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화] 드래곤 (10)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낸 에단이 식당을 나섰다. 식당을 나선 에단이 묘한 눈초리로 허름한 간판을 바라보다 발을 옮겼다.
“으으으…….”
에르미온이 휘청거리며 에단의 뒤를 따라왔다. 그녀를 바라보는 에단의 눈빛에는 한심함이 가득했다.
“맥주 한 잔 마시고 취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래서 불만이냐?”
“뭐 주독을 날리는 마법이나 그런 건 없어?”
“그럴 거면 술을 뭐 하러 마셔?”
“오, 주당 납셨군.”
티격태격하며 걷기 시작하자 어느새 황성의 입구까지 도착했다. 엄중한 분위기의 병사들이 입구 앞에 서 있었다.
에단과 에르미온이 그들 앞에 다가가자 그들이 앞을 막아섰다.
“정지, 신원과 용무를 밝히도록.”
“뭐어∼? 신워어언?”
뭐가 심기에 거슬렸는지 에르미온이 삐딱한 눈초리로 병사를 째려봤다.
비틀거리는 건지, 건들거리는 건지 알기 힘든 몸짓으로, 병사 앞까지 다가간 에르미온이 머리를 병사에 가슴팍에 처박았다.
“야, 너 내가 우습냐?”
“…….”
병사의 얼굴에 불쾌감이 서렸다.
에르미온의 얼굴과 몸에서 풍기는 술기운을 느낀 병사의 인상이 구겨졌다.
두 경비병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라. 여기는 너희 같은 주정뱅이 따위가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병사 하나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경고를 들은 에르미온이 병사를 멀뚱멀뚱 응시했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하냐? 지금 해보자는…….”
그 순간 에단이 에르미온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보자, 에단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얘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거든? 감안하고 적당히 들여보내 줘.”
에단의 당당한 태도에 병사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정신이 아닌 건 너도 마찬가지 같은데? 허튼소리 그만하고 돌아가라. 다음에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아, 그래?”
에단의 볼이 꿈틀거렸다.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병사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나도 여기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고, 불러서 온 거거든? 지금 너희 주관으로 돌려보내면 후회할 텐데.”
“허, 후회?”
병사가 코웃음을 치며 에단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아무리 뜯어봐도 특출 난 곳 하나 없어 보이는 외향이다.
병사가 매서운 눈초리로 에단을 노려봤다.
“아무리 봐도 후회할 일은 없을 것 같군. 빨리 꺼져라.”
“그래? 그럼 이제 나는 모른다.”
에단이 그렇게 몸을 돌리자, 에르미온이 짜증 어린 표정을 지은 채 에단을 향해 말했다.
“지금 장난해?”
“왜, 쟤네들이 꺼지라고 하잖아. 난 여기까지 찾아왔고. 책임은 쟤들이 지겠지.”
에단의 말에 에르미온이 병사들을 힐긋 바라봤다. 에단의 의도는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미치도록 아까웠다.
‘귀찮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에르미온이 품에서 탑주의 명패를 꺼내 던졌다.
홱!
명패를 낚아챈 병사가 ‘이게 뭐 하는 짓거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에르미온을 노려봤다.
“윗선에 전해.”
매섭게 경고한 에르미온이 몸을 돌려 에단을 따라갔다. 멀어지는 둘을 바라보던 병사가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별의별 일을 다 겪는군.”
“그러니까 말이야. 겁대가리 없는 놈들. 좀 혼내 줄 걸 그랬나?”
“아서라. 괜히 소란 일으키면 우리만 손해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뭘 던진 거야?”
“나도 몰라.”
병사가 명패를 확인했다. 꽤나 고급스러운 명패의 중심부에는 화려한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
명패를 바라보던 병사가 입을 다물었다.
불쾌한 정적이 맴돌았다. 느낌이 싸했다. 일개 주정뱅이가 들고 있는 명패라기에는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겠지?”
불길함을 느낀 병사 하나가 정적을 깨트렸다. 명패를 들고 있는 병사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 * *
말없이 걷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기는.”
“시간 없다고 할 때는 언제고 아주 살판났어.”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결국 정치란 명분 싸움이다.
에단이 쥐고 있는 게 적지 않았지만, 지금 시기에 이걸 터트리는 건 시기상조다.
‘적기는 따로 있지.’
지금은 어차피 시간 끌기에 불과하다. 지금 소환되어 봤자 자신을 향해 같잖은 추궁만 해댈 것이 분명했다.
‘소문은 들었을 테고.’
보는 눈이 많았다.
철저하게 입단속을 한 것도 아니니, 2황자와 블란테가 협력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 사람은 알고 있을 터.
견제가 시작될 것이다.
싹이 커지지 전에 밟아야 하니까.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커서 문제지만.’
에단이 피식 웃었다. 블란테는 쉽게 밟을 수도, 견제하기도 버거운 상대다.
심지어 블란테의 군사의 일부는 이미 대륙의 중심부인 아카데미에 자리를 잡았다. 제국 입장에서는 껄끄러운 상태였다.
‘보나 마나 지랄들을 할 게 빤한데.’
생각만 해도 귀찮았다. 귀찮은 건 질색이다.
그런 와중에 상대가 먼저 문전 박대를 했으니 에단의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다시 가야 하긴 하겠지만.’
상대를 곤란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크게 만족스러웠다.
* * *
한참을 고민하던 병사들은 결국 보고를 하기로 결심했다.
‘별일 아닐 거야.’
스스로는 그렇게 되뇌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갑자기 여긴 무슨 일이지?”
지휘관의 물음에 병사가 경례하며 예를 갖췄다.
“……보고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병사는 일련의 상황들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자신의 대처가 정당하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그들의 행색과 태도도 하나하나 설명했다.
“그런 쓸데없는 보고를 하려고 나를 찾아온 건가?”
지휘관이 미간을 좁혔다.
그는 시답잖은 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지휘관의 태도에 작게 안도한 병사가 들고 있던 명패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이게 방금 설명한…….”
건넨 명패를 무심하게 받아 든 지휘관이 명패를 확인했다.
“또 무슨 쓸데없는…….”
귀찮다는 기색으로 중얼거리던 지휘관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휘관님.”
병사의 부름에도 지휘관은 반응하지 않았다.
급작스러운 지휘관의 모습에 초조함을 느낀 병사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굳어 있던 지휘관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갔다.
“다, 당장 모셔와!”
그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 * *
에단과 에르미온은 본의 아니게 도시를 관광하기 시작했다.
여유롭게 도시를 거닐고 있자 오히려 불안감을 느낀 것은 에르미온이었다.
“……지금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
“안 될 건 뭐가 있어. 꺼지라고 한 건 쟤네들인데.”
“……나도 모르겠다.”
에르미온이 체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
‘……별로 볼 것도 없고만.’
대마법사인 그녀의 성에 차는 물건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가로이 길을 거닐던 와중에 멀리서 병사 무리가 다급하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왔네.”
“그러게.”
에단과 에르미온은 올 게 왔다는 듯 병사 무리를 바라봤다. 뛰어온 병사들이 거친 호흡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에단과 에르미온의 앞에 섰다.
“……모시러 왔습니다.”
“어디로?”
에단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병사의 눈이 갈 곳을 잃은 것처럼 흔들렸다.
“이, 이전의 결례는 사죄드리겠습니다. 워낙 이런 일들이 빈번해서…….”
“흐음.”
안절부절못하는 병사를 위아래로 훑어본 에단이 잠시 고민했다.
‘어쩔까.’
몇 차례 더 골려 줄까 고민하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이번만 봐 준다.”
시간이 아까워서 봐줬다.
* * *
병사가 십년감수한 얼굴로 에단과 에르미온을 이끌고 황성으로 향했다.
황성의 입구부터는 병사가 아닌, 단정한 정복을 입은 사용인들이 에단과 에르미온을 안내했다.
“혹시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신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블란테에서 왔어. 여기서 불러서.”
“…….”
사용인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바, 방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황급하게 방을 안내한 사용인은 어딘가를 향해 부리나케 뛰어갔다.
‘내가 누군지는 지금 알았나 보군.’
에르미온이 전한 명패는 본인의 신분만 증명할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에단을 찌릿 노려본 에르미온이 자신의 객실로 들어갔다. 에르미온의 반응에 어깨를 으쓱거린 에단도 본인의 방으로 향했다.
“구조는 거의 비슷하네.”
칼베리안의 방과 구조가 거의 흡사했다.
손님용 방과 황자의 방이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정말 허울뿐인 신분인구만.’
에단이 침대에 드러누웠다.
* * *
에단이 기사의 안내를 받아 황실의 내부를 거닐고 있었다. 복도를 거닐던 에단의 눈에 수리가 한창인 방 하나가 보였다.
칼베리안이 지내던 방이었다.
“저긴 왜 저러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쯧쯧, 보안이 형편없네.”
에단이 혀를 차며 말했다. 말에 내포된 의미가 비아냥이라는 것을 눈치챈 기사가 입을 다문 채 걸었다.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기사의 말에 에단이 고민 없이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며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재판장을 연상케 하는 공간이었다. 에단이 거침없이 마련된 단상의 위에 올랐다.
“익숙한 얼굴들이구만.”
에단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에단의 말은 모든 이의 귓속에 들어갔다. 몇몇 귀족과 왕족들의 몸이 움찔거렸다.
“큼, 크흠!”
그들이 헛기침을 내뱉는 걸 들으며 에단이 주위를 둘러봤다.
‘아주 꼬라지가 가관이구나.’
주위를 둘러보던 에단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금발 벽안.
칼베리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나른함과 권태로움, 그 사이에 포악한 기세가 넘실거리는 사내였다.
‘저게 1황자인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자가 바로 1황자다.
에단과 1황자의 시선이 교차했다. 에단이 씨익 미소 지었다.
“…….”
의자에 누워 있듯이 걸터앉아 있던 1황자가 몸을 일으켰다. 나른해 보이던 표정이 달라졌다.
“……네가 에단인가?”
1황자가 에단을 향해 물었다. 정적이 가라앉았다. 1황자가 말할 때는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어, 내가 에단이야.”
에단이 곧바로 대답했다.
“……!”
귀족과 왕족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누구도 1황자에게는 저런 태도를 보이지 못한다.
“…….”
1황자가 에단을 지그시 바라봤다. 에단은 1황자의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면 어쩔 건데.’
에단은 자신 있었다.
1황자는 위험한 인물이다. ‘지하’에 도사리는 규격 외의 존재들을 제외하면 메인 빌런급이다.
‘근데 그게 뭐.’
에단은 물러나지 않았다. 자신의 뒤에는 블란테가 도사리고 있었다.
에단은 지금 블란테의 대리인으로 이 자리에 출석한 것이다.
“그럼 네가 1황자냐.”
에단의 돌발 행동에 몇몇 인사들이 헛숨을 들이마셨다. 그들이 흔들리는 동공으로 1황자의 분위기를 살폈다.
“……큭큭, 듣던 대로 재밌는 녀석이군. 그래, 내가 1황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