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드래곤 (1)
수적 우위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났다. 상대의 숫자는 압도적이었고, 상대는 하나같이 권력자들이었다.
대동하고 있는 경호원들의 수준 또한 결코 낮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대치가 이어졌다. 우위를 지닌 것은 상대측이었지만, 누구 하나도 섣부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첸 아저씨.”
“…….”
첸이 미간을 좁히며 에단을 노려보자, 에단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농담 한번 못 하겠네. 첸 경.”
“……말씀하시죠.”
“사정 봐주지 마세요.”
순간 첸의 표정이 굳었다.
“괜찮겠습니까?”
“안 괜찮을 건 뭐가 있습니까? 말했잖아요. 명분은 저희한테 있다고.”
에단이 칼베리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칼베리안이 인상을 구겼다. 에단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단이 스산한 눈빛으로 정면을 노려봤다. 적들이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괘씸하지 않습니까? 감히 우리를 앞에 두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데.”
오만하면서도 가문에 대한 자신이 넘치는 에단의 발언에 첸이 피식 웃었다.
“그건 동감이군요.”
첸의 기세가 바뀌었다. 서늘함을 넘어, 살갗이 찢길 것 같은 한기가 느껴졌다.
스스스.
뽑아 든 검에서 오러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통제를 못 하는 것이 아닌, 의도적인 행위였다.
터벅터벅.
첸이 무감각한 시선으로 상대를 훑었다. 시선을 받은 자들의 몸이 얼어붙었다.
“낯익은 얼굴이 있군.”
첸의 시선이 향하는 장소.
그곳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남자가 가면을 벗어 던졌다.
“……카이제르.”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단어. 블란테와 대립하는 또 다른 검술 가문 카이제르.
“오랜만이군.”
남자가 알아본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리데르…….”
카이제르 기사단의 단장을 역임하고 있는 리데르.
그리고 블란테의 상징인인 흑사자 기사단의 단장인 첸.
서로가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리데르가 조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설마 블란테가 이런 수작질을 부릴 줄은 몰랐는데.”
“흠, 그런가? 나는 자네가 이런 곳에 자주 다닐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역시나 예상이 맞았군.”
“…….”
리데르의 표정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리데르가 첸을 살벌하게 노려보며 물었다.
“정말 전쟁을 벌일 셈인가?”
“너무 앞서나가는군. 듣지 않았나. 우린 단지 정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뿐이야.”
“지금 그따위 궤변이 통할 거라고……!”
“불만이면 저항하는 게 어떻겠나?”
첸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리데르의 이마에 거대한 핏줄이 돋아났다.
“……오만이 도를 넘었군. 죽는 게 소원이라면 소원대로 해 줄 수밖에.”
스릉.
맑은 소리와 함께 리데르가 검을 뽑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사람들이 긴장을 머금었다.
그때 에단의 시선이 관중들 사이에 있는 한니발과 메이에게로 향했다. 에단이 입 모양으로 그들에게 말을 전했다.
‘뒤.집.어.’
에단의 말뜻을 이해한 메이가 한숨을 푹하고 내쉬었다. 한니발도 쓴웃음을 지었다.
“쉬운 일이 없군요.”
“예상은 했어요.”
한니발이 휴고와 렉사르를 향해 말했다.
“들으셨겠죠?”
렉사르의 몸이 들썩였다. 그가 소리를 죽인 채 섬뜩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드디어 이 말 같지도 않은 가면을 벗어 던질 수 있겠군.”
렉사르가 품에서 톱날 검을 꺼냈다. 그와 동시에 가면을 벗어 던졌다. 사나운 기세가 폭발하듯 번져 나갔다.
휴고는 그 모습을 멀뚱거리며 지켜보다가 가면을 매만졌다.
“……난 조금 맘에 들었는데.”
조금 미련이 남는지 휴고가 강아지 탈을 조심스레 놔뒀다.
우득. 우드득.
휴고가 목을 풀었다.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솟는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휴고의 눈이 노랗게 물들며 야성이 휴고를 집어삼켰다.
휴고와 렉사르가 순간적으로 서로를 노려봤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튀어 나갔다.
쾅!
두 사람이 들이닥침으로 인해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단이 씨익 웃으면서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저항하면 죽여.”
흑색 갑주를 두른 기사들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짐승과 비슷한, 정제되지 않은 야성이 줄줄 흘러나왔다.
싸움은 익숙하다. 매일같이 훈련하고 대련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전이 아니다.
아무리 강한 몬스터와 싸워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토벌일 뿐.
반면 지금 눈앞의 상대는 검을 들고 있다. 간만에 찾아온 실전에 흑기사들은 흥분하고 있었다.
타닷!
기사들이 뛰쳐나갔다.
순식간에 전투가 더욱 크게 번졌다. 에단은 전방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살고 싶은 놈들은 엎드려!”
그 말에 몇몇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에단이 노린 것은 학살극이 아니다. 불필요한 살생을 벌일 필요는 없었다.
‘덤비는 놈들까지 사정을 봐줄 필요는 없지.’
에단이 스트레칭을 하듯 몸을 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칼베리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저 난장판 속으로 들어갈 생각이야?”
“어. 그럼 구경만 하고 있냐?”
“……나는?”
칼베리안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스스로를 가리켰다.
“나 혼자 여기 있으라고?”
에단이 고개를 돌려 칼베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잠시 칼베리안을 응시하던 에단이 고개를 돌리며 작게 혀를 찼다.
“쯧, 더럽게 손 많이 가네.”
“다 들었다…….”
“어. 들으라고 한 거야. 그럴 줄 알고 준비해 둔 애가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준비?”
듣지 못한 일이던 터라 칼베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단이 손짓하자 뒤편에서 한 무리가 나타났다.
방금까지만 해도 쇠창살에 갇혀 있던 엘프들이었다.
엘프들의 선두에는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가 곰돌이 탈을 쓴 채 당찬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뭐야 저건?”
“뭐긴 뭐야. 손 많이 가는 널 지켜 줄 애지.”
곰돌이 탈을 쓰고 있는 아이는 타미였다. 용병단이나 사미라를 대동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에단의 개인 세력이었기에 얼굴이 팔려서 좋을 게 없었다.
‘별 도움도 안 되고.’
이건 내로라하는 이들이 벌이는 진짜배기 전쟁이었다.
단원들이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성장을 일궈 냈다고는 하지만, 여기서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예외가 있다면.’
에단이 멀뚱거리며 서 있는 타미를 바라봤다.
“맘에 드냐?”
“응.”
타미의 건조한 대꾸에 피식 웃은 에단이 곰돌이 탈을 쓰다듬었다.
“접근하는 애들 있으면 적당히 처리해.”
“알겠어.”
타미의 대답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됐지?”
“……장난해?”
칼베리안은 황당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런 꼬마 아이를 두고 무슨…….”
칼베리안이 말을 토해 내던 그때, 누군가가 칼베리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러가 둘러진 검을 휘두르며 갑자기 뛰어들자 칼베리안이 뒷걸음질을 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칼베리안이 사색이 된 얼굴로 앞을 바라보는 순간.
촤악!
곰돌이 탈을 쓴 타미가 손을 휘둘렀다. 그다지 힘을 들이지도 않은 가벼운 손놀림이었다.
하지만 여파는 가볍지 않았다. 달려든 자의 몸이 그대로 반으로 찢어졌다.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
칼베리안이 멍한 표정으로 타미를 바라봤다. 에단이 그런 칼베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됐지?”
“어떻게 되먹은 거야…….”
칼베리안은 지금 자신이 겪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에단이 슬슬 움직이려 하는 순간,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에단이 고개를 돌리자 르니엘이 강렬한 눈빛으로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용사님! 저는 뭘 하면 될까요?!”
“……여기서 활이나 쏴.”
“넵! 목숨 걸고 용사님의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는 르니엘. 에단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그때, 정면에서 방대한 마나가 휘몰아쳤다. 한참 전투 중이던 이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나 지켜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네.”
살벌한 목소리가 에르미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불쾌한 기분을 대변하듯 그녀의 주위에는 마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말에는 나도 동감이군.”
데아티르도 노기가 서린 얼굴로 에단 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지금 이게 뭐 하는 행패지? 내가 그렇게나 우스운 건가?”
데아티르가 가면을 벗어 던졌다. 두 대마법사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은 에단이 휘파람을 불었다.
‘제대로 된 마법사는 다르다 이건가.’
에단이 겪은 수준 높은 마법사는 리치였던 베오드라도밖에 없었다.
수준만 놓고 보면 베오드라도의 수준이 저들보다 더 높을 것이다. 그의 본질은 ‘지하’에 속해 있었으니.
대마법사 둘의 살기가 에단에게 쏟아지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르니엘이었다.
“같잖은 인간 새끼들이……!”
르니엘이 쌍심지를 켜며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뒤에 있던 수많은 엘프 전사들이 모두 활을 들었다. 광풍이 휘몰아쳤다.
에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르니엘을 바라봤다.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뭔가 기억과는 조금 엇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르니엘은 엘프 전사들과 달리 활을 쥐고 있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손에 무형으로 된 활과 화살이 들렸다. 르니엘이 표적을 설정했다. 표적은 감히 용사에게 어금니를 드러내는 인간 두 명.
르니엘이 활시위를 당기자 폭풍이 휘몰아쳤다. 꽤나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에르미온의 붉은 머리칼이 휘날렸다.
‘……이거 쉽게 볼 상대가 아닌데?’
경지에 오른 마법사인 그녀이기에 알 수 있었다. 르니엘에게서는 위험한 기류가 느껴졌다.
에르미온이 힐긋 시선을 던졌다. 난전 상황이었지만 전세는 기울고 있었다.
양 떼 속에 뛰어든 늑대처럼 블란테가 내부를 휘젓고 있었다.
‘이거 위험한데.’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기에는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고.”
그녀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마나의 기류가 휘몰아쳤다. 그것을 보며 르니엘이 활시위를 당겼다.
“음……. 저도 뭔가를 해야겠죠?”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에르미온이 획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마나의 구성이 흩어졌다. 강한 충격을 받은 에르미온이 뒤로 물러났다.
‘이게 무슨!’
감히 자신의 마법을 강제로 끊어 버리다니. 직접 겪고도 믿기지 않는 상황이다.
같은 경험을 한 것은 에르미온 만이 아니었다. 데아티르도 부릅뜬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르미온과 데아티르의 시선이 교차했다.
‘둘을 동시에 끊었다고?’
이건 더더욱 납득이 안 되는 상황이다. 그들이 목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눈을 돌리자 헨리가 물끄러미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게 저항하지 마시라니까.”
헨리가 미소를 지었다.
그 천진한 미소에 두 대마법사는 섬뜩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