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드래곤 (11)
‘이상한 게 자꾸 꼬이네.’
에단이 눈살을 찌푸렸다. 1황자가 흥미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1황자라는 존재.
알고는 있었으나, 직접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다.
‘정신 나간 새끼.’
1황자는 순식간에 제국의 실권을 쥐고, 대륙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취했다.
모든 것이 황위 계승 이전에 벌인 일.
‘단순한 재미 때문에.’
1황자가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 않고, 아직 황자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건 아주 간단한 이유였다.
단순한 유흥.
그에게는 권력과 권위보다도 재미가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니까 이 지랄을 벌여 놨지.’
자기 혼자 제정신이 아니었으면 상관이 없었으나, 1황자의 여흥은 대륙 전체에 피해를 끼쳤다.
‘글로 읽을 때는 상관없었지만.’
그 피해가 자신에게까지 닿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에단이 팔장을 꼈다. 턱을 치켜세운 뒤, 삐딱한 자세로 1황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길한 정적이 장내에 맴돌았다.
아무리 블란테라고 한들, 대륙의 고위 인사들이 모두 모여 있는 이런 자리에서 저런 행태를 보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지금 이게 무슨 행태요!”
한 귀족이 포문을 열었다.
이렇게 한마디를 던지면 중앙 회의에 있는 다른 귀족들이나 왕족들이 지지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침묵만이 감돌았고, 에단의 삐딱한 자세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귀족은 예상과 다른 분위기에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눈치를 살폈다.
‘뭐, 뭐야? 왜 다들 앉아 있어?’
노괴들이 득시글거리는 중앙계에서 구른 짬밥이 몇 년인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파악한 귀족이 은근슬쩍 자리에 앉으려 들었다.
그 순간 에단이 입을 열었다.
“어딜 앉으려고.”
“…….”
“무슨 행태냐고? 바빠 죽겠는 사람 오라 가라 하는 건 말이 되고?”
“비, 빈센트 가주가 직접 온 것도 아니고, 차남 주제에 뭐가 바쁘다고…….”
귀족은 지지 않기 위해 애써 말끝을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거기에 굴할 에단이 아니었다.
“아, 짜증나게 하네. 내가 왜 바빴는지 알려 줘?”
에단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가만히 에단의 눈치를 살피던 다른 귀족들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블란테의 가주까지 언급한 것은 과한 처사 같소.”
“동감이오. 아무리 블란테의 행동이 도가 넘었다고 한들…….”
한 왕족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입을 틀어막았다. 에단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입을 틀어막은 왕족을 지그시 바라봤다.
‘제, 제기랄! 입이 방정이지!’
“흐음, 도가 넘었구나…… 그렇구나…….”
“내, 내가 말실수를 한 것 같소.”
“아니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내가 왜 바빴는지 설명해 줄까? 얘기를 들으면 좀 이해를 해 줄 것 같아서.”
“그거 궁금하군.”
턱을 괸 채 돌아가는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1황자가 말하자, 귀족과 왕족들의 표정이 굳었다.
에단이 1황자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궁금해?”
에단과 1황자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얼굴이 굳기 시작했다. 1황자가 힐긋 귀족들을 바라봤다.
‘뭔가가 있긴 하군.’
블란테의 눈치를 살필 이유가 없는 이들이다. 그런 그들이 지금 약점을 잡힌 것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 꽤나 궁금하군.”
“그럼 말 안 할래.”
“……뭐라고?”
“궁금하다며. 너 좋은 일 시켜 주고 싶지는 않거든.”
에단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귀족들은 경악과 안도가 뒤섞인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아직 일러.’
아직 과실이 무르익지 않았다. 수확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제일 거슬리는 놈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경계의 대상. 그걸로 족하다.
서로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그 순간이 적기였다.
에단을 응시하던 1황자의 이마에 주름이 한 줄 그어졌다.
“흠, 이유를 묻고 싶은데.”
“여기 대우가 꽤나 안 좋더라고. 들었어? 기껏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문전 박대당한 거.”
“아, 그것 때문인가? 그거라면 사과하지. 사과의 의미로는 뭐하지만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어.”
1황자가 손가락을 까닥하자, 문이 열렸다. 에단이 몸을 돌렸다.
문밖에서 익숙한 얼굴이 벌벌 떨면서 끌려왔다.
손에는 족쇄가,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는 완전히 죄수의 상태였다.
“이자들이 너에게 실수를 범했다지?”
바들바들.
1황자의 말에 병사들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끌려온 자들은 셋이었다. 개중에는 애단이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병사들의 관리를 못 한 관리자의 책임도 있겠지.”
1황자가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침묵했다. 1황자가 묶여 있는 이들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들은 무언가 항변하듯 발버둥 치다 결국 잠잠해졌다.
묶여 있는 이들이 애원하는 눈빛으로 1황자를 바라봤다.
하지만 1황자의 눈을 본 이들은 결국 체념하고 말았다. 1황자가 손을 내밀었다. 그들을 이끌고 온 기사가 1황자에게 자신의 검을 내줬다.
1황자가 휘두른 검에 순식간에 세 개의 목이 공중에 떠올랐다.
촤악!
머리를 잃은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1황자는 기뻐하지도, 광기에 젖지도 않았다.
피가 묻지 않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벌린 뒤,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피가 튄 자신의 얼굴을 닦아 냈다.
일련의 과정을 끝낸 1황자가 이내 에단을 바라봤다.
“이제 좀 마음이 풀렸나 모르겠군.”
“허.”
에단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완전히 미친놈이네.’
예상을 뛰어넘는 모습이다.
황당하다는 얼굴을 한 에단과 1황자가 서로를 마주봤다.
‘어떻게 할까…….’
뒤집어엎어?
1황자와의 거리는 가까웠다. 그 순간 문밖에서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했다.
하얀 사제복을 입은 남자와 갑옷을 걸치고 있는 남자.
그들은 눈앞에 참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 알렉스랑 라오나드가 아닌가. 꽤나 늦었군.”
“늦어서 송구합니다.”
둘이 가벼운 목례를 취했다. 튀어 나가려던 에단이 마음을 접었다.
― 잘 선택했다. 상대할 수 없는 놈들이야.
페온이 말하지 않았어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상대였다.
둘은 마스터였다.
‘알렉스와 라오나드라.’
카이제르의 주인과 신성 왕국의 성전사장.
대륙에 위명을 떨치는 두 전사의 등장이었다.
그들이 에단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자 1황자가 입을 열었다.
“아, 소개가 늦었군. 블란테에서 온 손님이야.”
“에단.”
에단이 짧막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알렉스와 라오나드가 가늘게 뜬 눈으로 에단을 응시했다.
― 수준을 가늠하고 있다.
‘알고 있습니다.’
에단은 자신의 힘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묘한 시선으로 에단을 바라보다가 1황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회의는 어떻게 된 것이죠?”
“아, 그것 말인가.”
1황자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상황도 이렇게 된 김에 딱딱한 회의는 여기까지 하고, 환영회를 열 생각인데.”
1황자가 에단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참여를 강제하는 시선이다.
그러나 에단은 1황자의 장단에 맞춰 줄 생각은 없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빠져야 할 것 같은데?”
“호오, 내 호의를 무시하는 건가?”
“그것도 맞고, 선약이 있어서 말이야.”
에단과 1황자가 눈싸움을 하듯 서로를 마주 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1황자였다.
“예상외의 인물과 함께 왔더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에르미온을 지목하면서 떠보는 말에 에단이 히죽 웃었다.
1황자가 묘한 눈초리로 에단을 훑어보다 말했다.
“아쉽지만 환영회는 다음으로 미뤄야겠군. 다음번 초대 때는 꼭 참여해 줬으면 하는데.”
“흠.”
에단이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다 입을 열었다.
“상황 봐서.”
“……하하.”
1황자의 입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꼭 볼 수 있으면 좋겠군.”
“난 별로.”
너랑 더 있으면 피곤할 것 같아서.
* * *
에르미온은 방 안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꽤나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탑의 탑주로서의 일상은 꽤나 정적이고 지루했으니까.
그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가지.”
에단의 목소리에 찌뿌둥한 몸을 일으킨 에르미온이 피식 웃으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지금 나간다.”
에르미온과 에단이 황실을 나섰다.
유의미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으나, 손해를 본 것도 아니다.
본래 이 자리는 블란테를 소환해 문책하고 추궁하는 자리였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카데미의 환수였다.
하지만 에단은 그들의 목줄을 움켜쥐고 있었고, 이번 회담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완벽한 해결은 아니지만.’
보류에는 성공했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준비를 철저히 해야만 했다.
‘협력 관계라는 걸 대놓고 보여 주는군.’
제국, 카이제르, 신성 왕국.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대놓고 보여 줄은 몰랐다.
‘그럼 이쪽도 본보기를 보여 줘야지.’
손을 잡을 수 있는 건 제국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생각이다.
* * *
에밀라에게는 많은 시간적 여유가 생겨났다.
그녀의 과목은 검술.
하지만 블란테의 등장으로 에밀라의 중요도는 많이 낮아졌다.
생활은 여유로워졌지만, 묘한 씁쓸함도 동시에 느껴졌다. 에밀라 또한 블란테의 검술과 훈련방식을 배우는 입장이었다.
엄청난 시간과 수많은 시행착오를 걸쳐 가며 쌓아 올린 지식이었다.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깨달음과 도움을 얻었다.
‘……부족해.’
하지만 에밀라는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힘의 대한 갈망을 이렇게나 느낀 적이 없었다.
기재라고 칭송받던 에밀라였지만,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 알고 있었다.
학생들 앞에서도 에단 앞에서도 무력했다.
본인의 가치를 증명해 내지 못한 그녀는 스스로에게 회의감이 들었다.
에밀라는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네이드를 찾아갔다.
단정하고 인자한 분위기를 풍기는 노신사.
그게 네이드에게 느낀 감상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는 손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에밀라는 네이드가 부른 곳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끼이익.
노후된 경첩에서 듣기 싫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은 쓰지 않는 폐쇄된 강당이었다.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등에서 소름이 질주한 에밀라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며 주위를 경계했다.
‘……뭐지?’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본능이 경고했다. 곧장 기감을 퍼트렸음에도 잡히는 것은 없었다.
“감은 좋군요.”
그 순간 에밀라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밀라가 재빠르게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휘두른 검은 허공을 갈랐다.
몸을 돌린 에밀라의 눈앞에 네이드가 서 있었다.
분명 바로 뒤편에서 느껴진 음성이었지만, 네이드와 그녀의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반갑습니다.”
네이드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 모습에 오싹함을 느낀 에밀라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