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드래곤 (5)
가위바위보 한 판에 희비가 엇갈렸다.
가위를 낸 데아티르와 주먹을 낸 에르미온.
에르미온이 입꼬리를 올리며 거만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데아티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꼬맹아, 넌 아직 나한테 안 된다니까? 젖 좀 더 먹고 오렴.”
“…….”
차가운 인상만 보여 주던 데아티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데아티르가 획 하고 고개를 돌려 에단을 바라봤다.
“……한 번 더 할 수는 없는 건가?”
이글거리는 시선을 받은 에단이 피식 웃었다. 에단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되겠어?”
“…….”
데아트리가 입을 다물었다. 부들거리는 손만 봐도 그가 얼마나 분해하는지 느껴졌다.
반면 에르미온은 한껏 승리에 도취해 있었다. 거만한 시선으로 데아티르를 바라보며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약 올리고 있었다.
“꼬맹이 넌 나한테 안 된다니까? 꺄하하하핫!”
광소를 터트리는 에르미온을 살벌하게 노려본 데아티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운으로 이겨서 좋겠군.”
“어머, 운도 실력이라는 말 모르니? 누나에 대한 존경심을 좀 가지는 건 어때?”
“누가 누나라는 거지? 할망구 주제에.”
뚝.
일순 정적이 맴돌았다. 불쾌하기 그지없는 정적에 지켜보던 이들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 뭐라 했니?”
“나이를 처먹더니 귀라도 먹은 건가, 할망구?”
“……빠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에르미온의 일행으로 보이는 마법사가 안절부절못하며 에르미온을 바라봤다.
“……진짜로 죽고 싶나 보구나?”
“이젠 꼬장이라도 부리는 건가?”
계속되는 도발에 에르미온의 인내심이 결국 한계에 다다랐다. 에르미온의 마나가 폭주하려는 순간.
“적당히 안 해?”
에단이 마나를 끌어 올리며 경고했다. 요사스러운 회색 마나가 넘실거렸다.
그제야 마나를 거둔 에르미온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재수 없는 꼬맹이.”
상처뿐인 승리를 얻은 에르미온에게 에단이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슬슬 가 볼까.”
“어딜 가자는 건데?”
“아카데미.”
“……아카데미? 내가 거기를 왜 가?”
“게이트 하나 뚫으려고.”
에단의 태연하고도 뻔뻔한 태도에 에르미온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거기를 왜 가야 되냐고.”
“그럼 날로 먹으려고 했어?”
“……뭐?”
“드래곤에 대한 정보도 얻고, 만나게도 해 주겠다는데 그 정도 못 해? 이거 완전 도둑놈 심보 아니야.”
“도, 도둑놈?”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 반박할 겨를도 없이 에단이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 드래곤을 만나서 단서나 기연이라도 얻으면 엄청난 성취를 얻을 거 아니야?”
“그건 장담할 수 없는…….”
“그래? 그럼 그쪽은 빠져.”
에단이 고개를 돌려 데아티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아주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되는군.”
“이, 이이……!”
에르미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죽이 잘 맞는 둘의 모습을 보니, 아주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기껏 생각해서 기회를 주려고 한 건데, 그렇게 나오면 서운하지. 그냥 없던 걸로 하자고.”
에단이 아쉬울 것 없다는 태도로 나오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에르미온이었다.
에단의 태도와 분위기를 보아하니 정말로 아쉬울 게 없어 보였다. 이쯤 되자 초조한 마음이 일었다.
‘내가 이딴 처우를 받다니…….’
어이가 없었다. 대륙 어디를 가도 귀빈 대우를 받는 게 에르미온이었다.
대륙에서 마법사는 귀한 재원이었고, 뛰어난 마법사는 더욱 드물었다.
개중 둘밖에 없는 대마법사의 칭호를 지닌 에르미온은 한 나라의 지도자에 맞먹는 대우를 받았다.
경지에 오른 이후 그런 대우를 받아 왔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다가 이런 처사를 겪게 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에르미온이 부들부들 떨면서 빽 하고 소리쳤다.
“가면 되잖아!”
“어차피 갈 거면서 왜 튕겼어.”
에단이 씨익 웃었다.
* * *
아카데미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먼저 블란테가 아카데미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점.
그것에 반감을 느끼는 학생들도 있었다.
아카데미가 가지는 공정성과 중립성이 옅어지는 느낌과 블란테라는 가문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뀐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퇴교하거나, 가문 측의 지시로 퇴교를 선택하게 되는 학생들이 나왔다.
그러나 잔류하는 학생들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블란테의 가주인 빈센트의 연설에 매료된 이들이 있었고.
선망하는 대상이었던 블란테에게 직접 검술을 지도받는다는 것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블란테.
명실공히 최강의 무력집단.
최근 들어 급부상하는 가문인 카이제르가 있었지만, 학생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카이제르의 명성에는 부풀려진 부분이 있었다. 학생들도 카이제르의 위세가 인위적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나!”
“핫!”
우렁찬 기합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목검을 움켜쥔 학생들이 절도 있는 움직임을 보였다.
허공을 가르는 목검에서 강한 기세가 느껴졌다.
보폭, 호흡, 시선.
블란테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다. 작은 습관이 있다면 곧바로 지적을 받았다.
고된 훈련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 훈련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체력 훈련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검술 훈련으로 자세를 가다듬는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대련 시간이 찾아왔다.
체력 훈련과 검술 훈련은 견딜 만했다. 에단이 주관한 수업의 체력 단련을 이겨 낸 경험 덕분이다.
“허억, 허억…….”
하지만 실전을 빙자한 대련은 얘기가 달랐다.
학생들끼리의 대련은 괜찮았다. 서로 간의 실력 차이는 있었지만, 그 차이는 크게 유의미하지 않았다.
문제는 기사들이 대련을 받아 줄 때 발생했다.
후웅!
검이 매섭게 휘둘러진다. 가토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것으로 검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어. 검에 무게를 싣는 것은 좋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빈틈을 만들어 냈을 때여야만 한다.”
툭. 툭.
가토가 어깨와 손목만을 이용해서 검을 움직였다. 가볍기 그지없는 움직임이었지만, 가토에 의해 검의 궤도가 완전히 틀어졌다.
푹.
“크윽!”
목검에 복부를 찔린 학생이 무릎을 꿇었다. 전력을 다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발생했다.
충격적이었다.
가토는 강한 힘도, 속도도, 체력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저 노련한 검술로 학생들을 상대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너무 극명한 실력 차이에 분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늘 엘리트라는 감투를 쓰고 있던 학생들이 헛웃음을 지으며 순순히 물러났다.
“감사합니다.”
“가능성이 보입니다.”
가토의 담백한 조언에 위로를 받은 학생이 머리를 깊게 숙였다.
“말도 안 되게 강하네…….”
“우리 또래로 보이는데 저게 말이 돼?”
“블란테는 뭐가 다르긴 하구나…….”
학생들이 감탄 섞인 대화를 했다.
그들은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가문에서 막대한 지원을 받으며 자랐고, 아카데미라는 환경에서 경쟁하고 훈련하며 실력을 갈고닦았다.
재능과 환경 모두가 뒤받쳐 주니,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가토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또래로 보이는 가토의 검술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 어떤 방법을 시도해도 곧장 파훼되고 말았다.
또래에게 처음으로 겪어 보는 높다란 벽에 학생들은 좌절하기보다는 경외심을 느꼈다.
그러나 모든 학생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유일하게 불같은 호승심을 지닌 이가 있었다.
“나랑도 하자.”
후웅!
리사가 허공에 목검을 휘두르며 몸을 풀었다. 살벌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사나운 기세를 풍기며 다가가는 리사의 모습에 가토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리사 아가씨.”
“격식 차리지 마. 지금은 선생이랑 학생이잖아?”
“그렇다면 반말을 하시면 안 되는 게…….”
“……사사로운 건 따지지 말자고!”
리사가 지면을 박차고 쇄도했다. 가토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리사를 상대할 때만큼은 다른 학생들 때처럼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방심하면 큰코다치겠군.’
기세가 흉흉했다. 블란테의 피가 흐르는 만큼 검격 하나하나가 날카롭고 매서웠다.
수십에 달하는 연계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가토가 뒤로 물러서며 검들을 쳐 냈다.
모든 검을 쳐 낼 필요는 없다. 리사는 가토를 거의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실력 향상을 위한 대련에 불과했다.
‘뛰어나긴 하지만…….’
리사의 재능은 훌륭했다.
반응속도, 동체 시력, 체력, 승부욕까지. 무엇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재능만 놓고 본다면 자신보다 확실히 뛰어났다.
‘부족한 것이라면.’
경험.
그리고 라이벌.
가토의 머릿속에 휴고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토는 그간 휴고와 쉴 새 없이 많은 대련을 해 왔다.
휴고의 재능은 정말로 규격 외였다. 예상을 벗어나는 짐승 같은 움직임을 상대할 때면 진땀을 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경험이 가토에게는 살과 피가 되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공세에도 가토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오오오!”
학생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리사가 가토를 압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보여 줘, 리사!”
율리가 소리치며 응원했다. 곁에 있던 학생들도 율리와 같이 리사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래! 아카데미의 저력을 좀 보여 줘!”
“멋있다, 리사!”
응원에 힘을 입은 것인지, 리사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한편 가토는 리사의 검을 막아 내면서 천천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졌겠군.’
쏟아지는 검격이 사나운 폭풍을 연상케 했다. 검 하나하나가 무거웠다. 빈틈을 찾아내도 반격을 노리기가 힘들 정도의 연계였다.
흐름을 잡은 리사는 기세를 탔다. 한번 타기 시작한 기세는 끊어 내기가 쉽지 않았다.
‘휴고라면.’
가토의 머릿속에서 휴고의 움직임이 연상됐다.
대련할 때 휴고는 먼저 움직이기보다 상대가 움직이기를 기다리고는 했다. 마치 맹수처럼 인내하며 빈틈을 노렸다.
‘그때의 움직임.’
가토가 쉴 새 없이 검을 쏟아낼 때, 휴고는 어떠한 움직임을 보였는가.
에단과의 대련도 떠올랐다. 에단은 맨손으로도 자신을 압도했다.
‘도련님이었다면.’
에단의 모습을 떠올린 가토가 피식 웃었다.
‘먼저 흐름을 끊어 내야겠지.’
끊어 내는 방법은 꼭 빈틈을 노리지 않아도 된다.
이것은 경험담이었다.
뒤로 물러나던 가토가 순간 발이 꼬였다. 순간 리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짧은 틈이지만 확실한 빈틈이 보였다.
리사가 빈틈을 노리고 깊게 파고들었다. 그때 가토가 몸을 완전히 낮췄다.
휘릭!
가토가 몸을 회전시키며 바닥을 쓸어 내듯 발을 움직였다. 예측하지 못한 움직임에 리사는 차마 반응하지 못했다.
“어?”
발을 걷어차인 리사의 몸이 공중에 붕 떠올랐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가토는 리사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푹.
가토의 검 끝이 리사의 명치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