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블랙마켓 (3)
2황자의 푸른 눈에는 별이 담겨 있었다. 에단이 창밖을 응시했다. 밝은 빛을 뿜어내는 들판과 그 곁의 별들이 각자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
에단의 검은 눈이 달빛을 흡수했다. 에단이 2황자에게로 다가갔다. 곱상한 외모와 가는 선.
그리고 황제의 적통에게서만 발현되는 금발 머리와 푸른 눈.
“……서, 설마.”
“어, 맞을 거야.”
헨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에단은 헨리에게 신호를 주면 장막을 해제하라고 전한 뒤, 2황자에게 다가갔다.
에단이 곁에서 2황자를 바라봤다. 2황자의 표정은 언뜻 무표정한 듯 보였으나, 씁쓸함과 착잡함이 엿보였다.
‘무게 잡기는.’
물론 에단은 2황자의 감성 따위는 헤아려 주지 않았다. 에단이 손을 들었다. 마나의 장막이 걷혀 나갔다.
“……후우.”
창밖을 바라보던 2황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재수 없게 웬 한숨이야?”
“……?”
난데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2황자가 고개를 돌렸다. 에단이 팔장을 낀 채 2황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2황자가 에단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에단이 손을 들었다.
“반갑다.”
“…….”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2황자가 멍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보다 물었다.
“……어쌔신인가? 하하,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구나. 죽일 테면 빨리 죽여라. 이미 마음의 준비는 끝냈으니.”
“아닌데.”
“……뭐라고?”
“아니라고.”
에단이 콧방귀를 뀌며 2황자를 바라봤다.
“내가 너를 왜 죽여? 어차피 실권도 없는 허수아비를 죽여서 얻는 게 뭔데. 쓸데없이 무게 좀 잡지 마.”
에단의 신랄한 말에 헨리가 입을 틀어막았다.
2황자가 고개를 돌려 헨리를 바라봤다. 입을 막던 헨리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었다.
“하, 하하, 안녕하세요.”
“……너희는 누구지?”
2황자가 다시 에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에단이 작게 감탄했다.
“강단은 꽤나 있네.”
에단의 말에 2황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 말대로 나는 죽일 가치도 없는 녀석이거든. 어차피 그 녀석이 책봉되는 순간 없어질 목숨. 뭣 하러 지금 죽이겠어?”
자포자기하듯 말하는 2황자를 에단이 게슴츠레 바라봤다.
“한심한 놈.”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2황자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자신의 상황은 최악이다. 그 어떤 탈출구도 보이지 않았다.
“알아. 낙동강 오리알 신세인 거. 정통성은 물론이거니와 능력 면에서도 형의 발끝에도 못 미치잖아?”
“…….”
“허약한 체질 탓에 검도 제대로 못 휘두른다며. 그러니 싸움이 될 리가 있나.”
에단의 말이 비수처럼 2황자에게 꽂혔다. 2황자가 독기 어린 눈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지?”
“내가 왜 몰라? 방금 한 말 못 들었어? 아니까 그렇게 말하지.”
에단이 2황자 앞에 쪼그려 앉았다. 2황자의 상황은 에단과 흡사했다.
정확히 말하면 바뀌기 전 에단의 상황이 유사하다.
2황자와 에단의 시선이 교차했다. 달빛이 창문을 투과하며 에단을 비췄다.
흑요석같이 검은 눈동자와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가 보인다.
2황자의 동공이 흔들렸다. 2황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에단을 향해 물었다.
“……너는 누구지?”
“에단, 에단 블란테.”
에단이 씨익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 * *
2황자는 황제의 피를 이었으나 서자였고, 일신의 무력을 중요시하던 제국의 방향성과 달리 2황자는 검에 소질이 없었다.
2황자는 유악한 심성을 지니고 있었다. 황제파에 반대되는 귀족들이 접근하기도 하였는데, 1황자는 그를 좌시하지 않았다.
1황자는 2황자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 속해 있었다.
정통성, 전폭적인 황제의 지지, 검의 재능, 그리고 냉혹하기 그지없는 성정.
얼마 전 1황자가 직접 나서 피의 숙청을 하였다. 1황자는 아직 태자로 책봉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연히 실권 또한 쥐고 있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1황자는 황제의 피를 이은 자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1황자를 막아설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1황자는 직접 나서서 칼춤을 췄다.
내성이 피에 물들었고, 2황자는 아직도 그때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1황자에게서는 폭군의 모습이 엿보였다. 그 이후로 2황자에게 접근하는 자는 더욱이 줄어들었다.
2황자는 시녀들을 통해 성 밖의 소식을 접했다. 자신은 이 좁은 방에 갇혀 있었지만, 이야기를 들을 때만큼은 일말의 자유를 느꼈다.
그리고 날이 저물면 이렇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래, 나에게는 이런 게 맞아.’
2황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동안 그렇게 생각해 왔고 합리화했다.
“지랄하네.”
에단의 목소리에 2황자의 눈이 떨렸다. 에단의 깊디깊은 눈이 2황자를 관통했다.
“착한 척 좀 그만하지. 너 그렇게 온순한 녀석 아니잖아.”
“……뭐라고?”
“나에 대해 들어 보긴 했을 거 아니야.”
2황자는 세상 밖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당연히 블란테에 대해서도, 그리고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에단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저자가 그 에단이라고?’
믿기지가 않았다. 2황자는 에단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위로를 받았다.
블란테는 국가가 아니었지만, 그만큼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고, 에단의 처지는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재능 따위는 없는 가문의 둘째, 블란테의 수치라고 불리던 희대의 망나니.
‘최근에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들었지만…….’
숨죽이고 있던 블란테가 격동하기 시작했다. 그 사실은 대륙에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성내에서도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물론 2황자는 그 상황을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2황자가 에단의 몸을 훑어봤다. 옷 사이로 강인한 육체가 엿보였다. 저 몸은 어중간한 노력으로는 탄생할 수가 없는 육체다.
‘……비슷한 처지인 줄 알았건만.’
2황자가 에단을 올려다봤다. 동병상련을 느끼며 많은 위로를 받았지만, 에단은 들려오던 소문과 달랐다.
단련된 육체와 얼굴에 만연해 있는 자신감.
자신과는 다른 얼굴이다. 2황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들어 보긴 했지. 하지만 내가 알던 모습이랑은 많이 다른 것 같아.”
“그 거지 같은 몸뚱어리 바꾸려고 피똥을 싸긴 했지.”
생전 겪어본 적 없는 천박한 말투에 기가 막힌 2황자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서, 허수아비도 못 되는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지?”
“뭐겠어. 필요해서 온 거지.”
에단이 옆에 있는 의자를 적당히 꺼내 그 위에 걸터앉았다.
“이제 질리지 않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상황은 알고 있어. 온순한 척해야 목숨을 연명할 수 있다는 것도.”
“허.”
“나도 비슷한 처지였거든. 크크, 나를 쳐다보는 표정들이 아주 가관이었다니까? 마치 오물 덩어리를 보는 것 같더군.”
“……그게 정말인가?”
2황자가 물었다.
지금 에단의 모습에서 그런 과거의 흔적은 조금도 연상되지 않았다.
“나에 대해서는 들어 봤을 거 아니야.”
“……들어는 봤지.”
모르는 이를 찾기가 드물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면 모두 거짓이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어서 말이야.”
“사실이었어. 바꾼 것뿐이지.”
에단이 다리를 꼬았다. 에단의 눈이 가라앉았다.
“너, 솔직히 지금 상황 엿 같지 않아?”
가감 없는 에단의 말에 2황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 그래.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있을지 모르니 솔직히 말하도록 하지.”
2황자의 푸른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가 서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맞아. 더럽게 엿 같아.”
만족할 만한 대답에 에단이 씨익 웃었다.
“이제 대화가 조금 통하겠네.”
에단이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행위에 2황자가 말없이 에단의 말을 들었다.
에단은 적당히 사실을 덜어내며 그간의 일들을 설명했다.
에단의 말은 마치 무용담이나 일대기같이 느껴져 2황자는 에단의 말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여기까지.”
“……허.”
“감상은 어때?”
“솔직히 믿기지가 않는군. 그 어떤 용사의 일대기와 비교해 봐도 믿을 수 없을 정도야.”
“믿거나 말거나 그건 어디까지나 너의 선택이고…….”
말끝을 흐리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이제 대충 내가 무슨 의도로 왔는지는 알겠지?”
“예상은 되지만 추천하고 싶지는 않군. 나의 형이지만 그 녀석은 괴물이야.”
2황자가 고개를 저었다. 2황자의 대답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그런 소리는 나도 많이 들어 봐서 말이야.”
에단이 기운을 조금 흘렸다. 2황자의 얼굴이 굳었다. 사납고 포악한 기운이 방 안을 잠식했다.
에단이 기세를 풀자 2황자 숨을 몰아쉬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허.”
아연한 표정을 지은 2황자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직도 무슨 일을 겪은 것인지 어안이 벙벙해 왔다. 에단은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답답하지?”
달콤한 유혹이다. 2황자라고 어찌 이런 삶에 만족하겠는가. 2황자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앙상한 뼈가 보였다. 주먹을 움켜쥐었으나, 힘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손이었다.
2황자는 자신의 형을 알고 있다. 그자는 진정한 괴물이다. 힘과 권력을 모두 쥐고 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1황자는 어딘가가 뒤틀려 있었다.
제국와 중앙 회의에서 오고 가는 내용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최근 대륙의 정세와 내성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2황자가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그가 감은 눈을 뜨자 형형한 안광이 흘러나왔다.
“당신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겠어.”
“그래? 그거 의외네.”
에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2황자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대신 나에게도 조건이 있어.”
“말해 봐.”
“……격투술. 나도 배울 수 있나?”
예상외의 조건에 에단이 2황자를 바라봤다.
“이건 진짜 의외인데?”
“……나도 당신처럼 바뀔 수 있나?”
“쉽지는 않을 텐데.”
“상관없어. 쉬운 삶을 살아 본 경험이 없었으니까.”
2황자의 완강한 태도에 에단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거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드는데.’
2황자의 성정은 알고 있다. 본래 2황자는 원작 주인공의 유일한 조력자였다. 2황자는 재능이 없지 않았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힘과 세력뿐이었다.
이미 정세는 기울었다. 하지만 사이에 블란테가 비집고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번 일은 그 초석이야.’
엮인 고위 인사들.
그리고 지하와 내통하는 녀석들.
블란테가 개입한다고 한들 부외자에 불과한 블란테의 발언에는 많은 힘이 실리기 힘들었다.
결국 필요한 것은 내부의 조력자였고, 그렇기에 에단은 2황자에게 접근하였다.
2황자는 야심과 강단이 있는 사람이었고, 에단이 기세를 조금 드러냈음에도 조금도 밀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에단은 그런 2황자의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럼 편지부터 써.”
“……편지를 쓰라고?”
“어. 쥐새끼들 잡으러 가야지.”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