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화] 드래곤 (20)
“하아, 하아.”
휴고는 짧은 시간 동안 온갖 동작들을 수행했다.
전력 질주, 물구나무서서 걷기, 푸시업, 스쾃, 그 밖에 기타 등등.
휴고는 전투에 꽤나 익숙해져 있었다. 자신의 강점을 인지하고, 부족한 점은 경험을 통해 파악했다.
그의 최대 강점은 뛰어난 반사 능력과 압도적인 탄력이었다.
이제 휴고는 더 이상 에단의 강압적인 지시가 없어도 홀로 수련했다.
‘……시선이 좀 따갑긴 하지만.’
공터에서 열심히 훈련하는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
그건 바로 렉사르였다.
렉사르의 누런 눈이 휴고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부담스러워.’
식사한 게 얹힌 기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가가서 말을 걸기에도 힘든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기에, 자제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
휴고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어서 몸을 움직였다.
“오, 열심히 하는데.”
익숙한 목소리에 휴고가 몸을 멈췄다. 목소리의 주인은 에단이었다.
“엇, 도련님 오셨습니까?”
“어, 방금.”
에단이 짤막하게 대꾸하며 휴고 앞에 섰다. 휴고의 호흡은 조금 거칠었지만, 머리와 얼굴은 뽀송한 것으로 보아 강도는 그리 높지 않던 것 같았다.
‘자극 한번 해 줘야겠는데.’
문득 장난기가 들었다.
“가면서 아카데미에 들른 거 알고 있지?”
“넵, 듣긴 했습니다. 가토는 잘 있던가요?”
예상대로 휴고가 관심을 보였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어. 가토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더라고. 아주 학생들 사이에서 행복해 보이던데.”
“…….”
휴고의 볼이 꿈틀거렸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 하하, 그렇습니까? 그것참 다행이네요.”
“그러게 말이야. 처음에는 좀 괘씸했거든? 나랑 너는 여기서 개같이 구르는데 말이야. 걔는 여학생들이랑 하하 호호 하면서 청춘을 즐기고 있잖아.”
“…….”
휴고는 표정 관리가 점점 안 되고 있었다. 입꼬리와 눈꼬리가 경련하는 게 꽤나 볼만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에단이 웃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실력도 줄거나 제자리걸음인 줄 알았거든?”
잠시 말을 멈춘 에단이 휴고에게 손짓했다. 휴고가 귀를 내밀자 에단이 속삭였다.
“너보다 세던데?”
“……네?”
휴고가 황망한 얼굴로 되묻자, 에단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너보다 강하다고. 아, 참고로 기준은 네가 변했을 때보다야.”
“저, 정말입니까……?”
휴고의 목소리가 떨렸다.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지 눈에 초점이 맞지 않았다.
“그러더라니까. 쯧쯧, 앞으로 좀 더 노력해 봐.”
에단이 휴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고, 휴고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동안 해 왔던 고생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는 그렇게 얻어맞으면서 지냈는데…….’
여학생들과 하하 호호 하는 가토의 모습이 상상됐다. 자세 지도를 명목 삼아 자연스러운 스킨십.
휴고의 얼굴이 붉어졌다.
분함에 팔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짜식.’
그 모습을 힐긋 지켜본 에단이 피식 웃었다. 휴고는 본래 경쟁심과는 꽤나 거리가 멀었다.
‘별로 좋은 일은 아니지.’
라이벌 의식은 최상의 동기부여다.
최근 위기의식이 없던 휴고에게는 좋은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피식 웃은 에단의 시선이 렉사르에게로 향했다. 렉사르는 에단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그냥 산책 좀 하고 있었습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좀.”
에단이 코웃음을 쳤다.
변명도 해 본 사람이 한다고, 렉사르의 말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왜? 신경 쓰여?”
에단이 휴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렉사르는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속 시원하게 해결해 주고 싶지만.’
렉사르에 대한 비밀.
에단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설에서도 블란테는 조연에 불과했기에 많은 조명을 받지 않았다.
하니 당연히 렉사르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단편적인 것들뿐.
‘수인과의 관련.’
수인과 연관되어 있지만 수인이 아닌 자가 바로 렉사르였다.
‘머지않아 알게 되겠지.’
그 진실은 과연 어떤 것일까.
에단이 렉사르를 응시했다. 에단의 깊고 고요한 눈을 바라보던 렉사르가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답답하지?”
“…….”
“궁금하기도 할 테고.”
“……그렇습니다.”
“조금만 참아.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난 거짓말을 하지는 않거든. 네가 괘씸하기는 해도 약속은 지켜.”
렉사르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감사합니다.”
“나한테 감사는 필요는 없고, 저기 쟤 보이지?”
에단이 어느 한쪽을 향해 턱짓했다.
그곳에는 휴고가 혼 빠진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징그럽게 쳐다만 보지 말고 눈에 거슬리는 거 있으면 좀 도와줘.”
“저보고…… 저 녀석을 도우란 말씀입니까?”
렉사르가 눈을 치켜떴다. 금빛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어. 그리고 눈 착하게 뜨고.”
에단이 팔을 올리자, 렉사르의 몸이 움찔거렸다.
“서로 닮은 구석도 있잖아. 둘 다 가문 왕따 출신이기도 하고.”
“…….”
예민한 부분을 태연하게 찌르는 에단의 모습에 렉사르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아, 그러셔.”
“……그러는 도련님도.”
“내가 뭐.”
에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렉사르는 결국 꺼내려던 말을 삼켰다.
“너희 둘 다 전투 스타일도 비슷하잖아. 형식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자유로운 스타일. 서로 교류도 하고 좀 그러란 말이야.”
“……도련님께서 지도해 주시던 것 아닙니까?”
“내가 노냐? 나도 바쁘거든?”
“……알겠습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래. 사이좋게 지내라고. 아, 그리고 도마뱀 사냥은 얼마 안 남았어.”
“생각보다 빠르군요.”
“어, 그렇게 됐어. 설레냐?”
에단은 렉사르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표정의 변화는 적었지만 흥분에 젖어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느껴졌다.
렉사르는 대꾸하지 않고 입꼬리를 올렸다.
“정드니까 웃지 마. 그럼 난 간다. 알아서 준비하고 있어.”
에단이 팔을 휘저으며 사라졌다.
* * *
‘채비는 대충 끝낸 건가.’
드래곤.
녀석이 어째서 갑자기 나타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원작에서도 몇 번 언급이 안 된 녀석.
그렇기 때문에 드래곤의 무력조차 가늠하지 못했다.
‘페온은 무언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쉽게 입을 열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가 오면 일이 수월해질 수는 있어.’
하지만 그만큼 지분이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확률은 희박했지만, 대화가 통할 수도 있었다. 결국 궁극적인 목적은 ‘지하’의 대비였으니까.
‘미래를 알고 있는데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지금 고민들은 결국 가정에 불과했다. 직접 대면해 봐야 판별이 가능하다.
에단은 구체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드워프들이 갇혀 있는 뇌옥으로 향했다.
이윽고 뇌옥에 도착하자, 간수 역할을 맡고 있던 단원이 에단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엇, 단장…… 아니, 에단 님!”
“어. 잠깐 물어볼 게 있어서.”
어차피 쇠창살은 있으나 마나였기에 에단은 뇌옥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드워프들은 경계심 어린 시선으로 에단을 바라봤지만, 크게 반발하지는 않았다.
“……무슨 일로 찾아왔습니까?”
“별건 아니고.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묻고 싶은 거……?”
“드래곤, 걔 어떻게 생겼냐?”
에단이 곧장 본론으로 넘어갔다. 퉁가와 드워프들의 얼굴이 굳었다.
“……어떤 대답을 원하는 겁니까?”
“대충 알고 있는 것 전부.”
퉁가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은 갑자기 등장했습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작스레. 무구나 만들고 있던 우리 앞에 말이죠.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습니다. 그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던 드래곤의 모습과는 달랐으니까요.”
“달랐다고?”
에단의 물음에 퉁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드래곤이 본래 폴리모프에 능한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우리로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죠.”
에단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바라보던 퉁가의 동공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공포에 젖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것이 그 존재를 불쾌하게 했던 모양입니다. 드워프들이 참혹하게 죽어 나갔습니다. 어떠한 저항도 해 보기 전에 처참하게 찢겨 죽었습니다.”
“……흐음.”
“그때 느꼈습니다. 저 존재는 드래곤이 맞다고. 저는 살면서 그렇게 막강한 위압감은 처음 느꼈습니다. 정말 숨을 쉬는 것조차 허락을 맡아야 할 것 같은…… 그런 공포가 느껴지더군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는지 퉁가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드래곤의 협박 때문에 마석을 노렸다?”
“협박……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드래곤은 공포로 저희 위에 군림했지만, 드래곤에게도 이성은 남아 있습니다. 저희에게 늘 말해 왔죠. 모든 건 대의를 위해서라고.”
“대의?”
에단의 눈살이 가늘어졌다.
퉁가의 분위기가 미묘했다. 눈의 초점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쯧.”
에단이 혀를 차며 퉁가의 손을 낚아챘다.
‘역시나.’
퉁가의 몸에서 죽은 마나의 기운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에단이 고민할 것 없이 죽은 마나를 뽑아냈다.
“……어?”
퉁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에단이 퉁가의 손목을 놓고는 다른 드워프들을 바라봤다.
‘한 번씩 확인해 봐야겠군.’
에단은 말없이 드워프들의 손목을 잡아 봤다. 모든 드워프들의 몸에는 미량의 죽은 마나가 있었다.
‘이상한데…….’
드래곤과 죽은 마나.
드래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었지만, 적어도 둘이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마석을 채굴해 가는 것도 이상하고 말이야.’
정말 재앙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 때문이라면, 마석을 없애는 편이 더 손쉬울 것이다.
드래곤의 무력이라면 충분할 터.
한데 드래곤은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드워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 힘을 가지고?’
뭔가가 이상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에단이 퉁가에게 물었다.
“지금 기억은 어떻지?”
“아……. 달라진 건 크게 없습니다. 굳이 꼽자면 그때는 사명감 같은 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해. 드래곤은 인간의 모습이었다고 했지?”
퉁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체적인 외향은?”
“검은 장발의 여자였습니다. 매우 마르고 초췌해 보였고……. 그 이상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레벨린은 아닌 모양이군.’
의심을 완전히 거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보이는 인상착의야 언제든지 뒤바꿀 수 있다.
‘하지만 레벨린일 것 같지는 않아.’
합리적인 추론은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에단의 감이었다.
‘그렇다면 진짜 드래곤인가?’
그렇다고 생각하기에는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결국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겠어.’
너…… 도대체 정체가 뭐지?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