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블랙마켓 (5)
야심한 새벽, 제국의 황성에서는 적잖은 소란이 일었지만, 황실은 빠르게 상황 파악을 끝냈다.
큰 소란과 함께 자취를 감춘 2황자, 그리고 남겨진 서신.
서신을 확인한 기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오늘 2황자의 감시를 맡은 자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제, 제기랄! 왜 이제 와서 갑자기!’
2황자에 대한 원망이 치솟았다. 그간 2황자는 두문불출하며 쥐죽은 듯 조용히 살아갔다.
당연히 감시를 맡은 이들의 경계도 사그라들었다.
어차피 방 안에서 은거하는 2황자에게 관심을 쏟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심력 낭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다른 기사들 사이에서도 지루하기 그지없는 업무라고 말이 나오겠는가.
‘그런데 왜 하필 내가 맡을 때!’
상황을 무마시키기에는 늦었다. 벌써부터 많은 인기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사가 이리도 초조해하는 이유는 1황자 때문이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1황자의 잔혹한 성정은 황실 내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이유를 막론하고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게 만든 이는 목숨을 잃었다.
상대의 작위나 위치 따위는 상관없었다. 명실공히 황위 계승권자인 1황자가 휘두르는 검을 막을 수 있는 이는 황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1황자가 두려운 이유는 단순히 포악함만이 아닌, 그가 가진 일신의 무력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아직 약관의 나이임에도 1황자는 무신의 재능을 타고났다.
잔인하고 냉혹한 성징과 더불어 뛰어난 재능과 유력한 계승자로서의 지위.
1황자의 반대파는 황실에 남아 있지 않았다.
1황자는 실권을 쥐고 있고, 아직 제위를 잇지 않았음에도 거슬리는 정적들을 숙청해 나갔다.
사실상 제국은 1황자의 손에 떨어졌다. 그나마 1황자가 경계할 유일한 인물은, 같은 황제의 피가 흐르는 2황자뿐이었다.
2황자는 모든 면에 있어서 1황자와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하나, 황제의 피를 이었다는 것 단 하나만으로도 이용 가치는 충분했고, 그것을 노리고 2황자에게 접근하는 이들도 있었다.
1황자는 그 사실을 묵과하지 않았다. 사사로운 것을 트집 삼아 세력을 일구려는 귀족들을 모조리 참수시켰다.
그 뒤로 감히 1황자에게 대적하려는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이들은 황실에 남아 있지 않았다.
타다닷.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기사의 몸이 굳기 시작했다.
척!
무장을 갖춘 기사들이 절도 있게 정렬했고, 이내 길이 트였다.
터벅터벅.
느릿하고 권태로운 발걸음. 어두운 복도에 푸른 안광은 형형하게 빛났다. 1황자의 무심한 눈빛은 스산하면서도 소름 끼쳤다.
기사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설마 이 시간에 본인이 직접 모습을 드러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흐음, 무슨 소란이지?”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가 고개를 돌려 입을 벌렸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자, 작은 착오가 있었던…….”
“말이 기네.”
촤아아악!
고개를 돌린 기사의 눈에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서신을 들고 있던 자신의 팔은 어느새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기사가 멍하니 매끈하게 잘린 팔을 바라봤다.
그 순간 화끈한 통증이 치밀었다.
“끄아…….”
기사가 비명을 내지르려는 순간 그의 목에 실선이 그어졌다.
툭, 데구르르.
깔끔하게 잘린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1황자 크리스토는 찰랑이는 금발을 뒤로 넘기며 중얼거렸다.
“내가 시끄러운 걸 싫어해서 말이야.”
무심하고도 태연한 목소리였다. 크리스토는 기사의 목숨을 취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했다.
어느새 크리스토의 손에는 기사가 들고 있던 서식이 들려 있었다.
종이의 곳곳에는 기사의 피가 튀어 있었다.
“불쾌하군.”
인상을 찌푸린 크리스토가 쓰인 내용을 가볍게 훑었다. 크리스토의 입가가 비틀렸다.
“……재밌네.”
설마 그 2황자가 이런 짓을 벌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지만, 화가 치미는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토는 지금의 삶에 권태를 느꼈다. 무엇 하나 그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 없었다.
2황자 칼베리안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썩 재미있었다.
‘여흥 거리가 하나 생겼군.’
권태감에 빠져 있던 크리스토에게 놀잇거리가 생겼다.
“적당히 쫓다가 돌아와.”
그때 정렬해 있던 기사 하나가 크리스토에게 물었다.
“……끝까지 쫓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음? 내 말을 이해 못 한 건가?”
툭.
기사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이 붉은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해력이 부족한 친구는 필요 없고, 나머지는 다 알아들었겠지? 적당히 쫓는 척만 하다가 돌아오라고.”
크리스토의 명령이 하달됐다. 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반론이나 의문은 제기할 수 없었다.
‘재미있으면 좋겠는데.’
크리스토가 미소를 머금었다.
* * *
에단의 트레이닝은 곧바로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2황자 칼베리안은 지금 처절한 괴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훈련에 임함에 있어서 에단은 엄격하기 그지없었다.
칼베리안은 불만을 토해 낼 수 없었다. 부탁을 한 이가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이게 맞는 건가?’
팔이 파들거렸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자세가 흐트러지면 에단이 발끝으로 칼베리안의 옆구리를 찔렀다.
칼베리안은 살면서 이런 모욕적인 처사는 처음 겪었다.
신하들도 은연중에 그를 비웃거나 무시하기는 했어도, 감히 대놓고 이렇게 대하지는 못했다.
몸이 떨리는 이유가 모욕감과 치욕스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근육이 한계에 다다른 것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블란테이기에 가능한 행동인가.’
제국의 주인인 자신의 아버지조차도 블란테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블란테는 목줄을 채울 수 없는 야수였다.
에단은 칼베리안을 대함에 있어 대수롭지 않게 행동했다. 격이 없이 하는 수준을 넘어 막 대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벌게진 얼굴로 구슬땀을 흘리던 칼베리안이 바닥에 엎어졌다.
“허억, 허억.”
칼베리안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동안의 삶에서 이렇게까지 몸을 혹사시킨 경험이 없었다.
“뭐 하냐?”
“……끝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 팔굽혀펴기는 끝이라고. 누가 누워 있으래?”
에단의 입에서 나온 날벼락 같은 소리에 칼베리안의 얼굴이 검게 물들었다.
그 이후 칼베리안은 낡아 빠진 여관방에서 스쾃과 윗몸일으키기를 하며 쉼 없이 몸을 움직였다.
에단은 허름한 침대에 걸터앉아 칼베리안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의지는 있네.’
적당히 굴리면 알아서 포기할 줄 알았지만 칼베리안은 예상외로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판자 바닥에 땀이 스며들었다. 에단이 물끄러미 훈련을 지켜보고 있을 때,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에단은 경계를 가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기운의 주인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스르륵.
“…….”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뚫고 헨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헨리의 얼굴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어떻게 잘 찾아왔네?”
“……잘도 저를 버려두고.”
대뜸 들려오는 목소리에 한창 스쾃을 하던 칼베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허억!”
칼베리안이 소리를 치려고 하자 순식간에 다가간 에단이 칼베리안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란을 벌이면 안 되지.”
“…….”
제압당한 칼베리안은 진정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이 손을 떼며 인상을 찌푸렸다.
에단의 손에 칼베리안의 땀이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지금 뭘 하고 있던 거예요?”
헨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에단과 칼베리안을 번갈아 바라봤다.
“보면 몰라?”
에단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헨리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정상이 아니야…….’
저건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헨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저 모습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헨리가 적당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뭘 어떻게 해. 계획대로 하는 거지.”
“……그 난리를 친 게 계획에 있었어요?”
“원래 적당한 즉흥은 필요한 법이야. 어쭈, 속도가 느려졌다?”
에단의 매서운 지적에 찔끔한 칼베리안이 열심히 움직였다. 헨리는 그런 칼베리안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칼베리안은 가녀린 선을 가진 미소년이었다.
윤기가 흐르는 금발과 우수에 젖은 푸른 눈, 백옥 같은 피부는 아리따운 여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마음 한편에 상처가 있는 것 같은 표정과 눈빛은 아련함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 머리는 땀으로 젖어 있었고, 붉게 물든 얼굴에는 짜증이 만연했다.
에단은 다리를 꼰 채 그런 칼베리안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래도 명색에 황자인데…….’
헨리에게 이제는 놀랄 기운도 없었다. 원래 에단이 그런 인물이려니 생각하게 된다.
‘세계수도 뽑아 버린 사람인데 뭐…….’
곁에 있으면 묘한 부분에서 무덤덤해진다. 그와 함께 있으면 그간 가졌던 고민들이 부질없이 느껴진다.
“됐어. 그만하면 됐어.”
에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칼베리안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칼베리안의 다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까짓 거 했다고 엄살이야?”
“……네가 한번 해 봐라.”
칼베리안이 이를 갈면서 에단을 노려봤다. 그의 귀여운 도발에 에단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풀쩍 도약한 에단이 검지로 물구나무를 섰다. 전신의 근육이 곤두서며 집중력이 극에 달했다.
에단의 상의가 흘러내리며 극한으로 단련된 근육이 여실히 드러났다. 근육의 결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보였다.
에단이 저항을 느끼며 천천히 팔을 굽혔다. 칼베리안의 입이 떠억 하고 벌어졌다.
같은 동작을 수차례 시연한 에단이 가볍게 도약하며 손을 털었다.
“됐냐?”
“……제기랄.”
칼베리안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경탄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짜증도 났다.
“단련이야 틈틈이 시켜 줄 테니 각오하고 있으라고.”
“……바라던 바야.”
“기개는 좋네. 그럼 슬슬 움직일까.”
“지금 움직인다고?”
“추격이 따라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반응이 없으니 다시 움직여야지.”
“……보통은 반대가 되지 않나?”
“귀찮게 구는 애들을 두고 볼 생각은 없어서 말이야.”
에단이 이를 드러내며 웃자 칼베리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 그렇다는 거는 다시 그걸 경험하라…….”
에단이 칼베리안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드르륵.
창문이 열리며 서늘한 밤공기가 들어왔다. 선명한 달빛이 밤하늘을 비췄다.
“자, 잠……!”
후웅!
에단이 그대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헨리의 눈이 황망해졌다.
“……같이 가요.”
헨리가 터덜터덜 에단을 뒤쫓았지만, 이미 에단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에단이 지면을 박차며 질주하자 칼베리안의 눈은 또다시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