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블랙마켓 (4)
“에효.”
잭슨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숲을 바라봤다.
한참을 올려다봐도 끝이 보이지 않는 울창한 나무들과 그 사이로 돌아다니는 산짐승과 새소리들.
숲에는 평화와 풍요가 완연했다.
“……확실히 달라지긴 했네.”
잭슨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봤을 때 겪은 숲에서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황폐하거나 음산한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맑고 충만한 느낌은 아니었다.
잭슨이 허리춤에 매인 칼을 만지작거리며 숲에 발을 디뎠다.
에단이 전하기로는 엘프들의 적대감이 많이 유화되었다고는 하나, 그것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잭슨이 경계 태세를 하며 숲에 진입한 순간 잭슨의 발 앞에 화살이 박혔다.
“……시부럴.”
잭슨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경계심이 풀리기는 무슨…….
잭슨이 울상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숲과 동화되어 있는 엘프를 찾아내기란 사막에서 바늘을 찾아내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신분을 밝혀라.”
나지막한 경고가 들려왔다. 잭슨은 곧장 대답했다.
“에단 님의 말을 듣고 왔는데요……?”
“…….”
잭슨의 대답에 상대는 침묵으로 화답했다. 짧은 적막이 맴돌았다.
“……용사님의 명을 받고 왔다고?”
그 순간 들려오는 대답. 잭슨은 답을 듣고 멍하니 서 있었다.
‘……용사?’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았다.
* * *
잭슨은 무장을 완전히 해제하고 에단에 대한 설명을 마친 뒤에야 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잭슨은 엘프들의 인도를 받으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에단의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대우가 달라졌다. 에단을 향한 엘프들의 호의는 거의 충성에 가까웠다.
‘그 정신 나간 사람이 용사라고?’
귀가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용사님의 동료가 오셨다!”
“우와아아아!”
“…….”
엘프들의 환대에 잭슨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말세구나.’
* * *
“대충 써 갈겨.”
에단의 가벼운 말투에 인상을 구긴 2황자가 종이 하나를 꺼내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대충 휘갈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술술 써 내려가는 유려한 글씨체에 에단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을 부는 에단을 힐긋 바라본 2황자가 코웃음을 쳤다.
“이래 보여도 고귀한 핏줄이라서 말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
“…….”
에단의 말도 사실이기에 2황자는 입을 다물었다.
“대충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2황자가 펜을 내려놓자 에단이 종이를 낚아채 훑어봤다.
“허.”
실소가 절로 나오는 내용이었다.
고풍스러운 말로 포장하고 있었지만, 결론은 엿 먹일 준비를 하고 올 테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는 경고장이었다.
“강단이 좀 있는데?”
“황실에 쳐들어온 너희보다는 부족하지.”
“맘에 드네. 그럼 슬슬 가 볼까.”
“……어떻게 나가려고?”
“아, 그거?”
원래 계획이라면 최대한 은밀하게 2황자를 빼낼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나도 뭔가를 보여 줘야지.’
2황자의 패기 넘치는 경고장.
이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적당한 퍼포먼스를 보여 줘야 할 것 같았다.
“헨리, 알아서 잘해 봐.”
“……넵.”
헨리가 체념한 듯 고개를 떨궜다. 헨리의 몸과 기운이 흐릿해졌다.
“……뭐, 뭐를 하려는 거지?”
2황자의 푸르고 맑은 눈이 흔들렸다. 불길한 예감이 강렬하게 치솟았다.
“왜? 이제 와서 겁나?”
“누, 누가 겁난다고 했는가? 기왕이면 상식적인…….”
에단이 2황자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기운을 끌어 올렸다.
체내의 있던 마나가 격렬하게 휘몰아친다. 막대한 기운이 에단의 주위에서 흘러넘쳤다.
타닷!
에단이 창문을 향해 뛰쳐나갔다.
“이게 뭐 하는…… 커헉!”
2황자가 단말마를 내뱉었다. 에단에게 벽 따위는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들어 올려진 에단의 발에는 마나가 둘려 있었다.
콰아아아앙!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창문과 벽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 모습을 지켜본 2황자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다.
황실 내부에서 벌어진 엄청난 굉음은 일파만파 번져, 주위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에단은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허연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만개했다.
꽈아악!
에단이 2황자를 꽉 붙잡은 뒤 지면을 박차며 하늘을 날았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공중 비행에 2황자가 눈을 까뒤집었다.
2황자를 납치하듯 끌고 간 에단은 쉼 없이 질주했다. 에단의 각력은 이미 말보다도 뛰어났다.
에단이 전력으로 주파하면 도시 하나를 건너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꾸륵 꾸르륵.
단지 짐짝처럼 짊어지고 있는 2황자가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는 게 문제일 뿐.
하지만 2황자의 상태 따위는 에단의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쉼 없이 달리던 도중 문득 헨리가 떠올랐다.
‘……알아서 따라오겠지.’
에단은 헨리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 * *
툭.
“허억!”
2황자가 눈을 떴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창백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여, 여긴 어디지?”
“여관.”
에단이 짤막하게 대꾸하며 의자에 앉자, 2황자가 떨떠름한 표정을 한 채 에단을 바라봤다.
“……그렇군.”
허탈한 표정을 지은 2황자가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큭큭.”
날은 아직 어두웠고, 침대 옆에 있는 싸구려 조명이 낡아 빠진 천장을 비췄다. 그간 지내 온 방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어째서인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2황자가 실성한 듯 웃자 에단이 이마를 좁혔다.
“너 어디 아프냐?”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르는군. 분명 초라하기 그지없는 방인데 어째선지 기분은 좋아.”
2황자가 상쾌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지금 살면서 처음으로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가신들의 표정이 궁금하군. 나를 쫓겠다고 난리가 났겠어.”
“대충 쫓는 척하다가 죄다 돌아가던데?”
“…….”
에단이 단칼에 반박하자, 2황자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그 정도의 입지였단 말인가…….”
착잡함이 몰려왔다. 2황자가 침울한 기색을 풍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할 녀석들인데 신경 꺼.”
에단의 말은 투박했지만, 그렇기에 더욱 위로가 되었다. 2황자가 고개를 들어 에단을 바라봤다.
“너는 원래 그런가?”
“망나니 새끼가 그렇지 뭐.”
“허.”
에단의 심드렁한 대꾸에 2황가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큭큭거리던 2황자가 에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망나니인 것은 사실이지만 듣던 것과는 전혀 딴판이군. 아이린의 선택이 이해가 안 될 지경이야.”
“아이린?”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2황자가 눈을 끔뻑였다.
“……설마 약혼자의 이름도 기억 못 하는 건가?”
“……약혼?”
에단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자, 기가 찬 2황자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파혼당한 이유를 알겠군……. 설마 이렇게까지 쓰레기였을 줄이야…….”
“아.”
떠올랐다.
이 망나니 녀석에게는 약혼자가 있었다.
아주 전형적인 스토리. 아이린은 정략혼을 강요받는 비련의 여성이었고, 에단은 온갖 패악질을 일삼는 호색한 망나니였다.
블란테는 과거부터 정략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과 무력을 숭상하는 블란테의 특성 때문이다.
하지만 에단은 상황이 달랐다. 에단의 패악질과 성정은 가문 밖에서도 유명했고, 블란테는 에단을 처리하기 위해 처음으로 정략혼을 받아들였다.
블란테와 인연을 얻는 것을 마다할 가문은 없었고, 혼약 제의가 물밀듯이 쏟아졌다.
물론 에단의 상태가 생각보다 더욱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대부분이 제의를 무르게 되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에단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원래 이 녀석이 주인공에게 죽게 되는 상황도 파혼한 약혼자를 겁박하다 벌어진 일이었다.
‘이걸 왜 이제야 기억한 거지?’
추측건대, 이 몸뚱이 자체가 싫은 기억은 사전에 차단하는 것 같았다. 의도치 않게 기억을 되찾게 된 에단이 짜증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싸질러 놓은 건 더럽게 많네.’
다행히도 이번에는 딱히 처리해야 하는 사건은 아니었다.
그저 찝찝하기만 할 뿐.
기분이 상한 에단이 불퉁한 표정으로 2황자를 응시했다.
“……흠흠, 방금 말은 사과하지. 어차피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잖아?”
“그래, 그게 아니긴 하지.”
에단이 2황자를 향해 구체적인 계획을 설명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2황자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그게 가능하다고?”
“안 될 건 뭐가 있어.”
에단이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잊었어? 우리 블란테야.”
“……허.”
광오한 말이었다. 하지만 제국의 황자인 자신도 저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재밌을 것 같지 않아?”
“……확실히 재미는 있을 것 같군. 한데…… 정말로 그자들이 모두 협력한다는 말인가?”
“확언은 못 하겠지만, 아마도?”
“……정말 믿어도 되는 게 맞나?”
“이제 와서 못 믿으면 어쩔 건데.”
“그건 그렇군…….”
돌이키긴 이미 늦었다. 결말이 어찌 되든 둘은 이제 한배를 타고 말았다.
‘그따위 인생을 사느니…….’
지금 같은 도박을 시도하고 죽고 싶었다. 2황자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결과가 어찌되던 최대한 협력하겠어.”
“잘 생각했어.”
“……그런데 같이 있던 여성은 어디 있지?”
“아.”
헨리가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고 한들 에단을 쫓아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알아서 찾아올 거야.”
에단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자 2황자가 입을 다물었다.
‘……과연 저자를 믿어도 되는 게 맞는 건가.’
새삼 근심이 들었다. 2황자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고 있자, 에단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어떻게 되지?”
“……내 이름도 모르고 있던 거냐?”
“왜, 문제 있어?”
황궁까지 침입해 놓고 정작 자신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가 찼지만, 2황자는 순순히 답해 줬다.
“……칼베리안. 레미안 칼베리안이다.”
“좋아, 칼베리안. 그럼 잘해 보자고.”
에단이 손을 뻗었다. 칼베리안은 물끄러미 에단의 손을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그래. 잘 부탁하지……. 그런데 이 손은 언제 놓을 생각이지?”
“흠, 부드러운 손이군.”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칼베리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격투술을 배우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확인차 한번 잡아 본 거야.”
에단이 선이 가는 칼베리안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윤곽만 보아도 운동이라고는 접해 본 적 없다는 사실을 알 것 같았다.
‘쉽지는 않겠군.’
비루한 몸이다. 잠재력도 높게 쳐주기는 애매했다. 원작에서도 칼베리안의 포지션은 정치력과 두뇌에 한정되었다.
‘뭐, 하다 보면 되겠지.’
소설 속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남을 키워봤지만, 생각보다 적성에 맞았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해 볼까.”
“……지금부터라고?”
“그러면 뭐 마음의 준비할 시간을 줄지 알았어? 빨리 엎드려.”
에단의 분위기가 달라지자, 칼베리안은 마지못해 바닥에 엎드렸다.
“우선은…… 간단하게 팔굽혀펴기 백 개부터 해 보지.”
“……나는 팔굽혀펴기라는 것을 모른다.”
칼베리안의 대답에 에단이 한심함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칼베리안이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일어나 봐.”
칼베리안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고, 에단이 자세를 시연했다.
흐트러짐 없는 정석적인 자세였다. 딱 붙은 티셔츠가 근육의 윤곽을 선명하게 보여 줬다.
칼베리안은 입을 다문 채 에단을 바라봤다.
“……지금 나더러 이걸 백 개나 하란 말인가?”
“어.”
“그건 불가능한…….”
“빨리 안 엎드려?”
에단의 표정이 사나워지자 칼베리안이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