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블랙마켓 (10)
집채만 한 크기의 마석이 모습을 드러내자, 몇몇 사람이 입을 크게 벌렸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대부분의 관중들은 마석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1,000골드.”
입찰이 시작됐고, 시작부터 엄청난 거액이 튀어나왔다.
관중들의 얼굴이 굳었다.
“1,500골드.”
입찰에 경쟁이 붙기 시작했다. 마석의 가치를 알아본 소수의 인원만이 경쟁적인 입찰을 시작했다.
“2,000골드.”
2,000골드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내뱉자 사람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무리 자산이 많은 귀족이나 왕족이라고 한들 2,000골드는 쉽게 거론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입찰 경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2,500골드.”
“3,000골드.”
“4,000골드.”
“5,000골드.”
입이 떡 벌어지는 거액을 무덤덤하게 내뱉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마, 마석이라고?”
“저게 대체 뭐길래 저래?”
미스릴이나 아다만티움 같은 모두가 알법한 희귀한 광물이 아닌, 마석이라고 불리는 비교적 생소한 광석이 저런 가치를 보이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메이와 한니발은 시선을 돌리며 입찰하는 이들을 바라봤다.
‘예상하던 대로군.’
붉은 머리칼을 지닌 여성, 그리고 정반대의 푸른빛 머리칼을 단정하게 넘긴 남성.
‘마탑과 아큐르.’
두 집단의 주인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대륙에 양립하는 마법 집단이다.
그런 집단의 주인들이 저 마석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 외의 몇몇이 입찰을 시도하려 들었지만, 과열되는 경쟁에 혀를 내두르며 발을 뺐다.
그렇게 경쟁은 심화되어 만 골드를 향해 가는 순간.
“2만 골드.”
제삼자가 갑작스레 천문학적인 금액을 불렀다. 경매사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2만 골드라는 금액에 입찰을 경쟁하던 아큐르의 데아티르와 마탑의 에르미온도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자 한니발과 메이도 자연스레 그쪽을 바라봤다.
‘저자들은…….’
“카이제르인 것 같군요.”
메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니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재밌는 구경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럴 것 같습니다. 카이제르가 어째서 마석을 탐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이번 물건은 카이제르가 낙찰받겠네요.”
한니발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마탑과 아큐르의 목적은 마석이 아니다.
마석의 가치를 알고 경쟁 상대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입찰가를 높게 불렀지만, 결국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석이 아닌 드래곤의 관한 정보일 터.
‘여기서 가진 재화를 전부 소진할 생각은 없겠지.’
반면 카이제르는 입장이 달랐다.
‘검술 명가 카이제르.’
최근 들어 급부상하는 가문이다.
대륙에 존재하는 또 다른 검술 명가인 블란테와 차이점이 있다면, 대륙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었다.
제국과도 많은 교류를 하며 급격히 성장한 카이제르는, 어느덧 세간에서 블란테의 대항마라는 평을 받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세간의 반응일 뿐이지만.’
소문은 언제나 과장되기 마련이었다. 한니발은 두 눈으로 직접 보거나, 확실한 증거가 있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한니발이 느끼기에 카이제르는 미심쩍은 게 많았다.
너무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했고, 유명세를 떨치기 위해 너무 많은 투자를 하고 있었다.
결과로 입증한 것이 아닌, 돈과 정치로 일궈 낸 자리였다.
한니발로서는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어찌 됐건 마석은 카이제르의 수중에 떨어졌군.’
하지만 저것을 온전히 카이제르가 가져가게 될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였다.
곧 있으면 ‘그들’이 개입할 예정이었으니.
데아티르와 에르미온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다시 단상을 바라봤다. 정신을 되찾은 경매사가 진행을 이어 나갔다.
“나, 낙찰자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럼 이 열기가 식기 전에 곧바로 다음 상품을 선보이겠습니다!”
다음 상품은 엘프 무리였다.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들에게는 용도를 알기 어려운 광석 덩어리보다, 살아 있는 엘프가 더욱 가치 있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곧바로 경쟁이 붙었다. 엘프들은 자신들을 구매하려는 광기 어린 모습을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용사님의 말씀이니 참고 있겠지만.’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은 어쩔 수 없었다. 르니엘의 눈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낙찰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자, 다음 경매에 앞서 잠시…….”
한참 동안 뜨겁게 달아오르던 엘프들의 경매가 끝났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에르미온이 붉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이, 이봐. 나 바쁜 몸이거든? 알아보든지 말든지 상관없고, 내가 뭣 때문에 이런 음습하고 기분 나쁜 곳까지 찾아왔는지 알아?”
에르미온이 불편한 심기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녀의 주위에서 사나운 기세가 넘실거리며 흘러나왔다.
“나도 같은 입장이다.”
데아티르 또한 짜증 어린 목소리로 경매사를 응시했다. 두 대마법사의 매서운 시선에 경매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거,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곧바로 원하시는 상품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윽고 준비가 끝나자 경매사가 천막을 걷었다.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드워프들이었다.
“……지금 장난해?”
에르미온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렸다. 그녀의 눈에서 귀화가 타올랐다.
그녀의 형형한 안광에 사색이 된 경매사가 곧바로 첨언했다.
“그 정보는 이 드워프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에르미온의 분위기가 진정됐다. 평온을 되찾은 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 확실하겠지?”
“화, 확실합니다.”
경매사가 식은땀을 닦으며 드워프들을 노려봤다.
“이 자식들아! 빨리 대답 안 해?!”
경매사가 드워프들을 향해 윽박을 내질렀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이, 이게 아닌데?’
경매사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상품에 대한 점검은 이미 사전에 끝내 놨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드래곤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하던 드워프들이 지금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지?”
에르미온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넘실거리자, 블랙마켓의 관계자들은 난색을 표했다.
에르미온은 마탑의 탑주였다.
그녀가 본심을 드러내면 이 자리에서 저지할 수 있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에르미온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이들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일촉즉발의 상황임에도 한니발은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 순간.
쾅! 콰과광!
천장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위에서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지며 지면이 요동쳤다.
“뭐, 뭐야 이건?!”
사람들이 순식간에 패닉에 빠졌다. 갑작스러운 이변이다.
“관계자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는 것은 블랙마켓의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경매사가 허둥지둥하고 있을 때.
쾅!
천장에 큰 구멍이 뚫리며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신원 불명의 인간들이 단상에 착지했다.
“지, 지금 뭐 하는 짓거……!”
뻥!
로브를 뒤집어쓴 무리를 뚫고 나온 에단이 경매사를 걷어찼다. 데굴데굴 구르며 나가떨어진 경매사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에단이 거만한 미소를 머금은 채 소리쳤다.
“이곳은 이제 우리 블란테가 접수했다! 사지 멀쩡하게 돌아가고 싶으면 저항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에단이 로브를 쓴 기사들을 향해 턱짓하자, 한숨을 내쉰 첸과 기사들이 로브를 벗어던졌다.
촤악!
로브가 벗겨지며 검은 갑옷과 가슴에 새겨진 사자 문양이 빛을 발했다.
사람들의 입이 벌어졌다.
“지, 진짜 블란테잖아!”
“블란테가 여길 왜 와?”
“제기랄 보안 유지를 어떻게 한 거야!”
혼비백산하는 장내를 바라보던 에단이 천장을 가리켰다.
“섣부르게 움직여 봐.”
쿠구구구구!
지면이 한 차례 더 요동쳤다. 천장에 금이 그어지며 돌가루가 바닥에 떨어졌다.
“여기서 생매장당하고 싶으면.”
에단의 경고에 그제야 사람들은 상황을 인지했다.
진퇴양난.
몰릴 대로 몰려 버렸다. 도망갈 구석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오!”
그때, 노호성을 터트리는 남자가 있었다.
그가 가면을 벗어 던졌다.
상당한 권력을 지닌 귀족인 탓에 몇몇 인물이 그를 바로 알아봤다.
“아무리 블란테라고 한들 권한 없이 이따위 행패가 가당키나 할 것 같소?!”
윽박을 지르는 귀족의 모습에 용기를 얻은 자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맞아!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번 일은 정식으로 항의하겠소!”
이어지는 고성에 에단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를 후볐다.
“누가 우리 멋대로 사태를 키웠대?”
에단이 뒤편에 서 있던 칼베리안의 어깻죽지를 잡아끌며 앞에 세웠다.
칼베리안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내 날카로운 눈빛으로 장내에 모두를 노려봤다.
“제국의 2황자인 나, 칼베리안이 이 사태를 직접 목도했다. 내 몸에 흐르는 피에 맹세하고 증언하지. 너희들은 모두 시민들 앞에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칼베리안의 음성은 크지도 작지도 않았지만, 장내를 휘몰아쳤다. 모든 자들이 칼베리안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잘하는데.’
에단이 칼베리안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유약하게만 보이던 칼베리안은 지금 군주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었다.
금발 벽안의 미려한 외모.
칼베리안을 알아보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황제의 피를 이은 자. 그 피가 가지는 신성함과 권위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2황자의 등장으로 상황이 반전되자, 사람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아직 반전을 노릴 기회는 남아 있었다. 2황자는 황제의 피를 이었지만, 실권은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세력도, 가신도, 뒷배도 하나 없는 2황자라면.
‘여기서 2황자를 처리하면.’
상황을 무마시킬 수도 있었다.
뒤탈이 없다는 보장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붙잡히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에단은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채며 코웃음을 쳤다.
“얼마나 네가 만만했으면 대놓고 저러겠냐?”
“…….”
칼베리안은 치욕적인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에단이 가볍게 몸을 풀었다. 에단이 차게 식은 눈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감당할 자신은 있겠지?”
에단의 말에 블랙마켓의 관계자들과 귀족들의 호위 기사들이 각자 무기를 들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감히 2황자를 사칭하는 정신 나간 놈들을 척살하려 하는 것인데 말이야.”
“오, 배짱은 좋아.”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모두 2황자가 보잘것없어서 벌어진 일들이다.
하지만 지금 저들이 놓치고 있는 게 있었다.
그들 앞에는 2황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투태세를 갖춰라.”
첸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모든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우득, 우드득.
에단이 목을 풀었다.
2황자가 뒷배가 없다고?
그건 이제 옛말이다.
“검을 뽑아?”
감히 블란테를 앞에 두고?
에단이 사납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