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화] 드래곤 (18)
살갗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망령이 괴성을 내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좀, 가만히 있어!”
드레이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이런 꼴까지 보니 짜증이 치밀었다.
획!
드레이가 망령을 힘껏 집어던졌다. 바닥을 대굴대굴 구른 망령이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라?”
탈출에 성공했다.
망령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 나왔어!”
“오, 오오!”
다른 망령들도 놀란 눈치였다. 설마 진짜 성공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에단이 씨익 웃었다.
“오, 성공이네.”
탈출에 성공한 망령의 눈에 작은 파문이 생겼다.
‘자, 잠깐만.’
빠져나왔으니 그냥 도망쳐도 되는 것 아닐까?
얼떨결에 계약이라는 것은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두상 한 약속이다. 다른 망령들과의 의리?
‘귀신끼리 언제 의리를 따졌나?’
없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떨어져 나간 망령이 갈등에 빠져 있는 사이, 에단이 망령의 고민을 눈치챘다.
‘이것 봐라?’
이게 이제 와서 혼자 빼려고 들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야.”
에단의 눈에서 귀화가 피어올랐다.
서슬 퍼런 기운이 망령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예, 예?”
망령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말을 더듬었다.
“너 지금 무슨 생각했어.”
없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흐릿한 다리가 떨렸다.
“아, 아무 생각 안 했습니다.”
“그래?”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난 또 기껏 구제해 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도망가는 줄 알았잖아. 만일 그랬으면 조금 서운할 뻔했어.”
“그, 그럴 리가요…… 하하.”
망령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저거 거짓말 같은데.”
아직 갇혀 있는 망령 하나가 눈을 좁혔다. 귀신으로 지내면서 그동안 지낸 세월이 짧지 않았다.
이 정도 거짓말쯤은 순식간에 간파해 낼 수 있었다.
“가, 갑자기 무슨 트집이야!”
“봐봐, 당황해서 말 더듬는 거.”
“……그렇네? 와, 저 배은망덕한 새끼.”
“쯧쯧, 저러니까 뒤져서도 저러고 있지.”
순식간에 비난 여론이 형성되며 온갖 악담이 퍼부어지고 있었다.
“뭐, 도망쳐도 괜찮아.”
들려오는 에단의 목소리에 소란이 멎었다.
“자신 있으면.”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빠져나가 있는 망령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 이제 빨리빨리 하자.”
“……네.”
드레이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끼에에에엑!”
마지막 망령의 귀곡성을 끝으로 대충 상황이 정리됐다.
그제야 에단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누가 보면 귀신 나오는 줄 알겠네.”
“……저것들 귀신 맞지 않냐?”
에르미온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단이 대수롭지 않게 망령들 앞에 다가갔다.
“흠, 이제 어떻게 할까.”
쓸모는 있을 것 같아서 데려왔지만, 지금 당장은 쓰기가 조금 애매했다.
‘동굴로 보내는 게 좋은데.’
동굴에는 벨몬트도 상주하고 있으니 놔두기는 최적의 장소였다.
‘아무리 봐도 도망갈 것 같단 말이지.’
에단이 망령들을 게슴츠레하게 바라봤다.
망령들의 숫자는 총 넷.
“일단 부르기 귀찮으니까 대충 이름부터 지어 줄게.”
“……이름이요?”
망령들이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생전의 기억은 흐릿했지만, 그들 모두 자신만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넌 뭔가 구렸으니까, 배신자.”
“……네?”
“불만 있어?”
에단의 서늘한 안광에 배신자라는 이름을 갖게 된 망령이 울상을 지으며 찌그러졌다.
“너흰 순서대로 망령 일, 이, 삼.”
“……네?”
“불만 있으면 지금 말하고.”
결국 그들 또한 고개를 저었다.
“흠…….”
에단이 턱을 매만졌다. 당장 옮길 만한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은 너희들은 그냥 여기 있어.”
배신자를 포함함 망령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간신히 지박령의 신세를 벗어났는데 이게 지금 무슨 소리란 말인가?
“지금 좀 바빠서 말이야. 너희까지 챙길 여유가 없네.”
“아…….”
망령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이라면 이해가 된다. 그리고 한편으로 불순한 생각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때.
“이거 마법진 좀 바꿀 수 있나?”
“어떻게?”
“얘네 이대로 두고 가면 딱 봐도 도망갈 게 빤한데. 그렇게는 안 되지.”
에단의 눈에서 광기가 흘러나왔다.
“안 그래?”
‘잘못 걸렸다.’
망령들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 * *
에르미온의 마법진으로 인해 망령들이 못 빠져나가고, 외부인들이 접근하지 못하게끔 조치를 취한 에단은 썩 마음에 드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에단을 바라보던 드레이가 슬쩍 말을 붙였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안 될 게 뭐 있어. 검집 하나 만들어서 차고 다니면 적당히 다닐 만할 거야.”
―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가! 내가 물건이냐?
‘물건은 맞잖습니까.’
카이나의 역정을 가볍게 반박한 에단이 드레이를 데리고 이동했다.
‘가문의 야장도 함께 왔을 테니.’
블란테가 대규모로 이동하면서 대장장이들도 옮겨 왔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기회가 되면 드워프랑도 만나게 해 줘야겠는데.’
야금술로는 대륙에서 따라올 이가 없는 게 바로 블란테의 대장장이다.
하지만 드워프의 실력은 전설로 전승될 정도로 유명했다.
‘아직도 드워프의 물건들은 값을 매기지 못할 정도니까.’
현 시대 최고의 야장들과 전설이 된 야장들, 그 둘의 조화가 궁금했다.
‘일단은 칼집을 만드는 게 우선이네.’
성검은 들고 다니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이윽고 대장간에 도착한 에단은 다짜고짜 성검을 내밀며 검집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의 검집을 만들어 달란 말입니까?”
“맞습니다.”
“흠…… 이건 저도 처음 보는 금속이군요.”
주름진 눈가에 호기심이 감돌았다. 비록 나이든 노장일지라도 아직 열정은 식지 않았다.
“새로운 금속?”
다른 대장장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성검을 구경했다.
― 이, 이! 이것들이!
뜨거운 시선에 카이나가 빽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안타깝게도 카이나의 목소리는 다른 이들에게 닿지 않았다.
‘고소하네.’
드레이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동안 묶은 체증이 싸악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 ……지금 저 새끼 웃냐?
카이나의 섬뜩한 목소리에 드레이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 야, 너 방금 입꼬리 씰룩 거린 거 맞지? 너 일루 안 와?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시답잖은 만담을 듣던 에단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이제 가자.”
대충 정리할 것들은 끝났다. 이제 본격적인 준비를 할 순간.
‘슬슬 잡으러 가 볼까.’
도마뱀을 사냥할 시간이었다.
* * *
헨리가 손을 뻗은 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는데, 거기에는 인위적인 작용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흐름.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면 길이 저절로 터진다는 느낌이었다.
“……말이 안 나오는군.”
데아티르의 동공이 흔들렸다.
눈앞에 광경을 보고 있음에도 쉽사리 믿기지가 않았다.
‘……대체 저건 뭐지?’
정령술은 아니었다. 헨리의 곁에는 그 어떤 정령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것만 보면 대지의 정령왕이라도 강림한 것 같군.’
전진 속도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방향을 안내하던 드워프들조차 입을 떡하고 벌렸다.
하지만 그들이 놀라든 말든 헨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헨리가 발을 멈췄다.
‘이 정도만 해 둘까.’
에단의 당부가 떠올랐다.
힘을 전부 보이지 마라.
헨리는 세계수의 힘을 나눠받은 이들 중 누구보다 세계수와 흡사한 인물이었다.
세계수에게서 떨어져 나온 일부이기도 한 존재가 바로 헨리였으니 당연했다.
그렇기에 가장 자연스럽게 마나를 다룰 수 있었고, 조금 전과 같이 복잡한 술식이나 계산 따위가 필요 없었다.
‘신기하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헨리가 자아를 깨닫기 이전, 그녀는 인간의 삶을 살아왔다. 그것도 아주 무능력한 인간의 삶을.
딱히 전능함이나 우월함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주변에 너무 괴물 같은 인간들이 즐비했다.
‘……그래도 예전에는 얼굴도 못 봤을 사람들이니까.’
마탑의 탑주와 아큐르의 가주.
둘 모두 어마어마한 거물들이다. 과거의 헨리였다면 감히 고개도 못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이 헨리를 보고 놀라워하고 있다는 것에 묘한 감흥이 들었다.
마나는 충분히 여유로웠다.
소모하는 마나보다 주변으로부터 흡수하는 마나가 더욱 많았기에 계속해서 능력을 보여 줄 수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내야지.’
헨리가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숨을 내쉬었다.
“일단 여기까지만 할까요?”
“……알겠습니다.”
데아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바크락도 멍하니 있다가 화들짝 놀랐다.
‘저, 정말 대단하군.’
어째서 동료들의 위치가 발각된 것인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드워프는 자신들의 기술력에 많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기술력에는 곡괭이질도 포함된다.
‘상대가 안 되겠어.’
하지만 바크락은 깔끔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인간 여자와의 경쟁은 무의미했다.
길을 만드는 게 아닌, 길이 열리는 것 같았다.
뜨거운 시선에 겸연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이던 헨리가 입을 열었다.
“슬슬 돌아갈까요?”
* * *
영지전이 종식되고 영지는 안정을 되찾았다. 한니발은 최근 에단이 제도에 방문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사고는 치지 않았어야 할 텐데.’
아직은 때가 아니다.
자신이 블란테와 접촉했다는 사실은 이미 제국의 귀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저들에게도 눈과 귀가 있었으니까.
‘그 모든 것을 무마할 한 방이 있지.’
이미 이 정도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된다. 힘, 정보, 돈 모든 것에서 할 만했으니.
‘이번 게 잭팟이었으면 좋겠는데.’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비틀렸다.
드래곤의 존재는 예상치 못했다. 물론 위험성도 뒤따르지만, 언제나 큰 위험 끝에는 보상이 따르는 법이었다.
한니발은 그 보상이 기대가 됐다.
‘문제가 있다면…….’
한니발의 눈이 가늘어졌다.
머릿속에 레벨린이 떠올랐다. 그녀가 잠적한 지 벌써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한니발이 알고 있는 레벨린은 결코 이대로 포기할 인물이 아니었다.
‘물러나진 않겠지.’
당한 게 있으니 이를 악물고 힘을 축적할 테다.
‘황실.’
카이제르와 신성 왕국.
‘그리고 지하.’
모든 게 맞물려 돌아간다.
한니발은 이번엔 반대로 자신의 패를 떠올렸다.
‘2황자.’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었다.
늘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1황자였고, 황위에 오르는 것 또한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간 2황자는 욕심을 숨기고 자신을 낮춰 생존을 했다.
그 위태로운 상황에서 살아남기에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정해 줄만 했다.
‘게다가 생각보다 영민하기도 하지.’
그만큼 다루기는 까다로웠지만, 협력하기는 좋은 상대였다.
이제는 세력을 구축할 시간이었다.
정보 길드는 대륙 전체에 발을 뻗치고 있었다.
유일한 문제는 과연 드래곤을 잡을 수 있는가.
그것이 관건이었다.
* * *
“…….”
여유롭다.
따사로운 햇살이 창문을 타고 내리꽂힌다. 밝은 햇살에 떠다니는 먼지가 보였다. 저 먼지조차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줬다.
‘묘하군.’
칼베리안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비록 싸구려 커피와 나무로 만들어진 투박한 가구들이었지만, ‘자유’라는 단어 하나가 마음의 안정을 주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 허황된 것에 집착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차를 음미하고 사색에 빠질 때만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뭐 하냐?”
햇살이 가려지고 그림자가 드리워 눈을 떠 보니, 창문 사이로 에단의 얼굴이 보였다.
“……푸흡!”
칼베리안이 마시던 차를 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