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화] 드래곤 (17)
시간이 멎은 기분이다.
흑사자의 왕이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두근두근.
방금까지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긴장감이 몰려들었다.
전까지는 팽팽한 긴장의 끈, 곤두서는 솜털, 좁아지는 동공이었다면, 지금은…….
손아귀에 힘이 풀린다. 저항의 의지가 사그라든다. 자칫 검을 놓칠 뻔한 것을 희미한 정신력으로 칼자루를 쥐고 있다.
덜덜덜.
식은땀이 흘렀다.
치켜든 칼은 고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폭풍 전 고요라는 사실은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넓게 퍼진 마나가 천천히 위로 상승한다.
새하얗게 질린 가토가 턱을 떨자 이가 부딪친다.
딱딱딱.
‘이거 너무 과했군.’
쓰게 웃은 빈센트가 기운을 거뒀다. 주위를 집어삼킨 압도감이 사라졌다.
“…….”
휘청거리던 가토가 검으로 몸을 지탱시켰다.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이게…… 뭡니까?”
말을 내뱉으면서도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가 멍했다.
“별거 아닌 재주라고 생각하면 되네.”
빈센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가토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블란테의 주인인 빈센트 앞이었지만, 치미는 황당함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
별거 아닌 재주?
방금 것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닭살이 돋는다. 가토는 살면서 그만한 공포를 겪은 경험이 없었다.
“사람은 자신만의 길이 있네.”
흔들리는 가토의 눈을 바라보던 빈센트가 말했다.
“블란테의 검술은 한정되어 있지만,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셀 수가 없어.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한 일이네. 하지만 그것에 집중하면 길을 찾을 수가 없지.”
가토의 경지.
저 정도 경지만 되더라도 다른 기사단에서는 단장직을 맡아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이다.
모두가 극한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검을 수행하는 이가 현실적으로 가지는 목표.
그게 지금 가토의 위치다.
바꿔서 말한다면 가토는 다른 기사들의 목표까지 올라서 있다는 소리였다.
“그런 의미에서 내 아들놈은 정말로 특이한 놈이지. 제 길을 벌써 개척했어. 재능이란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게 바로 재능이겠지.”
“…….”
빈센트에 말에 가토는 침묵했다.
재능이라는 단어는 가토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가토는 과거의 에단을 기억한다. 자신이 수습 기사 시절의 에단은 망나니였다.
블란테의 탕아.
많은 소문이 돌았다. 어쩌다 저런 돌연변이가 나왔냐는 말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구설수가 들끓었다.
바뀌지 못할 줄 알았다. 그 비대한 몸은 블란테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에단은 순식간에 달라졌다. 가토는 그런 에단을 보며 처음으로 실감했다.
‘재능.’
범접할 수 없는 재능이 에단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가 또 있었다.
“같이 다니는 녀석도 기억하고 있네. 이름이 휴고라고 했나?”
“……맞습니다.”
휴고는 스펀지 같았다.
짐승 같은 신체 능력과 동체 시력을 지녔고,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갔다.
초조했다. 훈련 기간을 따지면 가토가 검술에 매진한 시간이 훨씬 길다.
그 기간을 휴고는 단번에 도약했다.
‘뒤처지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주먹을 움켜쥐는 가토를 빈센트가 말없이 바라보았다.
“질투가 나나?”
“……아닙니다.”
“부정하지 않아도 괜찮네. 당연한 일이지. 그 친구의 움직임은 내가 봐도 경탄스러울 정도니.”
“따라잡을 수는…… 없겠죠?”
“음?”
빈센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가 언제 따라잡을 수 없다고 했지? 반대네. 그렇기에 자네는 그 친구를 뛰어넘을 수 있어.”
“……정말입니까?”
가토의 눈이 흔들렸다. 달콤한 소리였다. 하지만 믿기 힘든 소리이기도 했다.
“자신의 길. 지금부터 그 길을 찾는 법을 알려 주겠네.”
“……저, 저에게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내가 가문의 자라나는 새싹한테 이 정도도 못 해 줄 박정한 사람으로 보이나?”
씨익 웃은 빈센트가 말을 이었다.
“다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이라네.”
가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벅차오르는 감정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자, 그럼 검을 다시 한번 들어 보게나.”
꿀꺽.
가토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 * *
“……저거 괜찮은 거 맞아?”
“글쎄?”
에단의 대답에 에르미온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눈초리를 보냈다.
바들바들.
바닥에 쓰러진 채 경련하고 있는 드레이를 바라봤다.
“음…….”
효과는 있었다.
적당한 강도의 외력이 더해지면 조금씩 정신을 되찾았다.
“역시 매가 약인가?”
“……너 미친 새끼야?”
“대뜸 지랄이네.”
에단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보던 에르미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랑 엮이니까 별일을 다 겪네.”
“마법사로서는 축복 아닌가? 드래곤을 찾아 여기까지 온 거잖아.”
“……닥쳐.”
저렇게 말하니까 또 할 말이 없었다. 에르미온이 연민의 눈초리로 드레이를 바라봤다.
까뒤집힌 눈, 질질 흐르는 침.
‘……그런데 이게 안정되네.’
드레이의 손에는 성검이 쥐어져 있었다.
이전 같은 강렬한 폭주는 일어나지 않았다.
― ……저 무식한 새끼.
카이나가 질렸다는 듯 말했다. 에단은 그녀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뭐, 결국에는 필요할 때 증명만 하면 되니까.’
슬슬 신성 왕국이 드레이의 존재를 알아차릴 시기였다.
‘먼저 알고 있을 수도 있고.’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신성 왕국이 아무리 강한 무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들, 블란테가 도사리는 이곳에 함부로 발을 들일 수는 없을 테니까.
‘협력 관계는 확인했고.’
1황자는 카이제르와 신성 왕국을 전면에 드러내면서 대놓고 자신의 세를 과시했다.
‘자신 있다 그거겠지.’
보여 주지는 않았지만, 아마 레벨린과 마크도 그쪽에 몸을 의탁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재미있었다.
그런 스타일은 결국 코를 눌러 줘야 한다.
‘이번 일만 끝나면 본격적으로 준비해야겠는데.’
지금 처리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드래곤.
과연 녀석은 어떤 선물을 줄지 기대가 되었다.
에단이 씨익 미소 지었다.
“야.”
에단이 드레이를 흔들었다.
“정신 차린 거 알아. 그만 때릴 테니까 일어나.”
“…….”
드레이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드레이의 눈빛에는 서러움과 원망이 가득했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말고. 결국에는 해결됐잖아.”
“해결…… 말입니까?”
드레이가 오른손에 쥐어져 있는 성검을 바라봤다.
― 뭘 꼬라 봐.
곧바로 들려오는 카이나의 까칠한 목소리.
아, 진짜 싫다.
진절머리가 났다. 당장에라도 집어던지고 싶은 욕망이 치솟았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꾹 눌러 냈다.
“후우…….”
많은 심경이 담긴 한숨이었다.
아직도 삭신이 쑤셨다. 살면서 이렇게 얻어터진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또 몸을 움직이는 데에는 별로 지장이 없었다.
“어때, 움직일 만하지?”
씨익 웃으면서 말하는 에단의 얼굴을 보자니 다시금 울화통이 터졌다.
여기서 괜한 말을 내뱉어 봤자 자기만 손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 한 대만 때리고 싶다.’
강렬한 충동이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으며 견뎌 낸 드레이가 입을 열었다.
“……이게 해결 방법입니까?”
드레이가 성검을 바라봤다. 들끓는 신성력에 온몸이 저릿했다.
인상을 찌푸리던 드레이가 결국 성검을 놓았다.
“……근본적인 해결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역시 그런가?”
태연자약하게 말하는 에단의 모습에 다시금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뭐, 그러면 슬슬 복귀해.”
“……네?”
“그래도 시험 몇 개는 통과한 거 아니야? 그러지 않고서야 이 정도의 상승효과는 보이지 못했을 테고.”
“그렇긴 합니다만…….”
“잘했네. 꽤나 쉽지 않았을 텐데.”
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생각해 봐도 치가 떨리는 기억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어차피 너를 앞에 내놓을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그저 필요할 때 잠깐 성검을 다룰 수 있으면 돼.”
만일 성검의 힘이 필요하더라도 그때는 에단 본인이 검을 쥐면 그만이었다.
하니 지금은 이 정도로 족했다.
“그렇……군요…….”
드레이가 묘한 표정으로 성검을 바라봤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럼 고생했어. 이제 다시 학교생활로 돌아가면 돼.”
“정말 이걸로 끝인가요?”
“끝은 아니지. 앞으로 꽤나 귀찮아질걸?”
“그런데…….”
“어차피 계속 시도한다고 바뀌는 건 아니잖아. 걱정은 안 해도 돼. 여기에 누가 있는지 잊었어?”
“……아니요.”
“그럼 이제 그만 돌아가. 아, 맞다. 가기 전에 뭐 하나 해 두고 가자.”
“네?”
드레이가 눈을 끔뻑였다.
* * *
에단과 드레이, 그리고 에르미온이 건물을 나섰다. 드레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에단의 뒤를 따랐다.
“……저건 뭔가요?”
드레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앞을 바라봤다.
“귀신.”
“……귀신이라고요?”
“어, 그렇다는데?”
“……저 그런 거 별로 좋아하진 않습니다.”
“쟤네도 너 싫어한대.”
에단이 피식 웃으며 앞장섰다. 드레이는 뭔가 꺼림칙했지만, 어쩔 수 없이 희끗거리는 형체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진짜야?’
귀신의 존재를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딱히 무섭지는 않았지만 거부감이 강하게 들었다.
“훠이.”
“꺄아아아악!”
에단이 쥐고 있던 성검을 흔들었다. 망령들이 기겁을 하며 귀곡성을 터트렸다.
“시끄럽잖아. 뒈지고 싶어?”
“히, 히이익! 죄송합니다!”
망령들이 재빠르게 바닥에 엎드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레이가 기이한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이게 뭡니까?”
“얘네가 너 때문에 꽤나 고생했대.”
“저 때문에요?”
에단이 최대한 짧게 요약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드레이의 얼굴이 기묘해졌다.
“……뭐라 할 말이 없네요.”
“뭐, 그냥 죽여 버릴까 하다가.”
에단이 스산한 눈초리로 망령들을 흘겨보자, 그들이 재차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제, 제발 목숨만!”
“엉엉, 살려 주세요!”
“너흰 이미 죽어 있잖아.”
눈앞에서 보고 있지만, 실감이 나지 않는 대화였다.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우두커니 서 있을 때 에단이 입을 열었다.
“내가 해 보려고 했거든? 그런데 맨손으로는 잡히지가 않더라고.”
에단이 손을 휘적거렸다. 반투명한 몸 사이로 손이 통과됐다.
“마나를 실으면 잡히긴 하는데. 어떻게 여기만 벗어나려고 하면 튕겨 나가서.”
지박령답게 망령들은 이 지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냥 이걸로 후려쳐 볼까?”
에단이 성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섬뜩하기 그지없는 소리에 망령들은 몸을 웅크린 채 바들바들 떨었다.
― 해 보든가. 곧바로 소멸시켜 버릴 테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카이나의 살벌한 목소리.
“……그래서 제가 뭘 하면 되는 거죠?”
“쟤네 한번 잡아 봐.”
“될까요?”
“안 되면 뭐, 후려쳐 봐야지.”
“히익!”
“……해 보겠습니다.”
드레이가 저벅저벅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잡으세요.”
망령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드레이를 바라봤다.
망령의 눈에는 드레이가 그 어떤 존재보다 무섭게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들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망령이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맞잡았고.
“끼에에에에엑!”
이내 귀곡성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