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화] 드래곤 (16)
“……앞으로 30분간 반복하겠습니다.”
검술을 지도하던 가토가 몸을 돌렸다. 터덜터덜 문밖으로 나가는 가토를 리사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 진짜…… 신경 쓰이게.’
한껏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거슬렸다.
‘저런 머저리한테 지다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본래 리사와 가토의 신분 차이는 명확하다.
리사는 블란테의 자제였고, 가토는 이제 막 직위를 수여받은 신출내기 기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는 또 상황이 달랐다. 평등을 추구하는 아카데미의 방침상 리사는 일개 학생에 불과했다.
반대로 가토는 임시 교사의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날 이겼으면 좀 어깨 좀 펴고 다니라고!’
짜증이 치밀었다. 보란 듯이 콧대를 눌러 버릴 생각이었지만, 도리어 된통 당하고 말았다.
리사는 검을 휘두르면서도 가토가 나간 연무장을 향해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
가토는 교정 테이블에 앉아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초조함이나 조급함 따위의 감정은 검을 수행함에 있어서 독이 된다는 사실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다.
가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이지.’
가토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거친 손이었다. 검을 쥐면서 수도 없이 벗겨지고 짓무른 살 때문에 굳은살이 가득했다.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가토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강해지고 싶다.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에단의 곁에 있으면서 과거와는 비교도 못 할 정도의 가파른 성장을 해 왔다.
그러나 곁에 뛰는 자들은 가토보다 늘 빨랐다.
에단, 휴고, 그리고 헨리.
모두 믿기지 않는 속도로 성장해 왔다. 에단의 경지는 이제 더 이상 올려다보아도 보이지가 않는다.
꾸우욱.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에단은 허언을 내뱉지 않는다. 허황되다고 생각되던 말들도 결국은 증명시켰다.
‘사실이겠지.’
이미 휴고에게도 뒤처졌다.
평범한 녀석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바보가 아니라면 휴고가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다르고 말고는 상관없었다. 휴고는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다.
그런 라이벌에게 뒤처진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가토가 허리춤에 매여 있는 검집을 만지작거렸다.
손에 조금 힘을 주자, 검집에서 검이 뽑히며 서늘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슬며시 모습을 드러낸 검을 바라보던 가토가 이내 검집에 밀어 넣었다.
고개를 다시금 들어 올렸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쾌청한 날씨였다.
‘……나도 따라갔다면.’
기회를 놓친 것 같았다.
욕심을 부렸다면 뒤처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너무나도 고된 강행군을 해 온 탓에 처음에는 자신을 두고 간다는 게 반가웠다.
하지만 그 모든 강행군이 자신에게는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물론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얻어 가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 성장 폭은 지난 여정과는 비교될 수준이 아니었다.
‘고민해 봤자, 소용없겠지.’
가토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뭐 하고 있나.”
낯익은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획 하고 돌아갔다.
빈센트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당황을 감추지 못한 가토가 다급하게 몸을 일으킨 뒤 경례했다.
“얼굴이 꽤나 심각하던데.”
“……죄송합니다.”
“자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괜찮다면 이야기 좀 듣고 싶은데 말이야.”
가토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였다. 그런 가토의 표정을 바라보던 빈센트가 작게 웃었다.
“요즘 젊은 애들은 무슨 생각을 하나 궁금해서 말이야. 부담되면 말해 주지 않아도 돼.”
“아, 아닙니다.”
가토가 손사래를 쳤다.
고민을 털어놓기 위해 입을 열라고 했지만, 쉽게 말문이 트이지 않았다.
민망함에 얼굴이 후끈거렸다. 그렇게 잠시 머뭇거리던 가토가 천천히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흐음.”
이야기를 모두 들은 빈센트가 신음을 흘렸다.
“……보잘것없는 걸로 고민해서 죄송합니다.”
“흠? 누가 보잘것없다고 했지? 나는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어. 그 고민은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야.”
“……그렇습니까?”
“그래. 블란테는 약육강식. 동료가 앞질러 가면 초조함을 느끼는 게 당연해. 그러지 않고 현실에 안주한다면 오히려 한심한 일이지.”
“그렇……군요…….”
가토의 표정이 풀어졌다.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었던 빈센트에게 이런 소리를 들으니 마음의 위안을 얻은 것 같았다.
‘흠.’
빈센트는 갸륵하다는 눈초리로 가토를 바라봤다. 가토는 아직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기사였다.
‘탐이 나는군.’
에단의 기사가 아니었다면, 진지하게 뺏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빈센트가 피식 웃었다.
“혹시 남는 연무장이 있나?”
간만에 만난 기특한 기사에게 선물을 하나 전해 주고 싶었다.
* * *
“흐음.”
에단이 성검을 움켜쥐었다.
간만에 만난 카이나는 여전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난무하는 욕설을 무시한 채 에단이 검을 휘둘렀다.
촤악!
신성력이 뿜어진다. 에단은 거기에 회색 마나를 더해 휘둘렀다.
단순한 마나의 방출이었지만, 그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콰앙!
신성력과 마나가 벽면에 처박혔다.
지진이 난 것 같은 흔들림과 함께 한쪽 벽이 무너져 내렸다.
― ……정신 나간 새끼.
카이나가 침음을 흘렸다.
에단의 재능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름길은 능사가 아니다.
에단은 편법을 통해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본래라면 지금의 힘과 경험을 소화하지 못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에단은 보란 듯이 마나를 다뤘다.
이질적이고 포악한 마나.
양을 놓고 보면 마스터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리치와 세계수의 근간을 집어삼켰으니 탈이 나도 진즉에 났어야 했지만, 에단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왜 안 될까.”
에단이 드레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드레이가 멍청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저걸 제가 어떻게 합니까.”
“한번 잡아 봐.”
드레이의 시선이 성검을 향해 옮겨졌다.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기억하기도 싫은 끔찍한 고통이 뇌리에 새겨져 있었다.
‘……질 수는 없지.’
드레이가 굳은 얼굴로 성검을 낚아챘다.
파직.
신성력이 전류처럼 튀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후우웅!
“이런 미친!”
에르미온이 비명을 내질렀다. 눈이 멀 것 같은 광채가 터져 나와 찬란한 신성력이 폭발하듯 번졌다.
“으아아아아아아!”
드레이가 괴성을 내질렀다.
입고 있는 옷이 거칠게 휘날리고, 두 눈에서는 광명이 뿜어졌다.
‘타격을 입거나 하진 않네.’
역시 페온은 반응이 없었다.
분명 페온은 영체였기에 그 본질은 방금 마주했던 망령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뭐, 뭔가 반응이 있었다면 진작 있었겠지.’
에단이 성검을 휘두를 때도 없던 반응을 이제 와 한다는 것은 어폐가 있었다.
에단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미간을 찌푸린 에단이 세계수의 목걸이를 전개시켰다.
쩌엉!
세계수의 목걸이는 순식간에 신성력을 흡수하고 방출해 신성력의 장막이 펼쳤다.
‘쓸모는 넘치는군.’
에단이 드레이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야, 정신 차려.”
“으아아아아!”
드레이는 지금 폭주하고 있는 상태였다. 에단의 시선이 드레이가 쥐고 있는 성검에게로 향했다.
“이거 어떻게 못 합니까?”
― ……이걸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에단이 생각에 잠겼다. 뭔가 방도가 있을 것 같았는데.
‘모르겠네.’
명확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애당초 당사자인 드레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만 차리면 뭘 해 보겠는데.’
에단이 드레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툭.
무심코 발이 나갔다. 에단의 발이 드레이의 허벅지를 가격했다.
움찔.
드레이의 몸이 움찔했다. 눈에서 뿜어지던 빛이 순간 흐릿해졌다.
‘……이것 봐라?’
에단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거 생각보다 쉬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
두둑. 두드득.
에단이 손을 풀었다.
뿜어지는 신성력 사이에 회색 마나가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자신의 영역이라 주장하는 것 같았다.
“조금만 참아.”
에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 *
“……지금은 비어 있는 것 같습니다.”
가토는 빈센트를 이끌고 연무장을 향했다. 아직도 빈센트가 무슨 이유로 연무장을 찾은 건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흠…….”
빈센트의 눈이 가토에게로 향했다. 순간 가토의 몸이 굳었다.
본능이 경고했다.
시야가 좁아진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요동친다.
“하아, 하아.”
입이 벌어졌다.
빨라진 호흡을 통해 전신에 피가 돈다.
순환하는 혈액 탓에 몸이 뜨거웠다. 마치 누가 옆에서 칼을 뽑으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스윽.
자연스럽게 칼자루에 손이 얹어졌다. 가토의 시야에는 이제 빈센트밖에 남지 않았다.
‘반응은 좋군.’
빈센트가 피식 웃었다.
노골적인 살기는 아니었다. 그저 일말의 기도를 흘린 것이다.
과거 가토는 이런 사소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가토는 분명히 성장했다.
“검을 뽑아라.”
“…….”
키이잉.
가토가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의문을 제기할 여유는 남지 않았다.
이제야 빈센트가 연무장을 찾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영광입니다.”
“뭘, 이런 것 가지고.”
빈센트가 피식 웃었다.
그게 도화선이 된 가토는 빠르게 돌진했다.
가토의 눈은 부릅뜬 상태였다. 빈센트의 미세한 변화도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전부 쏟아내야 해.’
역량의 차이는 확연하다.
가토는 모든 것을 불사를 생각으로 마나를 끌어 올렸다. 이제부터 모든 공격은 목을 노리는 살초였다.
가토의 검이 휘둘러졌지만, 빈센트는 잠자코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콰직!
그 순간 가토가 지면을 밟았다.
지면이 움푹 들어가며 가토의 움직임에 제동이 걸렸다. 베기에서 찌르기로 급변한 공격.
‘훌륭하군.’
에단이 종종 보여 주던 움직임과 흡사했다. 언제든 진짜가 될 수 있는 허초였다.
쾅!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똥이 튀었다.
어깨가 빠질 것 같은 강렬한 통증에 가토의 눈이 부릅떠졌다.
‘제기랄!’
방금 일합으로 다시금 실력 차이가 실감 났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너무 아까웠다.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내야 한다. 가토의 눈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빈센트는 아무런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았다.
추욱 검을 늘여 놓은 상태. 빈틈투성이였다. 공격할 곳은 넘쳐 난다.
‘……움직일 수가 없어.’
흑요석 같은 눈이 가토를 응시하고 있었다. 깊고 고요한 눈이다. 마치 자신의 생각을 모조리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뿌드득.
가토가 쥐고 있는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여기서 굴복하면 정말 스스로에게 좌절할 것 같았다.
가토가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흘러내리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특하구나.”
빈센트의 말은 진심이었다.
가토가 쏜살처럼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거칠지만 정교한 검술이었다. 중심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런 원석을 못 알아보다니, 쯧쯧.’
빈센트는 별다른 움직임을 취하고 있지 않았다. 손목의 까딱임 정도로 가토의 모든 공세를 깨트렸다.
“조급하구나.”
한창 그럴 때지.
빈센트가 피식 웃었다. 조급함은 때로 성장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여유로움이 강점을 가질 때도 있는 법이다.”
빈센트가 칼을 치켜세웠다. 그 순간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전과는 궤를 달리하는 압도감이 가토의 몸을 짓눌렀다.
“재밌는 걸 하나 보여 주마.”
빈센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