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화] 드래곤 (9)
에르미온이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와 함께 선이 그어지며 수많은 선들이 되었고, 그것들은 하나가 되어 이내 바닥에 새겨졌다.
‘제기랄. 어쩌다가 이러고 앉았는지.’
에르미온이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마법진을 만드는 것은 꽤나 고된 노동이다. 손도, 품도 많이 든다. 본래라면 여러 마법사들이 모여서 긴 시간에 걸쳐 하는 작업이다.
‘나니까 이럴 수 있는 거지!’
그런데 저 건방지기 그지없는 녀석은 심드렁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울화가 치밀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렇다고 자기 입으로 구차하게 설명을 늘여 놓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고, 내 팔자야.’
고생은 더럽게 하면서 인정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진짜 뭐지?’
애당초 마법진을 만들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에단이 만들어 낸 매개체 때문이다.
마법진을 가동시키는 매개체.
저건 일개 개인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직접 확인해 보니 품질도 엄청났다. 잠재되어 있는 마나의 양도 적지 않았고, 마나의 성질 또한 정순했다.
‘뭔가 이질적이기는 하지만.’
평범한 마나가 아니었다.
언데드나 몬스터에게서 풍기는 불쾌하고 어두운 마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인 마나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혼탁하지는 않으니.’
더욱더 알 수가 없었다. 마법사로서의 호기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봐야겠어.’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하던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렇게 에르미온이 한창 집중하고 있을 때, 멀리서 누군가가 뛰어왔다.
“허억, 허억!”
거친 호흡을 내쉬며 뛰어온 남자는 바로 크러쉬였다. 에단이 숨을 헐떡이는 크러쉬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반면 크러쉬는 에단은 보지도 못했는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에르미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저 머저리는.’
에르미온은 집중을 하고 있었음에도 크러쉬의 수준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저열한 수준, 낮은 자질, 혼탁한 마나.
무엇 하나 칭찬할 점이 없었다.
“오오오! 역시 홍염의 관장자!”
크러쉬가 감격 어린 목소리로 에르미온을 찬양했다. 순간 에르미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재능 있는 녀석인데.’
에르미온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드디어 뭔가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작업이 거의 끝에 다다랐다. 에르미온이 마지막 집중을 다하며 마법진을 지면에 각인시켰다.
“후우.”
에르미온이 깊은 숨을 내뱉었다. 웅장한 마법진이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그녀가 거만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됐지?”
“흠, 확실히 대마법사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수준이군.”
처음에는 심드렁하던 에단은 일련의 과정이 끝나자, 감탄 어린 표정을 지으며 몇 차례 박수를 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마법에 관해서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에단이 봐도 경탄스러운 광경이었다.
에단의 반응에 에르미온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내 가치를 조금이나마 알아보는군.’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다. 그때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에르미온이 고개를 돌렸다.
크러쉬가 긴장 가득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며 에르미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훗, 귀여운 꼬맹이군.’
저런 동경 어린 시선은 낯설지 않았다.
에르미온이 크러쉬를 위해 한마디 말을 전하려 하자, 에단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가 볼까?”
“……뭐?”
“시간이 좀 아깝거든.”
이제는 제국으로 가야 할 때다.
* * *
“……좌표는 내가 임의로 설정한다.”
에르미온이 똥 씹은 표정으로 말했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뭐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
볼 기회가 드문 진귀한 광경이라고 여겼는지, 이번에도 꽤나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그제야 에단의 눈에 크러쉬가 들어왔다.
크러쉬가 얼빠진 얼굴로 멍하니 서 있자, 에단이 손을 들었다.
“어이, 크러쉬!”
“어, 어?”
정신을 차린 크러쉬가 에단을 응시했다. 에단이 크러쉬를 향해 소리쳤다.
“앞으로 마법진은 네가 담당해라!”
“……뭐라고?”
크러쉬가 눈을 끔뻑였다. 지금 에단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충 눈치껏 행동하라 이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마법진이 가동되었다. 익숙한 마나의 파동이 일어나며 에단과 에르미온이 자취를 감췄다.
그때 인파를 가르며 에밀라가 뛰어왔다.
에밀라의 흔들리는 동공은 허공에 맴돌았다. 가동이 끝난 마법진에는 먼지 한 톨 남아 있지 않았다.
“어, 에밀라 씨? 여긴 무슨 일로…….”
크러쉬가 갑자기 뛰어온 에밀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에밀라는 크러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몸을 돌렸다.
“……그냥 한번 와 봤습니다.”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에밀라가 터덜터덜 돌아 나갔다.
‘내가 약해서인가.’
에밀라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이었다. 보드랍고 가녀린 손과는 거리가 먼, 전사의 손이다.
‘강해진다면…….’
힘에 욕심을 가진 적은 없다. 강한 힘이란 결국 누군가의 피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어쌔신일 때의 그녀와 검술 교수로서의 그녀.
실력에 부족함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그 생각이 바뀌었다.
‘부족해.’
욕심이 들었다. 힘에 대한 갈망이 치밀었다.
에밀라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블란테의 집사.
‘……찾아가 봐야겠어.’
에밀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 * *
전이가 완료되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기분은 별로네.”
“……해 줘도 지랄이네.”
에르미온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한 에단이 주위를 둘러봤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다. 낮에 보는 제도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이윽고 게이트를 통제하는 마법사와 기사들이 다가왔다.
“신분 확인 절차가 있겠습니다.”
“……귀찮아 죽겠네.”
에르미온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에르미온이 건넨 것을 받아 든 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지?”
“뭐길래…….”
곁에 있던 마법사가 고개를 내밀어 기사가 쥐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 순간 마법사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호, 홍염의…….”
“시끄러우니까. 거기까지 해.”
에르미온이 사나운 눈초리로 청년 마법사를 바라보자, 마법사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는 애는 내 일행이거든? 대충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지?”
“그, 그렇습니다! 즐거운 여행되시길 바랍니다!”
“놀러 온 거 아니거든?”
쌍심지를 치켜세운 에르미온이 걸어 나갔다. 에단이 자연스럽게 그 뒤를 뒤따랐다.
“이건 의외네.”
“뭐가.”
“신원 보증인까지 자처해 줄 줄이야.”
에단의 말에 에르미온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착각하지 말지? 일이 귀찮아질까 봐 그런 거니까.”
“삐딱하기는.”
에단이 피식 웃으며 도시를 둘러봤다. 정돈된 도시의 길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묘하게 이질적이군.’
여타의 도시와는 다르게 특이한 점이 있었다. 모든 도시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기 마련.
하지만 이곳은 거지나 부랑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골목길을 봐도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성향이 확고하다 이건가.’
작정하고 슬럼가를 찾아다닌 것은 아니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에단이 알고 있는 1황자의 성향이라면 슬럼가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행인의 얼굴에도 긴장이 감돌고.’
무언가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에단이 느끼는 이질적인 감각이 여기서 드러나는 것 같았다.
‘지금도 이 지경이면 황위를 계승받게 되면 더 심하겠군.’
에단이 대충 도시를 둘러보며 거리를 거닐다가 대뜸 멈춰 섰다.
“잠깐.”
“……뭐야?”
“밥이나 먹고 가지.”
에단이 식당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 * *
“진짜 어이없다, 너.”
에르미온이 기막힌 얼굴로 에단을 응시했다. 에단은 태연자약하게 종업원을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계피를 넣은 흑맥주 하나……. 음, 너 맥주는 마시나?”
에단의 물음에 에르미온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럼 너 혼자 먹으려고 했냐? 장난해?”
“좋아. 흑맥주 두 개. 거기에 흠…… 소시지도 가져다줘.”
에단에게 주문을 받고 있던 소년이 눈을 끔뻑였다.
“혹시 저희 식당에 오신 적 있으신가요?”
“아니, 이번이 처음이야.”
“……이상하다. 처음 오시는 손님은 모르는 메뉴인데.”
“들은 게 있어서 한번 와 봤다.”
에단이 품에서 은화 한 닢을 꺼내 소년에게 건넸다.
“……앗.”
자연스럽게 동전을 받아 든 소년은 동전이 은화임을 확인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알지? 치즈 많이.”
“……너무 많은데.”
“남은 건 가져. 자주 올 테니까 이제 기억하고 있고.”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적거린 에단을 보며 그제야 품 안에 은화를 집어넣은 소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제대로 준비해서 드릴게요!”
소년이 후다닥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에르미온은 자연스럽게 주문을 마친 에단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뭐야?”
“뭐가. 음식 주문하는 거 처음 봐?”
“보니까 여길 와 본 것 같지도 않은데, 뭐가 그렇게 익숙해?”
“말했잖아. 들은 게 있다고. 내가 너처럼 친구가 없지는 않아.”
“……재수 없는 새끼.”
에르미온의 날카로운 시선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들었던 건 맞지.’
에단이 묘한 눈초리로 식당 내부를 둘러봤다. 평범하지만 허름한 외관.
특출 난 점은 딱히 없어 보이는 식당이었다.
유일하게 특이한 점이라고 하면 제국의 수도 한복판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다기에는 손님도 없고, 외관도 볼품없다는 것이다.
에단이 말없이 음식을 기다리고 있자, 소년이 활기찬 기색으로 음식과 맥주를 내어 왔다.
“특별히 치즈를 더 추가해 드렸습니다! 이 치즈는…….”
“양젖이라고?”
“어?”
소년이 눈을 끔뻑이며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이것도 들었어.”
“……신기하네요. 저희 식당 소개해 준 분이랑 나중에 꼭 같이 오세요!”
소년이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흐음.”
에르미온이 눈앞에 놓인 음식을 응시했다.
“일단 외관은 합격이네.”
에르미온이 포크를 들어 커다란 소시지를 푹 하고 찔렀다. 육즙이 새어 나오는 게 썩 먹음직스러웠다.
그대로 소시지를 입에 밀어 넣은 에르미온의 눈이 순간 커졌다.
오물오물.
상기된 얼굴로 소시지를 씹는 에르미온의 모습은 썩 재밌었다.
에단도 치즈가 흐르는 소시지를 입에 넣었다. 진한 육향과 치즈의 풍미가 입안에 맴돌았다.
‘맛있네.’
확실히 맛은 훌륭했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흑맥주를 들이켰다.
시원한 탄산과 씁쓸함이 목을 타고 넘어가며 기름기와 느끼함을 한 번에 잡아 줬다.
절반 정도 맥주를 들이켠 에단이 그대로 테이블에 잔을 거칠게 놓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르미온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잔을 잡은 뒤 그대로 들이켜기 시작했다
벌컥벌컥.
쾅!
“크으! 뭐야 이거?!”
에르미온이 놀란 표정으로 맥주잔과 에단을 번갈아 바라봤다.
“맛있냐?”
“……제길. 인정하기 싫었는데, 인정할 수밖에 없네. 대체 이런 데는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에르미온의 물음에 에단은 말없이 소시지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나도 설명 못 해.’
지금은 없어진, 주인공이 자주 오던 식당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