 형상은 똑똑히 보인다.
가까이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에단이 드래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녀의 눈꺼풀이 꿈틀거린다. 당황한 기색이 자연스레 공유됐다.
“■■■■■”
입을 벌리며 또다시 정체 모를 언어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아무런 현상도 발현되지 않았다. 드래곤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에단은 드래곤을 향해 걸어갔지만, 발걸음 소리는 울려 퍼지지 않았다.
이윽고 에단이 드래곤의 앞에 섰다. 드래곤은 아직 에단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봐.”
에단이 입을 열었다. 드래곤이 흠칫 놀라며 반응했다.
“대체 뭘 알고 있지?”
“…….”
드래곤이 침묵했다. 그리고 움직이려는 기색을 보이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쯧.’
시간이 많지 않았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이것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을 유추할 수 있었다.
유지 가능한 시간은 대략 5분.
에단은 5분 이내에 원하는 답을 듣고, 드래곤을 제압해야 했다.
드래곤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 순간 드래곤이 에단과 눈을 마주쳤다.
‘보여?’
에단이 뛰쳐나갔다.
이곳에서는 모든 감각이 증폭된 상태였다.
뻑!
달려든 에단이 그대로 드래곤의 명치에 킥을 박아 넣었다. 그녀의 몸이 반으로 접힌다.
상체가 젖혀지는 순간, 발을 회수한 에단이 주먹을 날렸다. 주먹이 턱에 꽂히며 그녀의 고개가 들렸다.
드래곤이 뭐라 소리치며 팔을 휘둘렀지만, 형편없는 공격에 맞아 줄 에단이 아니었다.
상체의 움직임만으로 공격을 피해 낸 에단이 그녀를 잡았다.
뻐억! 뻐억!
에단의 무릎이 복부를 두드리자 그녀의 가슴팍이 들썩였다.
후웅!
에단이 드래곤을 잡아 메쳤다. 바닥에 엎어진 드래곤 위에 올라탄 에단이 물었다.
“빨리 대답해.”
에단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적어도 이곳에서 드래곤은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
바닥에 깔린 드래곤이 발버둥을 쳤다.
인상을 찌푸린 에단이 그녀의 팔을 잡아 그대로 부러트렸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드래곤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의미가 없군.’
에단에게는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에단이 의식을 집중시켰다.
‘역시나.’
익숙한 기운을 발견했다.
드래곤의 몸속에서 죽은 마나의 기운을 찾은 에단은 그것을 뽑아내려 했다.
“조금 아플 거야. 어쩔 수 없으니까 참아.”
지금 사정을 봐줄 처지가 아니었다. 에단이 그대로 죽은 마나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몸속에 있는 죽은 마나의 양은 적지 않았다.
드래곤이 눈을 부릅뜨며 발버둥을 쳤다. 에단이 양쪽 무릎으로 그녀의 팔을 봉쇄시켰다.
“금방 끝나.”
죽은 마나의 양은 많았지만, 뽑아내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러자 드래곤의 흐릿하던 동공이 천천히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흑요석 같은 눈이 에단을 응시한다.
“내려와라.”
그녀의 말에 에단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에단이 몸 위에서 내려오자 드래곤이 표정을 찌푸렸다.
“아주 몸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군.”
“저항이 심해서 말이야. 그건 그렇고,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알고 있으니 너무 재촉하지 말거라.”
그 순간, 그녀가 허공에 손을 저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것’의 유지 시간을 늘린 것뿐이니까 너무 경계하지 말거라.”
“……뭐라고?”
“나한테 듣고 싶은 게 있는 것 아니었나?”
그리고 그 순간, 드래곤의 눈살이 가늘어졌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으니, 빨리 묻는 게 좋을 거야.”
“방금 시간을 늘렸다고 하지 않았나?”
에단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 불길하기 그지없는 것의 유지 시간과는 별개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 자체가 얼마 없다는 소리다. 나는 원래 살아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단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판단했다.
“페온, 페온에 관한 것을 알고 있나?”
“…….”
드래곤이 에단을 말없이 응시했다. 에단이 얼굴을 구겼다.
“지금 시간이 없다고 한 건 너 아니던가?”
“……그것의 정체도 모르고 함께 다녔단 말인가?”
드래곤이 묘한 시선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이 에단의 머리에 머무르더니 이윽고 왼손으로 향했다.
“기운과 머리색……. 블란테의 후예인가?”
“맞아.”
에단이 대답하자, 그녀가 헛웃음을 지었다.
“블란테의 후예이고, 왼손에는 그것을 두르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다고?”
드래곤의 시선이 에단을 향했다.
흑요석 같은 눈은 마치 에단을 책망하는 것 같았다.
에단이 자신의 왼손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알고 있는 걸 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