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드래곤 (7)
“……재미없는 농담입니다.”
“농담 같냐?”
웃음기 어린 에단의 표정에 가토의 동공이 더욱 떨렸다. 에단이 몸을 돌리며 흘리듯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믿고 싶으면 믿든가.”
휘청.
가토의 몸이 비틀거렸다.
학생들이 경외심 가득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초롱초롱한 시선에 부담을 느낀 에단이 표정을 찌푸렸다.
에르미온은 물끄러미 에단을 응시했다.
‘정말 물건이군.’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다.
에르미온은 사람의 입을 타면서 살이 붙은 말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한데 지금 본 에단의 모습은…….
‘오히려 폄하된 수준이야.’
에르미온은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염세적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적어도 에르미온은 아니었다.
마탑은 영리단체였고, 다분히 세속적이다. 중립을 표방하고는 있었으나 금전을 추구한다.
애당초 마법이라는 분야 자체가 많은 돈이 드는 학문이다.
에르미온은 욕심이 많았고, 세상의 일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중 떠들썩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블란테의 둘째 아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세간에 알려진 것이 없는, 폐쇄성이 짙은 블란테의 영역 밖에까지 소문이 돌아다닐 정도로 에단은 악명이 자자했다.
검술 명가의 자제임에도 불구하고 검을 다루지 못하는 자.
대륙을 누비며 온갖 패악질을 일삼는 희대의 망나니.
그런데 최근 들어 다른 이야기가 들려왔다. 블란테의 둘째가 아카데미에 들어오면서 완전히 바뀌었다는 소문이었다.
블란테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여러 뜬소문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이었고, 여러 황당한 소리도 들려왔었다.
‘그래서 깊게 생각하지 않았건만…….’
애당초 블란테의 차남이 아카데미에서 교수 활동을 한다는 소리 자체가 믿기 어려운 소리였다.
‘심지어 신분을 숨기고 있었다니.’
삼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다.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자체가 낭비였다.
하지만 블랙마켓에서 봤던 에단의 강렬한 모습은 에르미온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버렸다.
흑사자들을 지휘하며 귀족들을 휘어잡는 모습.
그리고 전장에 뛰어들어 날뛰던 모습.
‘내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지.’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당돌하게 제의했다.
블란테라는 배경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행동이겠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에단의 담대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방금 보여 준 대련.
에르미온은 마법사였지만, 수많은 기사들을 상대해 오면서 기른 안목은 있었다.
맨손과 검.
페널티를 쥐고 있는 것은 에단이다. 무기의 이점을 넘어서기는 힘들다.
하지만 결과는 에단의 압승이었다. 상대한 기사의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비교 대상이 워낙 압도적일 뿐.
툭툭.
에단이 가토의 어깨를 두드린 후, 몸을 돌렸다. 가토는 참담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자리에 서 있었다.
‘이렇게 자극을 시켜 줘야.’
더 성장하기 마련이다. 에단은 내심 가토에게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라이벌.
격투기 선수로 활동했던 류태신 때부터 경험하지 못한 존재였다.
류태신은 늘 압도적인 존재로 군림했었다.
‘그래도 지금은.’
에단이 웃음을 머금었다.
상황이 달라졌다. 에단이 지금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도 그에 대한 대비책이다.
대비 없이 놈들의 침공이 시작되면, 자신은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에단은 이런 감정 자체가 낯설면서도 즐거웠다.
이내 미소를 지운 에단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뭣들 하고 있냐?”
나지막이 말하는 에단의 목소리에 홍해가 갈라지듯 길이 열렸다.
그 사이로 에르미온이 걸어 나왔다.
“꽤 하던데?”
“어, 칭찬 고마워.”
에단이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지나갔다.
에르미온이 에단의 뒤를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뭐, 뭐야?”
“교수님이랑 에르미온 님 사이에 뭔가가 있나?”
“에이, 설마…….”
한창 소문과 구설수를 만들기 좋아할 나이였다.
에밀라는 황망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보다가 뛰쳐나갔다.
‘……교수님.’
그 모습을 발치에서 지켜보던 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 * *
에단이 연무장 밖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네이드가 찾아왔다.
여전히 구김 하나 없는 단정한 집사복을 입은 채 에단에게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혈색이 좋은 걸 보니 잘 지냈나 보네.”
“도련님이 계시지 않는데, 제가 어찌 편하게 보냈겠습니까.”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하는 네이드의 모습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능글맞은 건 여전하군.”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곁에 계신 분은…… 에르미온 님. 맞으신가요?”
네이드가 가늘게 뜬 눈으로 에르미온을 바라봤다. 에르미온은 네이드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허, 블란테에는 원래 이렇게 괴물들이 많은 건가?”
에르미온은 네이드의 실력을 단번에 간파했다. 네이드는 작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숙였다.
“아직 제일 괴물 같은 사람이 남았어.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이드의 말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고 네이드의 뒤를 따라갔다.
그 순간 들려오는 발소리에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에밀라가 다가오는 걸 본 에단이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그것뿐입니까?”
“뭐, 더 할 말 있어?”
“…….”
에단의 대답에 에밀라의 얼굴이 굳었다.
무언가 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가 않았다.
에단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리려 하자, 에밀라가 입을 열었다.
“또…… 가실 겁니까?”
에밀라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에단이 에밀라를 응시하다 말했다.
“어.”
“……저도 가면 안 되겠습니까?”
“네가? 뭐 하러?”
예상 밖의 말에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밀라는 어디까지나 아카데미의 교수였다.
“……아카데미는 많이 안정화되었습니다.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저도 무언가…….”
“아, 괜찮아.”
“……네?”
“딱히 네가 필요할 만한 일이 없어서. 마음만 받을 테니까 학생들 교육이나 잘 시키고 있어.”
“……제가 약해서 그렇습니까?”
여러 심경이 느껴지는 에밀라의 목소리에, 에단이 에밀라의 눈을 응시했다. 에밀라의 눈이 흔들렸다.
에밀라는 뛰어난 재능과 실력으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그녀는 최근 들어 자신의 무력에 회의감이 들었다.
대륙에는 수많은 괴물들이 존재했고, 그런 괴물들 사이에서 에밀라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는 에밀라의 모습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네이드.”
“네, 도련님.”
“얘 어떤 것 같아?”
“재능 있는 아이입니다.”
“어떻게, 가르칠 만하겠어?”
네이드가 에밀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미소 지었다.
“간만에 욕심이 생기는군요.”
“들었지?”
에단이 에밀라를 향해 말했다. 그녀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에밀라가 눈을 깜빡이며 에단과 네이드를 바라봤다. 아직 이 대화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찾아오세요.”
네이드가 인자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뒤 몸을 돌렸다.
‘……이게 뭐 하는 상황이야?’
에르미온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 * *
똑똑.
에단이 문을 두드렸다. 곧이어 문 안에서 웅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단이냐?”
“네.”
“들어와라.”
떨어진 허락에 에단이 문을 열고 방 안에 들어섰다. 방 안에는 집무를 확인하고 있던 빈센트가 에단을 응시했다.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빈센트의 시선이 잠시 에단에게 머무르다가 곁에 있는 에르미온에게 옮겨졌다.
“누구지?”
“……마탑의 탑주인 에르미온입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위압감에 에르미온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진짜 괴물이군.’
명성은 수없이 들었지만, 실제로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디서 기죽은 경험이 없는 에르미온이었지만, 빈센트에게서 느껴지는 고요하면서 무거운 기세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마탑의 탑주라…….”
빈센트가 잠시 말을 곱씹다가 에단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마치 ‘또 무슨 짓을 벌이는 게냐’라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부담스러우니까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시죠.”
“건방진 놈.”
“먼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일이 수월해졌습니다.”
“흥, 입에 바른 소리는 그만하고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것인지나 설명해라.”
에단은 그간 있었던 일련의 상황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던 빈센트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대체 무슨 계획을 꾸미는 거냐?”
빈센트의 물음에 에단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그래서 지금부터 그 계획을 설명드리려고 합니다.”
에단은 앞으로의 계획을 빈센트에게 설명했다.
계획을 듣고 있던 빈센트와 곁에서 같이 얘기를 듣던 에르미온의 얼굴이 점점 황당함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제정신인 게냐?”
“겁나십니까?”
“허.”
빈센트가 헛웃음을 지으며 에단을 응시했고, 곁에 서 있던 에르미온도 덩달아 미친놈 보듯 에단을 바라봤다.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살기 위해서죠.”
여러 의미가 뒤섞인 말이었다.
에단의 말은 진심이다. 블란테가 아무리 강한 무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들 제국과 맞설 수는 없었다.
1황자는 위험한 인물이다.
그가 패권을 쥐는 순간 블란테는 고립되고 만다.
적은 제국뿐이 아니었다.
잠적한 레벨린이 가장 먼저 노리고 있는 것이 블란테다.
블란테의 멸망은 예정된 미래다. 그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판을 뒤집어야 했다.
에단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빈센트를 바라봤다. 잠시 시선을 마주하던 둘이 동시에 웃었다.
“어디 한번 해 보 거라.”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 소환장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가 봐야죠. 가서 얼굴 한번 보고 올 생각입니다.”
“자신 있느냐?”
“제가 언제 자신 없던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보여 주고 오겠습니다.”
자신만만한 에단의 태도에 빈센트가 피식 웃었다.
“그간 너무 조용히 있었군. 별 같잖은 놈들도 기어오르고 말이야.”
“그러게 잘 좀 하지 그러셨습니까. 카이제르니, 뭐니 하는 놈들이 설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눈꼴이 시려서 견딜 수가 없더군요.”
“동감이다. 그러니 확실히 보여 주고 와라.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에단과 빈센트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대화를 끝낸 에단이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서려고 하자, 빈센트가 에단을 불렀다.
“또 하실 말씀 있습니까?”
에단의 물음에 빈센트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그건 언제쯤 할 생각이지?”
“어떤 걸 말하시는 거죠?”
“……드래곤 말이다.”
“아, 보름 정도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볼일 끝내면 얼추 맞을 것 같습니다.”
“……나한테도 연락하거라.”
빈센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에단이 눈을 끔뻑이다 물었다.
“왜요?”
“……몸이 조금 근질거리는구나.”
빈센트가 민망한 표정으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