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블랙마켓 (8)
메이와의 대화를 끝낸 에단은 빈센트에게 연락했다.
“그간 강녕하셨나요?”
에단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수정구 위에 떠오른 빈센트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게냐?
“자식 된 도리로써 안부 인사를 먼저 묻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능글맞은 에단의 대꾸에 빈센트가 미간을 좁히며 답했다.
― 본론부터 말하거라.
“첸 경과 기사단은 출발했습니까?”
― 그래. 곧 있으면 도착하겠지.
빈센트의 말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은 첸과 기사들을 장이 열리는 블로란 영지로 부르지 않았다.
그들이 향하는 장소는 체이베르. 에단이 이전까지 체류하고 있던 도시였다.
‘괜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겠지.’
블란테는 어디에서나 껄끄러워하는 대상이다.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믿고 있었습니다.”
― 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만해라. 그건 그렇고…….
빈센트가 종이 하나를 꺼내 수정구 앞에 흔들었다.
“그게 뭡니까?”
― 소환장이다.
‘때가 왔군.’
슬슬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에단은 그리 놀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발신인은 제국이겠죠?”
― 그래. 우리를 우습게 보는 것 같더군.
“그동안 잠자코 있었으니까요. 슬슬 우리가 누군지 보여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 ……건방진 놈.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별다른 대응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찾아갈 거니까요.”
― 흠, 자신 있느냐?
빈센트의 물음에 에단이 히죽 웃었다.
“제가 언제 자신 없어 한 적 있습니까?”
확신 어린 에단의 대답에 썩 마음에 들었는지 빈센트가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 날짜는 일주일 뒤, 내용은.
빈센트가 다시 한번 서신을 대강 훑었다. 작게 코웃음 친 빈센트가 오러를 끌어 올려 서신을 순식간에 불태웠다.
‘워우.’
역시 대단하신데.
마스터 끝자락에 다다른 빈센트답게 놀라운 퍼포먼스였다.
― 한 방 먹이고 오거라.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나저나 리사랑 붙어 있어서 그런지, 영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 ……허.
장난기 어린 에단의 말에 빈센트는 기가 찼다.
이 상황에서도 농담이나 던지다니.
빈센트는 에단을 바라보며 고개를 젓다가 그대로 연결을 끊었다.
“솔직하지 못한 양반 같으니라고.”
씨익 웃은 에단이 몸을 일으켰다. 주변 인물들이 눈을 끔뻑거리며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
칼베리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제정신이 아닌 놈이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설마 빈센트에게까지 저런 태도를 고수할 줄은 몰랐다.
빈센트가 누구인가. 변방의 흑사자라고 불리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대륙 최강자라 불리며, 무릇 검을 든 자라면 모두가 선망하는 사람이 바로 빈센트였다.
설령 제국의 황제라고 할지라도 블란테의 주인인 빈센트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아무리 에단이 블란테의 적통이라고 한들 가주인 빈센트에게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다들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고, 입맛을 다시던 에단은 한니발을 향해 말했다.
“들었지? 기사단은 곧 도착한다.”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런데…….”
“신경 쓰지 마. 딱 적절한 시기니까 말이야.”
자신만만해 보이는 에단의 태도에 칼베리안이 혀를 내둘렀다.
“담 하나는 정말 대단한 놈이군. 대체 뭘 믿고 그럴 수가 있지?”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어?”
칼베리안의 물음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에단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당연히 나를 믿는 거지.”
* * *
중앙 회의.
정기적으로 제국에서 열리는 이 회담은 각국의 정상들과 중요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거대한 규모의 회담이다.
대륙이 힘을 합치게 된 이유이기도 한 이 회담의 중심에는 언제나 제국의 황자인 크리스토가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각국의 인사들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그들 모두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자 불만은 이내 사그라들었다.
크리스토는 턱을 괸 채 권태로운 기색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일국의 왕과 대공, 공작의 위치에 올라 있는 대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본래라면 황태자도 되지 못한 1황자는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크리스토는 태연하게 중앙 회의의 중심부에 자리해 있었고, 각국의 왕과 귀족들은 모두 크리스토의 눈치를 살폈다.
크리스토는 주위를 흘겨보더니 입을 쩍 벌리며 나른한 하품을 내뱉었다.
“흐아암∼ 뭐 해? 시작 안 하고.”
크리스토의 말에 진행을 맡은 늙은 공작이 입을 열었다.
“바쁘신 분들을 이렇게 소집한 이유는 다들 아시다시피 아카데미에 관해서입니다.”
“검밖에 모르는 야만인 새끼들이 아카데미를 점유하고 있다지?”
“원래 아카데미의 운영을 맡고 있던 자는 대체 무얼 하고 있던 거요?”
“듣자 하니 잠적을 했다더군. 이래서 근본 없는 것들에게 중책을 맡기면 안 되는 건데. 쯧.”
“허, 그건 그렇고 무력 집단이 중립 단체인 아카데미를 힘으로 불법점거하고 있는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오?”
“지금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 이렇게 모인 것 아닌가. 너무 흥분하지 마시게.”
“지금 흥분을 안 하게 생겼소! 장차 나라의 중축을 맡을 인재들을 모아 둔 아카데미를 검밖에 모르는 야만인들이 차지하려고 드는데!”
“명분은 블란테에게 있소. 이야기 못 들었소?”
“그깟 명분! 고작해 봐야 학생 몇 명과 교수들의 증언이 전부 아니오! 지금 되도 않는 증언 몇 마디 들었다고 어영부영 넘어가겠다 이거요?”
“허, 보자 보자 하니까 말이 과하시군! 그렇게 자신 있다면 당신이 블란테를 상대로 정식으로 항의를 하지 그랬소!”
“…….”
할 말을 잃은 귀족 하나가 입을 다물었다. 진행을 맡은 귀족은 가식적인 미소를 걸친 채 상황을 중재했다.
“자자, 너무 흥분하지는 마시죠. 지금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이렇게 모이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데아티르, 그자는 왜 자리에 없는 거요?”
“……데아티르 님은 사정이 있어서 이번 중앙 회의에는 불참한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허! 누구는 한가해서 이렇게 모인 줄 아는 건가? 마법 좀 쓴다고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군!”
회의실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상황을 중재시키던 귀족도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을 때, 목소리 하나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시끄럽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고저 없는 평탄한 목소리.
하지만 그 음성은 회의에 참석해 있는 모든 이들이 똑똑히 들었고,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모든 시선이 지루함이 짙게 낀 크리스토의 얼굴로 몰렸다.
“뭐가 그렇게 문제지?”
크리스토가 물었다. 질문한 대상은 가장 열을 올리고 있던 중년 귀족이었다.
귀족은 크리스토의 물음에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크리스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재차 물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나 보네? 뭐가 문제냐고 물었어.”
“그, 그것이…….”
귀족이 떨리는 눈을 굴리며 도움을 구하는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시선을 외면했다.
‘이런 썩을 놈들이!’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하지만 여기서 언성을 높이면 제 무덤을 파는 꼴이었다.
귀족이 안절부절못한 채 서 있었다.
크리스토는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손을 들었다.
까딱까딱.
“이쪽으로 와 봐.”
귀족의 눈이 공포로 젖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감히 크리스토의 말을 거역할 자신은 없었기에 천천히 크리스토 앞에 다가갔다.
덜덜덜.
귀족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 왔다. 크리스토는 물끄러미 귀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가까우니까 내 목소리가 들리겠지?”
“…….”
“그래서 대답은?”
“죄, 죄송…….”
촤악!
그 순간 귀족의 목에 실선이 그어지며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광경에 자리에 앉은 모든 이들이 눈을 감았다.
털썩.
귀족이 무릎을 꿇으며 허무하게 쓰러졌고, 이내 귀족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
크리스토가 눈살을 좁혔다. 그가 입은 화려한 의복이 피로 적셔졌다. 금빛 머리와 하얀 얼굴에도 군데군데 피가 묻어 있었다.
“이제 좀 조용한 것 같네.”
크리스토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운 침묵이 내리깔렸고, 분위기는 순식간에 냉각되었다.
한 나라의 고위 귀족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아카데미야 어차피 소환장 보냈잖아? 곧 답변이 오겠지. 오지 않으면 뭐……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는 거고.”
크리스토가 씨익 미소 지었다. 피 묻은 얼굴로 짓는 미소는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건 그렇고 다들 들었겠지? 내 동생이 황성에서 자취를 감춘 거.”
“…….”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섣부르게 입을 열지 못했다. 크리스토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모르는 척 안 해도 돼. 알 사람은 다 알 거라 생각하니까. 이제야 좀 재미있어지는 것 같지 않아?”
툭툭.
크리스토가 책상을 두드렸다. 주위는 고요했다. 들리는 것은 오직 일정한 두드림 소리뿐이었다.
“이 중에서 있을지는 모르지만 부탁 하나 할게.”
크리스토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푸른 시선이 지나갈 때마다 모든 이가 몸을 움찔거렸다.
“재미없게 빨리 걸리지 마.”
크리스토가 유쾌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 * *
어둠이 드리웠다.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제 일과를 시작하려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장이 열릴 시간이다. 블랙마켓, 혹은 암시장.
여러 명칭으로 불리는 이 음지 속에서 열리는 장은 철저한 보안 속에 열리게 된다.
블랙마켓의 존재를 아는 드물다. 선택받은 이들만이 도심의 이면을 볼 수 있다.
장이 열리는 시기는 일정했지만, 장소는 일정하지 않았다.
이번 장소는 평소처럼 번화한 도시가 아닌, 낙후된 영지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규모는 역대급이었기에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블랙마켓은 철저한 익명성이 보장된다. 하지만 물건을 파는 이도, 사는 이도 같은 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탐욕.
그들은 모두 욕망에 잠식당한 이들이었다.
이례적으로 지하 공간에서 열린 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모두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들이었다.
평범하던 갱도가 화려하게 꾸며졌다. 길가에서 상품을 진열해 놓는 노점조차도 범상치 않은 물건들로 가득했다.
분위기는 시끌벅적했으나, 한편으로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얼굴은 가리고 있었지만, 기세는 숨길 수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거물들이 넘쳐 나고 있었다.
한니발은 지금 귀빈 대접을 받고 있었다.
한니발은 호위라는 명목으로 사자탈을 쓴 렉사르와, 강아지 탈을 쓴 휴고와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숨이 막히는군.’
한니발은 둘 사이에서 비교적 평범한 무도회 가면을 쓰고 있었다.
흐르는 기류가 범상치 않았다. 분위기를 읽는 것에 능한 한니발은 둘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안심은 된다만…….’
둘의 무력은 알고 있었다. 마스터급 상대가 아니라면 한니발을 위협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
양옆에 있는 렉사르와 휴고의 교차하는 눈빛에서 불똥이 튀는 것 같았다.
‘……그전에 질식하겠어.’
한니발이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