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화] 드래곤 (8)
“…….”
“……크흠.”
에단이 빈센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색한 기류가 유지되자 빈센트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이제 돌아가거라.”
“흠, 알겠습니다. 일이 정리가 되면 따로 기별을 드리도록 하죠.”
에단의 말에 빈센트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밖으로 나온 에단이 에르미온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뭔가 꺼림칙한 시선에 에르미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에단은 고개를 돌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니, 뭐…… 딱히 필요 없었겠다 싶어서.”
“……뭐?”
잠시 멍한 표정으로 말을 곱씹던 에르미온이 에단의 말을 눈치챈 듯 빼액 소리쳤다.
“지금 나랑 장난해?!”
* * *
건물을 나선 에단이 정원을 거닐었다. 에르미온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뾰로통한 얼굴로 에단의 뒤를 따라왔다.
‘애도 아니고.’
에르미온을 힐긋 바라본 에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단의 표정을 바라본 에르미온의 눈썹이 휘었다.
“너 지금 굉장히 무례한 생각했지?!”
에르미온이 에단을 노려보며 역정을 냈다. 에단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닌데.”
“……이익!”
에르미온이 분통을 터트렸다. 불쾌한 눈빛은 확실한데, 그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두고 봐!’
어딜 가든 엄청난 대우를 받는 대마법사가 바로 에르미온이다.
비록 지금은 이런 처우를 받고 있지만, 조만간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입증할 생각이었다.
‘그때 돼서 후회해도 늦을 줄 알아.’
에르미온이 에단을 째려보며 이를 바득거렸다. 하지만 에단은 에르미온이 노려보든지 말든지,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관심을 보일 줄은 예상치 못했는데.’
에단은 자기도 모르게 빈센트에 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것 같았다.
이런 쪽에 있어서는 무심할 줄 알았지만, 빈센트는 아직 호승심을 가지고 있는 무인이었다.
‘이해는 되는군.’
에단이 피식 웃었다.
정상에 오른 강자가 가지는 권태로움은 에단도 지니고 있던 감정이다.
‘얼마 안 지나 지금의 여유가 그리워질 수도 있지만.’
지하의 침공이 시작되면 대륙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다. 그리고 원작대로라면 가장 먼저 타깃이 되는 것은 블란테다.
에단이 준비하는 모든 것이 그를 위한 대비다.
‘붙어 보자고.’
상황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블란테를 버릴 생각까지도 했지만, 지금까지만 놓고 보면 오히려 블란테라는 배경이 에단에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줬다.
에단이 교외를 걷고 있자, 지나가던 학생들이 에단에게 인사하고, 블란테의 기사들은 에단에게 경례했다.
‘많이 바뀌었네.’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벌레를 보는 것 같은 경멸 어린 시선. 그랬던 시기를 지나 지금은 모두의 경외를 받고 있다
블란테의 법칙은 약육강식.
강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가문.
하지만 그 법칙은 가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약하면 잡아먹힌다. 가문을 나선 뒤, 에단은 그 사실을 곧바로 알게 되었다.
‘재밌어.’
만족스러웠다.
류태신이 살던 현대에 비해 훨씬 더 허용 범위가 넓었다.
‘아직 할 게 산더미 같지만.’
묘한 설렘이 들었다. 이제 에단이 상대할 자들은 모두 괴물들이다.
평생을 괴물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다. 무언가를 도전할 때도, 결과를 알고 있는 것만큼 시시한 것은 없었다.
‘자신이 없지는 않아.’
하지만 에단의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페온.’
블란테의 선조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에단의 몸 안에 깃들어 있는 영체.
존재 자체가 기이한 이였다. 그 덕에 얻은 것이 적지 않았다. 에단이 왼손을 바라봤다.
‘타이탄의 장갑.’
본래라면 지금 시기에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물건이다.
페온은 한눈에 이 장갑을 알아봤다. 마치 그 장소에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다는 듯이.
‘그리고, 성검.’
카이나의 존재.
둘의 관계는 정말 예측하지 못했던 점이다.
‘죽은 나무에 깃들었다라…….’
죽은 나무.
본래라면 이 또한 초반에 얻을 수 없는 물건이다. 에단은 편법을 통해 그 시기를 앞당겼다.
페온이라는 존재를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의심스러운 존재이니만큼 신뢰는 어불성설이었다.
더불어 최근 들어 페온은 입을 다물며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당장은 떼어 낼 방법이 없지만.’
에단은 페온이 보여 준 힘을 기억하고 있었다. 경탄스러운 무위였다. 그 힘과 기술.
‘비기인가.’
마스터에 올라야만 가질 수 있는 극강의 기술.
‘기다릴 여유는 없어.’
에단은 편법을 통해 힘을 얻어 왔다. 욕심과 만용, 그리고 천운이 한데 모여 지금의 에단을 구성한다.
에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점을 확실히 알고 있다.
타이탄의 장갑, 세계수의 목걸이, 죽은 나무와 세계수의 힘, 그리고 룬어.
일생에 하나도 얻기 힘든, 설령 얻는다고 해도 감히 소화하기 어려운 기연들이었다.
‘운이 좋았지.’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객기를 부렸다. 언제 잘못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들이었다.
목숨을 부지한 것 자체가 엄청난 운이 뒤따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에단의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룬어는 아직 이해가 안 돼.’
원작과 달라진 룬어.
단어도, 의미도, 능력도. 에단이 알고 있던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알아낼 방도가 없군.’
에단이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떨쳐 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고민해 봤자, 모두 추측에 불과하다.
지금은 해야 할 일들을 하면 그만이다.
에단이 걷다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몸을 돌려 에르미온을 바라봤다.
“여기에 게이트 하나 설치하자.”
“……뭐라고?”
“게이트를 설치하자고.”
에르미온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장난해?”
에르미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거만한 얼굴을 한 채 에단에게 찬찬히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네가 마법에 문외한이라 잘 모르나 본데, 전이 마법진이라는 게 그렇게 쉽고 간단한 마법이 아니…….”
“아, 그래서 못 한다고?”
에단이 에르미온의 말을 도중에 끊어 냈다. 이맛살을 구긴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 밖이면 어쩔 수 없지. 탑주니 뭐니 해서 뭐 대단한 능력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내 기대치가 너무 컸던 모양이네.”
에단이 어쩔 수 없다는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작은 목소리로 흘리듯 중얼거렸다.
“쯧, 이럴 줄 알았으면 데아티르를 데리고 오는 건데…….”
그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뭐라고?”
서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에단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에단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순식간에 다시 표정을 바꾼 에단이 몸을 돌려 에르미온을 바라봤다.
“음? 무슨 소리 들었나?”
“내가 언제 불가능하다고 했어? 그깟 게이트 마법진 10분이면 만들어.”
에르미온이 쌍심지를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
“부족한 건 매개체일 뿐이야. 게이트 마법진을 가동하는 데 얼마나 많은 마나가 소모되는지 알아? 왜 게이트 마법진이 대도시에만 설치되어 있는데. 모두 돈 때문이다. 양질의 마나가 깃들어 있는 매개체. 그게 얼마나 천문학적인 금액인지는 저번 경매에서 봐서…….”
“아, 그것 때문이야?”
에단이 에르미온의 격정 어린 토로를 잘라 내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더니 대뜸 적당한 크기의 짱돌을 주워 왔다.
“이 정도면 되려나?”
“……뭔 소리야?”
에르미온은 에단의 행위가 이해되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에단은 무언가 성공할 것 같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에단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스읍― 후우.”
에단이 내면을 바라봤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마나의 바다가 보였다.
투명하지도, 어둡지도 않은 회색의 바다.
에단이 고요함 속에 작은 파동을 일으켰다. 이 방대한 마나를 끌어 쓸 때는 언제나 강한 집중력이 필요했다.
‘본래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에단은 본인이 얼마나 이질적인지를 알고 있다.
죽은 마나와 세계수.
마나를 강탈하고 관장하는 힘.
‘뭐, 안 돼도 어쩔 수 없고.’
조금 수고스럽긴 하겠지만, 돌아가서 마석을 채취해 오면 그만이다.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순간 강한 바람이 에단의 주위에 휘몰아쳤다. 에단이 돌덩어리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가진 것을 다루기만 하는 것뿐이라면.’
자신 있는 분야다.
파지직―
스파크가 튀었다. 에단이 무슨 짓을 하는지 눈치챈 에르미온이 눈을 부릅떴다.
“지금 무슨 짓거리를!”
마나의 주입.
행위 자체는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당장 검사들만 보더라도 기량만 된다면 검에 마나를 두른다.
그 자체로도 막강한 내구력과 절삭력, 파괴력 등을 얻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단의 행위는 그보다 한 단계를 뛰어넘는다.
마나의 주입.
인위적으로 마석과 같은 매개체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원리만 놓고 본다면 불가능하진 않다.
마법사들이나 연금술사들이 종종 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 낸 매개체들은 매우 효율이 떨어졌다. 들인 품에 비해 가치가 너무 낮았다.
눈을 감은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모두 에단을 바라봤다.
순간 휘몰아치던 바람이 사라졌다. 에단이 호흡을 가다듬더니 눈을 떴다.
― ……어처구니가 없군.
그동안 침묵하던 페온이 말했다.
멍한 얼굴로 에단을 바라보던 에르미온이 페온과 같은 소리를 했다.
“진짜 어이가 없네.”
만들어 버렸다.
그것도 일개 개인이 단번에.
마나가 깃든 매개체를.
* * *
“그게 정말인가?!”
“네, 네…….”
“아, 아직 있는 게 분명하겠지?”
크러쉬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 학생이 자신에게 누군가의 방문 소식을 전했다.
귀족이나 왕족 같은 이였다면 크러쉬가 이토록 흥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탑의 탑주라니!’
홍염의 관장자.
불의 대마법사.
지금 대륙에 대마법사란 칭호를 공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는 단 두 명뿐이었다.
그중 하나가 아카데미에 방문하다니, 에르미온은 종잡을 수 없는 인물로 대륙에 정평이 나 있었다.
아무리 보고 싶어도 쉽게 볼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에르미온이었다.
크러쉬가 업무를 멈추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지체할 수 없었다.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위인이 바로 에르미온이 아니던가.
크러쉬가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비행 마법같이 마나 소모가 극심한 마법을 펼치지는 못했지만, 느려 터진 발을 빠르게 할 수 있는 가속 마법을 시전할 수는 있었다.
크러쉬가 열심히 뛰어나갔다.
‘아.’
달리던 와중 떠오른 게 있었다.
‘……위치가 어디였지?’
제일 중요한 얘기를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 어딜 향해 달려가고 있단 말인가.
크러쉬가 정처 없이 달리고 있던 그때.
강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기분 탓이겠지만, 강렬한 열기도 동시에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거다!’
대마법사의 자질을 지닌 전도유망한 마법사인 자신은 알 수 있었다.
이 기운은 에르미온의 것이다!
크러쉬가 방향을 돌려 마나 파동의 근원지를 향해 전력으로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