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화] 드래곤 (2)
헨리의 본질은 세계수에서 비롯된다. 세계수의 수호자, 가디언.
그것이 본래 헨리의 정체성이었고, 세계수를 수호해야 하는 그녀의 역량이 낮을 리가 만무하다.
세계수는 마나를 순환하고 관장한다. 그리고 에단과 헨리, 르니엘.
이 셋은 세계수의 마나가 아닌, 그 본질은 흡수했다. 본래라면 용납이 될 수가 없는 사건이다.
우우웅.
헨리의 몸에서 마나가 흘러나왔다. 흐름이 뒤바뀐다.
세계수의 힘을 얻었다고 한들, 전지전능한 지배가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분야가 있었다.
바로 마법.
마법은 흐름을 비틀고 규칙을 강제로 재구성시켜 새로운 현상을 발현시키는 것이다.
강력한 마법을 선보이기 위해서는 시전자의 역량이 높아야만 했고, 역량을 높이기 위해선 마나의 보유량이 높아야 한다.
아무리 세계수의 힘을 얻고, 세계수의 수호자라 한들 타인의 마나를 마음대로 만질 수는 없다.
하지만 흐름을 건드리는 것쯤이라면.
그건 매우 손쉬운 일이었다.
마법의 구성 단계에서 건드리는 파훼.
그리고 평생을 일궈 온 마법이 눈앞에서 파훼되는 그 충격적인 광경.
두 마법사들의 몸이 얼어붙었다. 경악을 금치 못할 상황인지라 섣부른 움직임조차 시도할 수 없었다.
“오.”
멀리서 헨리를 지켜보던 에단이 감탄사를 내뱉자, 헨리가 헤헤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이제 들어가도 되겠지?”
칼베리안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에단이 도약했다. 순식간에 엄청난 거리를 좁힌 에단이 적진 한가운데에 착지했다.
“마법사 양반들.”
에단이 에르미온과 데아티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의 에단이라면 저 둘을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에단은 둘에게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쓸데가 있으니까.’
에단의 목적은 쓸데없이 적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
“다치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
에단 딴에는 배려였지만, 에르미온과 데아티르에게는 조롱이었다. 둘이 치욕감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안전장치는 충분하고.’
헨리와 르니엘.
둘의 마크가 있다면 저 둘에 관해서는 신경을 꺼도 된다.
에단이 블란테의 기사들 사이를 누볐다. 지금은 힘을 숨길 때가 아니었다.
“죽이는 건 자제하고!”
훌륭한 인질들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수많은 칼날이 쇄도하는 걸 본 에단이 몸을 낮춤과 동시에 하단을 걷어찼다. 바닥을 쓸어내듯 차인 적들이 공중에 떠올랐다.
개중 아무의 얼굴을 붙잡은 에단이 그대로 적진을 향해 집어 던지자 적들이 우르르 밀려났다.
꽈아악!
에단의 주먹에 흉흉한 오러가 가득 맺혔다.
“못 피하면 죽을지도 몰라.”
에단이 사납게 웃으며 주먹을 내질렀다. 잠재되어 있던 오러 일부가 흘러나왔다.
오러의 해일이 적들을 덮쳤다. 적들이 혼비백산하며 달아나길 시도했지만 이미 늦었다.
수십에 달하는 적들이 오러의 해일에 쓸려 갔다.
‘내가 생각해도 무식하기 짝이 없네.’
― 알긴 아는구나.
‘목소리도 참 오랜만에 듣는 것 같군요.’
그동안 상황을 관조하며 침묵하고 있던 페온이 내뱉은 말은 자신을 향한 지적이었다.
피식 웃은 에단이 곧바로 전투를 이어 나갔다. 이미 승기는 잡았다. 가뜩이나 속절없이 밀리고 있던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 에단이 참전했으니 전황은 완전히 기울어졌다.
에단이 적들을 쓸어버리며 시선을 돌렸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살벌하구만.’
에단의 시선이 향한 장소에는 첸이 있었다. 첸은 평소와 같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간결하고 정확한,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검술이다.
발을 내딛으며 동시에 시선이 따라간다. 얼음장 같은 시선이 향한 장소에는 검이 뒤따랐다.
챙!
카이제르의 리데르가 속수무책으로 몰리고 있었다.
속도에서 밀리는 것은 아니다. 지닌 마나의 총량에서도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
검술의 기교?
첸의 검술이 평범하고 무던하다면, 리데르의 검술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마치 꽃이 개화하는 것처럼 아름답고 화려했다. 검이 춤추며 날카롭게 첸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첸의 대응은 변함이 없었다.
그저 늘 하던 것처럼, 마치 홀로 수련하듯이.
상대에게 시선을 주되 의식하지 않았다.
물살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아무리 변초와 허초를 섞는다고 한들 거대한 흐름을 저항하는 것을 불가능한 것이다.
촤악!
가슴에 거대한 자상이 생긴 리데르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그의 눈에는 독기가 짙게 서려 있었다.
“……어째서지?”
첸은 여전히 굳게 다문 입과 차가운 시선으로 말없이 리데르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째서 실력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거지?”
리데르가 이를 갈며 물었다. 첸은 물끄러미 리데르를 바라보다 입을 뗐다.
“쓸데없는 이유를 찾는군. 단지 네가 약할 뿐이다.”
토끼가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사자를 이기지 못한다. 첸은 리데르를 상대하면서 조금의 위기감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감을 갖는 대상은.’
첸이 시선을 돌려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과 첸의 눈이 마주쳤다. 에단이 히죽 웃으며 다시금 적진을 헤집었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지만, 모든 동작에는 일정한 규칙과 원리가 존재했다.
체중 이동, 시선의 분산, 기술, 체력, 힘, 배짱.
모든 면에서 지적할 점이 보이지 않았다. 에단은 아직 첸을 넘지 못했지만…….
‘그것도 조만간이군.’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묘한 호승심과 함께 위기감이 느껴진다.
에단에게 부족한 것은 오롯이 시간뿐이다. 자신을 넘게 되는 것은 확정된 미래나 다름없었다.
‘사자의 피가 흐르는 것인가.’
첸이 빈센트를 회상하며 피식 웃었다. 건조한 미소였다. 첸의 시선이 다시금 리데르에게로 향했다.
“검술 가문이라 자칭하려면 수련을 더욱 해야겠군.”
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조롱의 의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리데르는 더욱 분노했다. 만일 첸이 자신을 괄시하고 조롱했다면, 자신을 죽이려고 들었다면, 이렇게까지 굴욕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순수한 실력의 격차.
그 차이는 좁힐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었다.
리데르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좋아. 그 태도가 언제까지 유지될지 지켜보마.”
리데르가 품에서 어떤 보석 조각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잠시 주저하는 듯 보이더니 조각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콰직!
리데르가 조각을 그대로 씹어 삼켰다.
후우웅!
강대한 마나가 휘몰아쳤다. 첸이 미간을 좁히며 자세를 갖췄다. 불길하고 음험한 기운이 리데르를 집어삼켰다.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불쾌함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한심하군.”
첸이 몸을 움직이려 하는 그 순간, 이변을 감지한 에단이 달려왔다.
“……도련님?”
첸이 눈을 끔뻑이며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리데르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달려드는 에단은 활짝 웃고 있었다.
“이 앙큼한 새끼가!”
첸의 뒤편에서 달려든 에단이 그대로 도약하여 리데르의 허리 쪽으로 무릎을 내밀었다.
콰직!
“커헉!”
리데르의 허리가 기이한 방향으로 꺾였다. 리데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꺾인 허리는 순식간에 수복되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대로 리데르의 허리를 감싸 안은 에단이 숨을 삼키며 힘을 모았다.
지면이 움푹 파였다.
“후읍!”
리데르가 공중에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바닥에 처박혔다.
쾅!
거대한 굉음과 함께 먼지가 피어올랐다.
“발버둥 치면 귀찮으니까.”
에단이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들었다.
거친 파운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먹 하나하나가 엄청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주먹이 꽂힐 때마다 리데르의 몸이 들썩거렸고, 바닥에도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무, 무슨 소리야?”
전투를 이어 나가던 기사들도 굉음의 발생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에단이 사나운 미소를 지은 채 무자비한 파운딩을 꽂아 넣고 있었다.
그 모습에 섬뜩함을 느낀 기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한참 동안 주먹을 내지르던 에단이 리데르의 반응을 지켜봤다.
‘이쯤이면 된 것 같은데.’
에단의 주먹이 멎었다. 곤죽이 된 리데르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끄어어어어…….”
“엄살 그만 떨고.”
에단이 자세를 바꿨다. 리데르의 목덜미를 감싸며 그립을 완성시켰다. 순식간에 암 트라이엥글이 완성됐다.
에단이 체중을 싣자, 리데르가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완성된 기술을 파훼하기에는 무리였다.
에단이 체중을 실으며 천천히 리데르의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리데르의 몸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죽은 마나가 에단의 몸속으로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꺼, 꺼어어…….”
리데르의 눈에서 점차 생기가 옅어졌다. 피부가 푸석해지며 몸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역시나 작업을 해 놨네.’
리데르가 마석을 꺼내 드는 순간, 에단은 리데르를 지켜보고 있었다.
별다른 작업 없이 마석을 집어삼키는 순간, 에단은 리데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보다 더 야만적이군.’
세계의 중심에서 봤던 자보다도 과격했다.
‘나야 잘됐지만.’
마인화가 된 리데르는 에단에게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죽은 마나를 모두 빼앗긴 리데르의 몸은 생기 하나 없이 바싹 말라 있었다.
에단이 몸을 일으키며 손을 털어 냈다.
카이제르의 기사단장은 그렇게 허무한 최후를 맞이했다.
“…….”
첸이 에단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에단은 첸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할 말 있어요?”
“……이건 무슨 상황입니까.”
“아, 그건 조금 이따가 설명해 줄게요. 아직 일이 덜 끝나서.”
상황은 얼추 끝나가고 있었지만, 아직 교통정리가 되지 않았다.
역시나 가장 많은 활약을 보이고 있는 것은 렉사르와 휴고였다. 둘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적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잘하고 있네.”
에단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블랙마켓에 관계된 이들이 전부 붙잡혔다. 완전하게 제압당한 그들의 얼굴에는 치욕과 분노가 공존해 있었다.
“……이번 일은 정식으로 항의하겠소.”
“이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볼을 푸들거리는 귀족에게 다가간 에단이 그대로 귀족의 머리를 걷어찼다. 귀족이 뒤로 발라당 자빠졌다.
“아직 사태 파악 못 하지?”
그들 주위에는 블란테의 기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쥐새끼 하나도 도망칠 수 없는 상황.
“자꾸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죄다 죽여 버리는 수가 있다?”
“……감당할 자신 있소?”
퍼억!
입을 연 귀족에게 에단의 발길질이 가해졌다.
“꼭 좋게 말하면 들어 처먹질 않네. 감당할 자신 있냐고? 자신이야 없지. 대륙 공적이 되면 제아무리 블란테라고 한들 별수 있나.”
에단이 팔장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귀족과 왕족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제야 말이 조금 통하는 것 같군. 그렇다면…….”
“근데 말이야…….”
에단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증거 있어?”
우리가 했다는 증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