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격투천재-185화 (185/398)

◈ [185화] 블랙마켓 (1)

날이 저물었다.

더는 영지에 머무르고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병력과 용병은 회진했고, 방벽이 무너진 것 외에는 별달리 피해가 없던 영지민들은 편한 밤을 보낼 수 있게 되어 기뻐했다.

드워프들이 준비했던 병기들이 모두 산산이 조각났지만, 그것은 영지민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예상과는 상반된 상황에 축제라도 벌일 분위기였지만, 영주가 나서서 영지민을 진정시켰다.

“축제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다. 영지민들의 재물을 탕진해 축제를 벌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 기쁜 것은 알고 있으나, 축제는 내가 주관해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치를 것을 약속하지.”

그 뒤에는 한니발의 사주가 있었지만, 그걸 모르는 주민들은 그저 영주의 덕을 칭송할 뿐이었다.

‘시간이 아까우니.’

한니발이 어두워진 영지를 거닐었다. 한니발의 손에 들려 있는 종이 한 장.

종이를 붙잡고 미량의 마나를 주입하니 글귀가 떠올랐다.

‘접선 장소.’

인적이 드문 골목길, 종이가 안내한 장소는 이곳이었다.

그곳에서 한니발이 대기하고 있자, 로브와 후드로 모습을 감춘 이가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조심성을 띠고 있는 작은 음성에 한니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마켓의 관계자와 한니발은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한니발이 형식적인 대답을 내뱉었다. 구태여 친밀감을 조성할 필요성이 없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한니발은 사람의 욕망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욕망을 이용해 많은 부를 축적한 그가 모르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블랙마켓도 마찬가지였다. 무릇 사람이란 치부를 숨기고 싶기 마련. 그렇기에 블랙마켓은 어둠 속에서 세력을 불려 왔다.

지금껏 한니발이 블랙마켓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블랙마켓에는 한니발이 원하는 게 없다는 것.

블랙마켓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한니발은 많은 재화를 쓸어 담고 있었다.

“……설마 이렇게 제안을 주실 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한니발 님께서는 저희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럴 리가요. 저 또한 일개 상인에 불과합니다. 돈은 돈일 뿐 아니겠습니까.”

한니발의 부드러운 미소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의견이 일치하여 기분이 좋군요. 이번에 블랙마켓을 이곳에서 개최할 것이라 들었습니다만…….”

남자가 주위를 둘러봤다.

“괜찮은 자리는 아닌 것 같군요.”

팔론의 영지는 좁았고, 인구수도 많지 않았다. 크기가 작고 절대적인 인구수가 부족하면 장이 열리기가 힘들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렇습니까?”

한니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대한 대비는 이미 모두 끝냈다.

“이번에 제가 준비한 ‘상품’에 대해서는 언질을 들으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들었습니다. 한니발 님이 아니었다면 믿지 못했을 겁니다.”

“믿어 주셔서 감사하군요. 저 또한 상인입니다. 상품으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상품과 걸맞게 이번에는 지하 통로로 준비했습니다.”

“……지하 통로 말씀입니까?”

한니발이 씨익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한번 이동해 보시겠습니까?”

* * *

에단은 팔론에게서 반강제로 탈취한 객실에 있었다.

블랙마켓과의 협상은 한니발에게 일임했다. 에단에게는 자신만의 일이 남아 있었다.

‘자, 슬슬 시작해 볼까.’

기지개를 펴자 찌뿌둥한 몸이 우두둑 소리를 냈다.

‘오랜만에 인사하겠군.’

에단은 꺼낸 수정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수정구를 꺼내는 행위 자체가 오랜만인 것 같았다.

수정구에 마나를 주입하자 곧바로 수정구가 반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빈센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 …….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에단이 히죽 웃으며 인사했다. 빈센트는 미간을 좁히며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아들이 인사드리는데 어찌 대꾸 하나 없으십니까?”

에단이 능글맞게 묻자 빈센트의 이마에 주름이 짙어졌다.

― 아카데미를 맡겨 놓고,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지?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저도 나름대로 바쁘게 지내고 있어서 말이죠. 제가 없으니까 부담되시기라도 한 겁니까? 뭐, 외부에서 외압이 슬슬 들어오고 있다거나.”

― ……허, 블란테를 아주 우습게 여기는구나.

“그런 게 아니라면 다행이죠. 이제 슬슬 소문도 귀에 들어갔을 테니 녀석들이 움직일 날이 얼마 남지 않았겠네요.”

― 그렇겠지. 계획은 있느냐?

빈센트의 형형한 안광이 에단에게로 향했다.

“아버지야말로 저를 뭘로 보시는 겁니까? 당연히 착실히 준비하고 있죠.”

[건방진 건 여전하군.]

빈센트가 눈살을 좁혔다. 에단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어쩌다 보니 수확이 조금 더 커져서 딸려 오는 물고기가 많아졌네요. 제힘으로도 처리할 수는 있긴 한데…… 어떻게, 숟가락 하나 얹어 보시겠습니까?”

건방지기 그지없는 에단의 태도에 빈센트가 말없이 에단을 응시하다 물었다.

― 들어 보고 정하지.

“최근 자금줄이 조금 쪼그라들고 있죠? 워낙에 쌓아 둔 재산이 많으니 당장은 문제가 없겠지만, 여러 곳에서 저희를 압박하기 시작하면 꽤나 골치 아파지겠죠.”

― 본론부터 말하거라.

“기특한 아들내미가 돈 줄 하나 잡았습니다. 블랙마켓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 블랙마켓?

빈센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에단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네. 더러운 구더기들이 모이는 장소죠. 그곳에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취하려고 합니다.”

― 흐음…… 더 들어 보도록 하지.

에단이 품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장부입니다. 조무래기들은 모두 거른 진짜배기입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어지간한 놈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찌그러질 만한 내용입니다.”

― 그렇게 순순히 인정할 만한 놈들이 아닐 텐데.

그렇게 싱겁게 끝난다면 대륙을 주무르는 노괴들이라는 칭호가 아까웠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발뺌하고 헐뜯는 것은 그 녀석들의 특징이니까요. 그래서 현장에서 목줄을 채우려고 합니다. 저희는 명분도 얻으면서 말이죠.”

― ……자신 있느냐?

“당연한 것 아닙니까. 감히 누가 블란테의 적수가 된단 말입니까.”

과장스러운 에단의 답에 빈센트가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봤다.

“농담 한번 한 거 가지고 살벌하네요. 그래서 도움을 주실 생각입니까?”

― 이것도 리사가 엮여 있는 일인가?

“당연하죠. 그게 아니라면 제가 뭐 하러 귀찮게 일을 벌일까요.”

에단의 대답에 빈센트의 얼굴이 굳었다.

― 흑기사단과 첸을 붙여 주지.

‘오, 생각보다 과감한데?’

에단의 예상치를 상회하는 지원이었다.

― 대신 조건이 있다.

“말씀하시죠.”

― 벌레 새끼들을 한 마리도 놓쳐서는 안 될 게다.

“그거야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쪽 분야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녀석이 있어서요.”

― 호오, 그게 누구지?

“아버지도 알고 계실 텐데요. 유치한 별명을 달고 있는 건방진 고양이가 있길래 제가 교육 좀 시키고 있습니다.”

― ……허, 건방진 고양이? 설마 렉사르를 말하는 것이냐?

“네. 겁도 없이 계속 까불길래 제가 좀 붙잡아 두고 있습니다. 딱히 문제는 없죠?”

― …….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에단의 말에 빈센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입을 다물고 있던 빈센트가 이내 피식 웃었다.

― 쓸 만큼 쓰고 돌려놓도록.

“여부가 있겠습니까.”

순간 에단이 잠시 고민했다. 블란테의 가주인 빈센트라면 렉사르의 정체에 관해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아직은 시기상조인가.’

에단이 이내 생각을 지웠다. 조급하게 여길 필요는 없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과제만으로도 충분히 복잡했다.

“첸 경과 기사들은 언제까지 보내 주실 수 있는 거죠?”

― 곧바로 보내도록 하지. 어디로 보내면 되지?

“체이베르로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실망시키지 말도록.

빈센트가 싸늘한 시선으로 응시하자 에단이 미소를 머금었다.

“절 못 믿습니까?”

― 끊겠다.

간결한 대꾸와 함께 통신이 끊어졌다. 에단이 피식 미소를 흘리며 곧바로 다시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이번에 연결하는 대상은 정보 길드였다.

― 오랜만입니다.

“무게 좀 그만 잡지?”

― ……후, 별걸로 다 트집이군요.

“보고 듣는 게 여간 고욕이 아니라서 말이야.”

― 그건 제가 할 소리입니다. 대체 잭슨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뭔 짓을 했길래 애가 저 모양 저 꼴이 됐는지 원…….

메이가 고개를 저었다.

정보 길드에 복귀한 잭슨은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져 있는 것처럼 행동했는데, 허구한 날 웃통을 까며 자신의 몸을 뽐내는 둥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

“글쎄? 난 한 게 없어서.”

에단은 결백했다.

잭슨이 알아서 그 분위기에 동화되어 도취된 것뿐이었으니까.

― 후우…….

메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에단을 향해 물었다.

― 이번에는 무슨 용무입니까? 계획의 준비가 끝난 건가요?

“어. 생각보다 미끼가 실해서 고기는 많이 잡힐 것 같아.”

― 그거 다행이군요. 안 그래도 저희 측에서 입수한 정보들을 보고 연락을 취하려고 했습니다. 정말 드워프가 등장한 것인가요?

“어, 걔네들은 이번에 상품으로 나갈 거야.”

― …….

잠시 생각하던 메이가 에단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 확실히 드워프 정도라면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하겠군요.

“그걸로는 부족하지. 빠지는 녀석이 있으면 안 될 정도로 성대하게 준비할 생각이니.”

― 그 외에도 있습니까?

“왜 없어? 전례 없는 마석 덩어리에, 엘프에, 드래곤까지 있는데.”

― ……네?

메이가 얼빠진 표정을 하며 되물었다. 하나하나가 너무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왜? 귀라도 먹었어?”

― 그, 그게 아니라 다시 말씀해 주세요. 뭐가 엮여 있다고요?

“드래곤 말하는 거야?”

― 드, 드래곤? 그 말이 사실입니까?

메이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여기저기서 흘러들어 오는 방대한 정보를 다루는 정보 길드의 특성상 드래곤에 관한 뜬소문도 종종 입수되고는 한다.

하지만 그 정보들의 대부분은 가치라고는 없는 소문에 불과했다.

하지만 드래곤에 관한 이야기가 에단의 입에서 나온다면 말이 달라졌다.

― 대, 대체 그런 정보를 어디서 입수하신 겁니까? 신빙성은 있는 겁니까?]

“드워프들 잡으니까 딸려 오던데?”

― …….

메이가 결국 말을 잃었다. 잠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던 메이가 말을 이었다.

― ……그 말이 만일 사실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감당하실 생각입니까? 드래곤의 화를 어찌 감당하시려고…….

“뭐야,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거야?”

에단이 피식 웃었다.

― ……쓸데없는 걱정을 했군요. 그래서 저희가 뭘 하면 됩니까?

“빤하잖아. 이런 거에 환장할 녀석들에게 언질을 줘야지.”

― ‘섭리를 거스르는 자들’ 말입니까?

“뭘 베베 꼬면서 말하고 있어? 마법사 새끼들한테 정보 풀고, 그 외에 귀족이랑 왕족한테도 조금 씩 정보를 풀어. 전설 속의 드워프들과 엘프들이 이번 블랙마켓에 상품으로 나온다고.”

― 거기에 마석이랑 드래곤까지 언급되면 아주 난리가 나겠군요.

“이제야 조금 머리가 돌아가네.”

에단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본격적인 낚시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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