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드래곤 (14)
“……이상으로 보고를 마칩니다.”
“흐음…….”
1황자가 목소리를 흐리며 팔걸이를 두드렸다.
불길하기 그지없는 정적에 보고를 끝낸 기사단장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돌아가 봐.”
긴장한 것과는 다르게 1황자에게서는 간단한 대답이 나왔다.
“……실례하겠습니다.”
행여나 마음이 바뀔 새라 기사단장이 황급하게 문밖을 나섰다.
이윽고 집무실의 문이 닫혔다.
기사단장의 생각과는 다르게 1황자의 기분은 꽤나 좋은 상태였다.
“전멸이라.”
예상은 했던 부분이다.
애당초 잃어도 아쉬울 것 없는 인물들로 구성한 집단이다. 이것을 통해 얻은 득이 더 컸다.
‘총인원은 여섯. 화염 마법으로 죽은 이가 넷, 둘은 외상으로 사망. 시체는 잿더미도 남지 않았다라.’
이로 인해 블란테와 마탑의 협력은 거의 확실하다고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그 상대가 괴팍한 성격으로 악명이 자자한 에르미온이었다.
‘다른 놈들은 입을 다물고 있군.’
블란테에게 목줄을 채우기 위해 불렀지만, 반대로 풀어 둔 개들의 목에 줄이 채워졌다.
“재밌네.”
강경하게 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면 잃는 게 압도적으로 크다. 그간 쌓아 왔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카이제르는 이를 갈고 있을 테고.’
그도 카이제르의 상황은 이해하고 있었다. 가문의 기사단장이 목숨을 잃었으니 칼을 갈고 있을 터.
‘그래도 이건 정말 의외란 말이야.’
정보 길드와 거상.
둘의 동향이 블란테와 함께한다. 심지어 그 세력에 마탑까지 붙어 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제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제국이라도 블란테를 함부로 압박하지 못한다.
블란테는 언제나 혼자였다.
막강한 무력으로 홀로 고고하게 군림했다. 타인의 조력에 기대지 않아도 될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최근 들어 블란테의 행보가 달라지고 있었다.
판도가 뒤바뀐 이후 더 이상 블란테는 고독하지 않았다.
‘녀석 짓이군.’
1황자는 허연 이가 만개될 정도로 크게 웃었다. 도저히 한 명의 짓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급진적인 변화였지만, 1황자의 직감은 말해 주고 있었다.
직접 마주했던 에단의 눈.
자신과의 대면에서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던 그 모습.
‘재밌어.’
진즉에 흥미를 잃었던 칼베리안이 블란테를 등에 업었다.
“꼭 왔으면 좋겠는데.”
연회에서 만나게 될 에단의 모습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 * *
“그럼 또 오지.”
파손된 집기를 포함해 웃돈을 얹어 준 에단과 에르미온은 곧바로 게이트로 향했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맞아. 별로 좋지는 않아.”
찝찝함과 불쾌함이 공존했다.
백주 대낮의 제도에서 대놓고 벌인 습격. 1황자의 소행임을 숨길 의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우습게 봤다 이거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런 경우에 에단은 결코 곱게 넘어가지 않았다.
당한 것의 배로 갚아 줘야만 직성이 풀렸다.
‘넌 뒈졌어.’
에단이 감정을 눌러 담았다. 오늘 일은 결단코 잊지 않고 되갚아 줄 생각이다.
‘탁자의 상처.’
찝찝함의 원인은 그것 때문이다. 뭐가 얹힌 것처럼 맺혀 있었다.
‘고민해 봤자 답이 없으니.’
찝찝하긴 했으나, 고민을 지속해 봤자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에단은 곧바로 제도의 게이트를 이용해 아카데미로 향했다.
“편하긴 편하군.”
게이트의 편의성은 언제 생각해도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영광인 줄 알라고.”
에르미온이 투덜댔다. 원래 게이트의 이용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어, 그래.”
에단의 감정 없는 대답에 에르미온이 인상을 구겼다.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 교수님?”
지나가던 학생 하나가 에단을 알아보며 다가왔다.
“금방 오셨네요?”
“별일은 아니었어서.”
‘……황자랑 대면하는 일이 별일이 아니라고?’
에르미온이 황당하다는 눈초리로 에단을 응시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드레이나 보고 가야겠군.’
본래 곧장 영지로 향할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드레이에게 성검을 건네준 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학생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총총 뛰어갔다.
“이제는 또 어딜 가는데?”
“말해 줘도 모르잖아.”
“말을 해도 꼭 지랄 맞게 해요.”
에르미온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어찌 된 녀석이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오는 걸 못 본 것 같았다.
“으아아아아아!”
괴성이 들려왔다.
본관에서 꽤나 거리가 떨어져 있는 부지의 건물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한창이네.”
에단이 피식 웃었다.
소리만 들어도 드레이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 건물 자체가 에단이 드레이를 위해 마련해 둔 건물이었으니, 다른 이는 아니리라 확신했다.
‘원래는 저곳도 나름대로 사건이 벌어지는 건물이기는 하니까.’
귀신 따위의 것들이 종종 출몰한다고 알려진 폐건물이다.
원작에서는 여름 이벤트로 활용되었던 건물이었고, 주인공에게는 여러 히로인들과 추억을 만들던 장소이기도 했다.
‘알 게 뭐야.’
귀신이 출몰하던 것은 맞다.
애초에 언데드도 존재하는 세계관이었다. 귀신 좀 나온다고 놀라는 것도 이상하다.
‘뭐, 상황이 딱 맞물려서 보내긴 했지.’
저런 심령 스팟 같은 곳은 드레이와 잘 어울렸다.
반쪽짜리였지만 성자는 성자였고, 거기에 성검까지 쥐고 있었으니까.
“장난 아니군.”
벌써부터 피부가 저릿했다.
아직 건물과의 거리는 상당했음에도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뭐야 이건 또?!”
에르미온이 설명을 바라는 눈초리로 에단을 바라봤다.
살면서 이런 막강한 신성력은 처음 경험했다. 본디 마법사라는 족속은 신성력과 별로 친하지 않았다.
본질부터가 규율에 위배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신성 왕국에서도 이런 느낌은 못 받았는데…….’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에르미온이 다시 에단을 지그시 노려봤다.
‘대체 이놈은 뭐 하는 놈이길래…….’
주변에 괴물들이 득시글거린단 말인가.
황당함에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놀란 것은 에단도 매한가지였다.
‘이거 조치를 좀 취해 놔야겠는데.’
아직 드레이라는 존재를 대놓고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에르미온.”
“……네가 웬일로 이름으로 부르냐?”
“여기 마법진 하나 깔아 주라.”
“……진짜 뒈질래?”
에르미온의 살벌한 으름장에도 에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거창한 부탁은 아니고, 대충 이 신성력만 어느 정도 가려 주면 돼. 아, 환각도 대충 섞으면 좋을 것 같은데. 남들이 함부로 침입 못 하게.”
“그걸 보고 존나게 어렵다고 하는 거야, 이 개자식아!”
“마석 줄게.”
“……얼마나?”
“그때 봤던 거 있지. 5분의 1 줄게.”
“……제기랄.”
에르미온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마법진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진짜 마법사인 게 죄지, 죄야.’
탐구심이라는 욕망은 마법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감정이다. 블랙마켓에 상품으로 올라왔던 마석.
생전 처음 보는 크기의 것이다. 그 크기가 줄어든다고 한들 엄청난 연구 재료가 될 것이 분명했다.
‘……이게 다 마탑을 위해서야.’
그렇게 스스로 합리화를 시작한 에르미온이 열심히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에휴, 제기랄.”
에르미온이 욕지기를 중얼거리며 대규모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대규모 마법진 자체가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마탑이었다면 까마득한 후배들이 우르르 나설 작업을 자신이 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치민 자괴감과 회의감이 발목을 잡았다.
“안 하고 뭐 해? 마석 필요 없어?”
“……닥치고 기다려.”
에르미온이 몸을 부들거렸다. 다시 작업이 재개되었다.
폐건물을 중심으로 거대한 원을 그리는 작업이다. 작업이 거의 끝나 갈 때쯤에 묘한 것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저건 뭐냐?”
“……나도 몰라.”
에단의 물음에 에르미온이 대꾸했다. 저 구석에서 검은 형체가 옹기종기 모여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짐승이나 몬스터는 아닌데.’
도통 정체를 모르겠다.
에단이 물끄러미 그것들을 지켜보고 있자, 검은 형체들이 에단과 에르미온을 눈치챈 듯 고개를 획 돌렸다.
“우, 우리를 보는 건가?”
“지, 진짜야?!”
“살았다!”
검은 형체들이 에단과 에르미온을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에르미온이 인상을 팍 구기며 화염 마법을 시전하려 할 때, 에단이 손을 들었다.
“잠깐 기다려 봐.”
에단이 세계수의 목걸이를 만졌다. 불어넣은 마나에 반응한 세계수의 목걸이가 장막을 전개했다.
우웅―!
반투명하게 전개된 장막에 검은 형체들이 볼썽사납게 튕겨 나갔다.
“끄아악!”
“아악!”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진 형체들을 향해 에단이 뚜벅뚜벅 걸어갔다.
“……언데드 같은데?”
에단의 곁에 선 에르미온이 말했다. 에단이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언데드를 바라보며 쪼그려 앉았다.
‘학생들의 연애를 도와줄 녀석들이 여기 있네.’
쪼그려 앉은 에단이 자신들을 바라보자, 그들이 기회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인간 놈!”
빠악!
달려든 녀석 하나의 뒤통수를 후려친 에단이, 엎어져 있는 검은 형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뒈질래?”
에단이 사납게 노려보며 으름장을 놓자, 검은 형체들이 겁을 집어먹었다.
“히, 히익!”
그들이 하나둘씩 뒷걸음질을 치며 멀어졌다. 그 순간, 건물 쪽에서 다시금 괴성이 울려 퍼졌다.
“끄아아아악!”
쉴 대로 쉰 드레이의 목소리와 함께 강대한 신성력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후욱!
“끄아아악!”
“살려 줘!”
“죽고 싶지 않아!”
한층 더 흐릿해진 형체들이 아등바등했다.
‘이것 때문이군.’
에단이 황당한 웃음을 지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진짜 별의별 일이 다 있네.”
에르미온도 어이없다는 얼굴을 한 채 망령들을 지켜봤다.
“쟤네는 여기서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정확힌 모르겠는데, 지박령이라 이 근방에서 못 나가는 거 아니야?”
“그래? 아무튼 재밌는 구경하는군. 아, 쟤 소멸하려는 거 아니야?”
“오, 진짜네. 진귀한 구경을 하겠는데.”
한층 흐릿해진 모습.
그들이 에단과 에르미온 앞에 다가와 몸을 넙죽 엎드렸다.
“제, 제발 저희를 살려 주세요!”
“흑흑, 이대로 죽고 싶지 않습니다!”
망령들의 간곡한 애원에 에단이 눈을 끔뻑이다 입을 열었다.
“내가 왜?”
“흑흑…… 부, 부디…….”
“아까 우리를 보자마자 냅다 뛰어든 이유는 뭔데? 설마하니 뭐 빙의라도 할 생각이었던 건 아니지?”
“…….”
망령들이 입을 다물었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에 에단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뒈지면서 양심도 같이 죽었냐? 괘씸해서 안 되겠네. 내가 한 번 경험해 봐서 두 번은 안 당해 줄 생각이거든?”
― ……그 한 번이 나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페온의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한 에단이 몸을 일으킨 뒤 손을 털었다.
“에르미온, 얘네 죄다 태워 버려.”
“음, 좀 아깝긴 한데 어쩔 수 없지.”
에르미온이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왜 대답이 없는 거지?
페온의 공허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