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드래곤 (12)
탁. 탁. 탁.
1황자가 다리를 꼰 채 팔걸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이다.
대신들이 1황자의 눈치를 설설 살폈다.
이번 중앙회의는 본래의 목적과는 상반되는 결과가 나와 버렸다.
‘제기랄, 하필 그때 쓸데없는 곳에 가가지고는!’
여기 있는 이들 중 1황자의 성정을 모르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1황자는 정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다.
얼마나 오랜 기간을 함께해 왔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곧바로 목을 벨 위인이 바로 1황자였다.
잔혹하고 무자비한 폭군.
그것이 지금 1황자를 수식하는 문장.
‘폐하…….’
현 황제의 자애롭고 인정 많은 모습이 더없이 그리워졌다.
그가 황위에 앉아 실권을 쥐고 있을 때는 고민 많고 결단력 없는 모습에 답답함을 느꼈다.
‘폐하! 결단을 하셔야 할 때입니다!’
‘……신하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어찌 쉽게 결정하겠는가.’
‘…….’
그 당시에는 가슴을 두드릴 정도로 갑갑함을 느꼈다.
국민과 신하를 염려하는 성군의 모습이긴 했지만, 황제는 결국 책임지고 결단하는 자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 1황자의 모습을 보며 그 어느 때보다 현 황제가 그리워졌다.
1황자는 황제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이었다.
황위를 계승받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무수히 많은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 폭넓은 지식을 통해 국정을 수행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1황자에게는 재능이 있었고, 그건 지식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처음 검을 쥐고 검을 배울 때, 1황자는 검술 교사의 팔을 베었다.
황실을 충격에 휩싸였다.
이제 막 검을 배운 1황자가 상급의 마나 유저인 검술 교사의 팔을 베다니, 우연이라고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 일로 인해 1황자는 순식간에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전대미문의 재능, 1황자는 어린 나이 때부터 세력을 거느리기 시작했다.
점점 세력을 확장시킨 1황자는 황제의 권력까지 모두 흡수했다.
아직 황제 곁에 남아 있는 충심 깊은 신하들도 있었다. 하지만 1황자는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1황자를 알고 있는 자들은 그게 결코 자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재미, 또는 여흥.’
그것뿐이다.
1황자는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 있었지만, 뜻대로 흘러가는 일을 혐오한다.
예상을 벗어난 일들.
그것만이 1황자의 따분함과 권태로움을 해소시켜 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중앙회의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처음 느끼는군.’
이런 감정은 낯설었다.
툭. 툭. 툭.
팔걸이를 두드리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쳐졌다.
‘이런 것을 보고 동질감이라고 부르는 건가.’
에단 블란테.
자신과 같은 군주의 핏줄을 이은 자.
1황자는 수많은 귀족들과 왕족들을 봐 왔다. 그들은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음에도 우매하고 미련했다.
그들은 눈앞에 먹을 것만 탐하는 가축이나 다름없었다.
1황자가 곁에 있는 대신들을 훑어봤다. 그들이 겁을 집어먹은 채 더욱 고개를 깊게 숙였다.
‘역겹군.’
토악질이 쏠렸다. 짙은 권태를 느낀다. 흥미가 생기는 일이 도통 없었다.
그러던 와중, 블란테의 소식을 들었다. 꽤나 흥미로운 짓들을 저지르고 있었다.
레벨린을 몰아내고 아카데미를 장악, 유명무실한 꼭두각시에 불과한 2황자를 세력으로 삼음.
‘그사이에 저놈들의 목줄을 움켜쥐고.’
마탑의 탑주인 에르미온을 대동하며 자신의 세력을 과시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이 펼쳐 놓은 판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블란테의 차남에게 묘한 흥미가 느껴졌다.
처음에는 블란테 전체의 행동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오늘 에단을 직접 마주한 이후 생각이 달라졌다.
‘그 녀석이 벌인 짓인가.’
마주한 시선,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과 동류였다.
눈 속에 잠재되어 있는 권태와 따분함.
재밌었다. 자신을 앞에 두고도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마스터의 경지라.’
마스터의 경지.
에단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를 가지고 있었다.
‘나를 제외하면 처음 보는군.’
씨익.
1황자가 미소 지었다. 섬뜩하기 그지없는 웃음에 주변인들이 겁에 질린 채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래도 시험을 해 보지 못하면 아쉽겠지.’
1황자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기사단장은 1황자가 자신을 호출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는 재빠르게 1황자가에게 다가섰다.
“쓸 만한 애들로 모아 봐.”
“……알겠습니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1황자의 말이 곧 율법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기사라는 것만 드러나지 않게. 알겠지?”
“…….”
기사단장은 대답 대신 경례를 갖췄다.
* * *
“벌써 날이 저물었군.”
지금 시간에 게이트를 이용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추가적인 요금이 조금 붙을 뿐이고, 그들에게 부담되는 액수는 아니었다.
‘급할 것은 없으니.’
어차피 일찍 돌아가 봤자 시간은 남는다. 여기서 시간을 때우나, 일찍 돌아가나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에단이 적당한 여관방을 잡고는 밖으로 나가자, 에르미온이 에단을 불렀다.
“……야.”
“왜?”
“어디 가게.”
“밥 먹으러. 이젠 너 혼자 다녀도 되니까 알아서 해.”
“……어디 갈 건데.”
에르미온의 묘한 표정을 눈치챈 에단이 피식 웃었다.
“그게 왜 궁금한데.”
“……이익!”
에르미온이 상기된 얼굴로 성을 냈다. 몇 번 더 골려 줄까 하던 에단이 앞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어제 갔던데 또 갈 거니까 따라오려면 따라와.”
“…….”
에단의 말에 입꼬리가 꿈틀거린 에르미온이 에단의 뒤를 따랐다.
덜컥.
에단이 낡은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의 소년 종업원이 에단을 보며 환한 미소를 띠웠다.
“어! 또 오셨네요!”
“그래.”
“어서 오세요! 편하신 자리에 앉으세요!”
에단이 주위를 바라봤다.
어제 왔을 때는 별 고민 없이 아무 자리에 앉았지만, 오늘은 조금 생각에 잠겼다.
“……뭐 해? 어서 앉지 않고.”
“조금 기다려. 뭐가 그렇게 급해?”
“…….”
에르미온이 에단을 찌릿 노려봤다. 에단은 아랑곳하지 않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기쯤인가.’
에단이 터벅터벅 걸어가, 구석에 있는 자리를 바라봤다. 자리에 앉아 보니 책에서 보던 느낌과 얼추 유사한 느낌이 들었다.
깊게 기억하고 있지도 않던, 불친절한 책의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향수가 느껴졌다.
“어, 여기에 앉으셨네요? 여기는 손님도 잘 앉지 않는 장소인데.”
“그냥 앉아 봤어.”
“금방 치워 드릴게요!”
소년 종업원이 헝겊을 가지고 와서 테이블을 닦아 냈다.
“하하, 먼지가 좀 많죠? 이 자리가 워낙 손님이 잘 앉지를 않아서…… 죄송합니다.”
소년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지만, 에단은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테이블은 확실히 사람의 손을 많이 타지 않았는지 먼지가 쌓여 있었다.
소년이 능숙한 손길로 오래된 나무 테이블의 먼지를 슥슥 닦아 냈다.
“그럼 금방 준비해 드릴게요!”
소년이 후다닥 주방으로 사라졌다. 에르미온이 묘한 눈초리로 에단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보고 있어?”
“왜 굳이 여길 앉은 건데?”
“말했잖아. 별 의미는 없다고.”
에단이 테이블을 매만졌다. 소설 주인공이 자주 오던 식당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울고, 웃고, 고민하고, 기뻐했다. 때로는 동료와 다투고, 때로는 동료와 울고 웃으며 회포를 풀어 왔다.
자신이 겪지 않은, 제삼자의 시점으로 겪은 내용이다.
에단이 묘한 감상을 가진 채 테이블을 만졌다.
그 순간 에단의 표정이 굳었다.
“……왜 그래?”
에단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에르미온이 물었다. 하지만 굳은 에단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에단은 테이블 중앙쯤에 위치한 묘한 흔적을 응시하고 있었다.
“……종업원.”
에단이 부름에 주방에 있던 소년이 고개를 내밀었다.
“필요한 것이라도 있으신가요?”
“……이 상처는 누가 낸 거지?”
에단이 테이블의 중앙쯤에 위치한, 꽤나 깊게 파인 흔적을 바라보며 물었다.
소년은 에단이 가리킨 흔적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어라? 이거 언제 생긴 거지? 또 어떤 주정뱅이가 이랬나? 아씨, 이거 사장님한테 들키면 엄청 혼날 텐데……. 손님, 서비스 많이 드릴 테니까 비밀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소년의 모습을 보며 에단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우선 맥주부터 가져다드릴게요!”
소년은 그렇게 자리를 떴고, 에르미온은 묘한 눈초리로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동안 봐 왔던 에단의 모습과는 꽤나 상반되었다.
에단의 시선은 여전히 테이블 중앙에 새겨진 흔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누가 날붙이를 통해 고의적으로 파낸 것 같은 상처였다.
‘……허.’
우연인가?
우연일 수도 있다. 이런 식당의 특성상 별의별 종류의 손님들이 들어오고, 그들이 테이블이나 의자를 손상시키는 일은 비일비재할 테니까.
하지만 에단의 감이 말해 주고 있다.
테이블의 중앙에 자리한 검흔.
눈에는 띄지만 깊지는 않은 상처였다.
처음으로 동료를 잃고,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좌절한 주인공이 낸 결단이자 흔적이다.
이건 에단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녀석은 없어.’
아카데미와 세계수.
큰 사건이 일어나는 두 장소 속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었다.
또 다른 누군가가 테이블 중앙에 검을 꽂아 넣는 일이야, 고주망태가 된 용병들이라 가정한다면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아니야.’
그건 너무 형편 좋은 생각이다. 에단의 감은 이 흔적이 녀석의 것이라 말해 주고 있었다.
그때 소년 종업원이 맥주잔을 양손에 가득 들고 오더니 테이블에 쿵 하고 내려놨다.
“이건, 비밀입니다.”
한쪽 눈을 찡긋 깜박인 소년이 그대로 사라졌다.
“……이게 비밀 유지가 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던 에르미이온이 맥주잔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에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르미온이 맥주잔에 손을 가져갔다.
“나 먼저 마신다?”
이제 인내심이 한계에 가까웠다.
에르미온이 맥주잔에 입을 가져가려던 그 순간.
쾅!
문이 벌컥 열렸다.
그러고는 복면을 쓴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문이 열리는 순간, 손님이 온 것이라 생각하고 나온 소년이 얼어붙었다.
“……어?”
괴한들이 문을 닫고 칼을 꺼내 들었다.
소년은 흘러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좁은 식당 안에 넘치는 살기에 소년의 다리가 벌벌 떨렸다.
“막스! 무슨 소란이야!”
주방 안쪽에서 주인장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때 검을 든 괴한이 뛰어들려 검을 뽑아 들었다.
“이 새끼들이 지금 정신 나갔냐?”
에르미온의 노기 가득한 목소리가 식당 안을 가득 채웠다.
화르르륵!
불길이 피어올랐다.
그녀의 성향을 대변하는 화염같이 붉은 마나였다. 괴한들의 몸이 일제히 굳었다.
“한 발짝만 움직여 봐. 잿더미도 안 남길 테니까.”
에르미온이 괴한들을 향해 사나운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