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블랙마켓 (6)
에단이 준비할 것이 있다고 하며 사라진 동안, 한니발은 모든 준비를 갖췄다. 일정을 최대한 당긴 결과, 이틀 뒤 장이 열리게 되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군.’
에단이 그리고 있는 그림은 처음 한 예상보다 점점 스케일이 커지고 있었다.
잔뼈 굵은 거상인 한니발도 이 정도 스케일은 처음 겪었다.
마석, 드워프, 엘프 심지어 드래곤까지.
여태껏 겪어 본 적 없는 스케일이었다. 심지어 굉장히 타이트하게 잡은 일정이라 주어진 시간도 얼마 없었다.
툭. 툭.
한니발이 책상을 두드렸다.
가지고 있는 것들만으로도 여태껏 없던 규모의 장이 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명분은 확실하지만 그를 뒷받침할 세력이 부족하군.’
이번 일을 통해 블란테는 대륙의 표적이 된다.
엘프 같은 이종족들의 지지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결국 대륙의 정세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인간들의 국가였다.
블란테는 아카데미를 거점 삼고 있었다. 대륙의 국가들 입장에서는 적지 않은 위협으로 느낄 테고 서로 똘똘 뭉칠 것이다.
‘공동의 적은 연합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 테지.’
과연 그들을 분열시킬 수 있을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한니발과 에단은 한배를 탔다.
이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계획을 무사히 성공시켜야 했다.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야.’
어마어마한 크기의 마석.
‘그 녀석’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갑작스레 연락이 끊기고 잠적한 이들이지만, 거대한 마석의 대한 소문이 퍼진 이상 그들은 반드시 관심을 가질 것이다.
‘숨어서 힘을 기르고 있을 녀석들이 과연 어떻게 대응할지는 모르겠지만.’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거물 둘과 블란테의 행차가 예정되어 있다.
제아무리 그자들이 파멸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섣부르게 행동했다가는 도리어 덜미를 붙잡히게 될 것이다.
‘예측할 수가 없어.’
판이 커져도 너무 커졌다. 상황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는 탓에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두통이 몰려왔다.
‘……믿을 수밖에 없지.’
물은 엎질러졌고, 이제는 에단을 믿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과연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한니발이 창밖에 떠 있는 달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때.
“뭐 하고 있냐?”
갑자기 에단의 얼굴이 창문 밖에 떠올랐다.
한니발이 멍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사람이 너무 놀라게 되면 반응을 못 하게 된다는 것을 한니발은 그때 처음 겪었다.
“……허억!”
이윽고 한니발이 헛숨을 들이켜며 뒷걸음질 쳤다.
드르륵.
에단이 자연스럽게 창틀을 열어젖히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식겁한 얼굴의 한니발을 보며 에단이 피식 웃었다.
“놀라기는.”
‘……그걸 놀라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입니다.’
반박할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결국 생각으로 그쳤다. 한니발이 한숨을 푹 내쉬며 에단을 향해 물었다.
“……말씀하신 준비는 무사히 끝나셨습니까?”
“보면 몰라?”
에단이 축 늘어진 무언가를 짤랑거리자 한니발이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시체인가요?”
“멀쩡히 살아 있어.”
아무리 봐도 시체 같은데…….
한니발이 눈살을 좁히며 축 늘어진 무언가를 바라봤다. 유심히 바라보니 미약하게 숨을 쉬는 게 보였다.
‘입에는 거품이 물려 있고, 눈은 뒤집혀 있군.’
측은지심이 절로 생기는 모습이었다.
“이자는 누구입니까?”
“황자.”
“……네?”
“황자라고. 2황자.”
“……하하,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농담 아닌데? 야, 일어나 봐.”
에단이 칼베리안의 뒷덜미를 붙잡은 채 정신없이 흔들었다.
흔들흔들.
한니발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안 일어나지?”
에단이 손에 힘을 더하자 칼베리안의 몸이 더욱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 순간 칼베리안의 눈이 돌아왔다.
“허억!”
“정신 차렸네.”
에단이 붙잡은 손을 놓았다. 철퍼덕 바닥에 쓰러진 칼베리안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여긴 대체……?”
“도착했으니까 이제 정신 좀 차려라.”
엎드린 채 상황 파악을 하던 칼베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가만히 지켜보던 한니발과 눈이 마주쳤다.
둘의 동공이 흔들렸다.
한니발이 에단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설마…… 진짜였습니까?”
“그럼 거짓말이겠냐?”
한니발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 * *
칼베리안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한니발은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에단을 바라봤다.
“왜 사람을 그렇게 쳐다봐?”
“……아닙니다.”
시선을 피한 한니발이 헛웃음을 지었다가 칼베리안을 응시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질문이었고, 칼베리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 평생을 감시당하며 꼭두각시로 사는 것보다는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칼베리안의 대답에 한니발이 고개를 끄덕였다.
2황자가 제국 내에서 어떠한 입지를 가지고 있는지 한니발도 모르지 않았다.
‘나였어도 이번 기회는 놓치기 힘들었을 테지.’
한니발이 새삼스러운 눈초리로 에단을 바라봤다. 설마 또 다른 패로 2황자를 준비해 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놀랍군.’
이제 모든 게 충족되었다. 더는 부족한 게 없었다.
“그럼 예정대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러자고. 얘가 지낼 곳도 적당히 마련해 두고.”
“알겠습니다.”
에단이 고개를 돌려 칼베리안을 바라봤다. 칼베리안은 지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날이 밝으면 또 시작할 거니 각오하고 있어.”
“……제길.”
칼베리안이 얼굴을 구겼다.
* * *
잭슨이 세계의 중심에서 나와 블로란을 향한 여정에 올라섰다. 잭슨의 얼굴에는 아직도 얼떨떨함이 남아 있었다.
‘……뭐지 이게.’
에단을 몇 차례 언급하며 이름을 파니 성대한 환대를 받았다. 반신반의 정도가 아닌, 아예 의심을 가진 채 찾아온 잭슨이다.
‘그 사람이 용사라고?’
잭슨은 에단의 본 모습을 알고 있다. 사악하기 그지없는 미소와 행실을 떠올리자 절로 몸이 떨렸다.
‘……차라리 마왕이 어울릴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용사랑은 괴리감이 심했다. 뭐 어찌 됐든 간에 잭슨은 무사히 엘프들의 동의를 구하게 됐고, 엘프 몇몇과 함께 여정에 올랐다.
“용사님을 볼 생각을 하니 벌써 설레네.”
르니엘이 초롱초롱한 눈을 빛냈다. 잭슨은 그런 르니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역시 무언가 잘못되어 있어.’
다시금 그런 생각이 강하게 치밀었다.
잭슨이 마음을 비운 채 발걸음을 옮겼다. 블로란과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는 않았으나, 가깝지도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차라도 준비해 올 걸 그랬네.’
이렇게나 순순히 따라 나올 줄은 예상치 못한 탓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다.
도보로 가기에는 꽤나 무리가 있는 거리였기에 잭슨은 적당한 장소에서 경유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음?”
그 순간, 멀리서 다가오는 무리를 본 잭슨이 눈살을 좁혔다.
‘상단인가.’
마차의 모습을 보아 상단 무리로 보였다. 하지만 접근하는 분위기는 그다지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익숙한 눈빛이었다. 탐욕에 젖어 번들거리는 눈.
잭슨이 인상을 구겼다. 그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려는 순간.
“역겨운 놈들.”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잭슨이 고개를 돌렸다. 르니엘이 싸늘한 눈초리로 다가오는 자들을 바라봤다.
스윽.
르니엘이 손을 들자 바람이 일렁였다. 형상은 보이지 않았으나, 르니엘이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는 건 확실히 느껴졌다.
이윽고 팽팽한 시위를 놓았다. 바람이 휘몰아치며 막강한 자취를 남겼다.
쐐애액!
무형의 화살들이 용병들의 미간을 관통하자, 용병들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히이잉!
마차를 몰던 이가 바닥에 쓰러지자 말들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무, 무슨 일이지?”
그러자 마차 안에서 거대한 살집에 파묻힌 남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타닷!
그 순간 잭슨이 지면을 박찼다. 이미 사태를 수습하기는 늦었다.
‘생김새와 옷차림. 마차의 문양, 용병들.’
사태 파악은 끝냈다. 질이 안 좋기로 유명한 용병들이었다. 그리고 저 살에 파묻혀 있는 녀석은 악명 높은 노예 상인이었다.
“히, 히익!”
노예 상인이 사색이 된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잭슨의 손속이 더욱 빨랐다.
서걱.
파묻힌 목이 잘리며 노예 상인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잘 드네.”
실전에서 처음 휘둘러보는 칼이었다. 칼의 성능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잭슨이 주위를 둘러봤다. 시신이 열구를 가뿐히 넘었다. 마차 안을 둘러봤지만 다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엘프들이 잭슨을 향해 다가왔다. 잭슨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말했다.
“……마차가 생겼네요?”
예상 못 한 수확이 생겼다.
* * *
“……이상입니다.”
보고를 들은 마탑의 탑주 에르미온이 발목을 까닥거렸다. 일흔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에르미온의 외모는 아직 이십 대처럼 보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붉은 머리에서는 윤기가 흘렀고, 머리색과 같은 붉은 눈 주변에는 주름 하나 없었다.
그러나 외모와 다르게 그녀의 눈빛에는 연륜이 있었다.
“믿을 수 있는 정보야?”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언급된 것이…….”
“흐음, 드래곤이라…….”
에르미온이 말끝을 흐렸다. 정보의 출처는 모호했으며 신빙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마탑의 주인인 에르미온은 무시할 수가 없는 사안이었다.
드래곤.
마법의 종주라고 불리우는 위대한 종족.
모든 마법사가 꿈에 바라는 경지에 처음부터 올라가 있는 존재.
드래곤이 실존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수많은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래곤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자취를 감췄다.
드래곤이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기간이 벌써 수백 년에 다다랐다.
마법사들은 갈증을 느끼는 족속이다.
일평생을 탐구에 매진하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조차도 내건다.
“드래곤에 대한 정보라.”
무형의 상품이다. 만일 다른 사안이었다면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정도의 검증되지 않은 정보였다.
하지만 언급되는 상품이 다름 아닌 드래곤.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 정보가 사실로 밝혀지고, 드래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면.
“노인네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
“아마 그럴 겁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미온이 고운 미간을 좁혔다.
“그럼 결과는 정해졌네. 혹시라도 그 노인네가 드래곤의 비늘 하나라도 얻게 되면 내가 무슨 짓을 벌일지 가늠이 안 되거든?”
에르미온의 붉은 눈이 타오르는 것처럼 이글거렸다. 그녀에게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륙에 유일한 경쟁자인 마법 명가 아큐르에게 밀리는 것이다.
‘그 노인네가 기회를 잡는 것은 죽어도 못 봐!’
아무리 희박한 확률이라고 할지라도 그럴 확률이 있다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정보가 팔리는 장소가 블랙마켓이라고?”
“그렇습니다.”
“쯧, 또 하필 역겨운 곳에서 하고 앉았네. 일단 준비해. 가용할 수 있는 재산은 죄다 끌어모아. 필요하면 채권까지 쓸 거니까”
“……그렇게까지 말입니까?”
“장난해? 재산을 다 털린다고 해도 그 개구리 새끼한테는 못 넘겨.”
에르미온의 사나운 눈초리에, 남자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