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처분 (3)
지하 뇌옥에 구금된 드워프들은 더 이상 저항의 의지를 내비치지 않았다.
렉사르와 휴고가 보여 준 무력의 격차가 너무나도 막강한 탓에 드워프들의 마음은 이미 꺾여 있었다.
전의를 상실한 채 황망한 표정으로 갇혀 있는 드워프들을 보며 줄리엔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드워프가 실존했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드워프는 서적이나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종족이었다. 신비를 좇는 모험가가 아니라면 줄리엔 같은 일반적인 사람들은 드워프의 존재 자체를 믿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 사람이랑 같이 있으니까 정말 별일을 다 겪네.’
줄리엔은 그날의 일을 회상했다. 검을 쥔 에단, 발출된 거대한 힘.
‘……인간이 아니야.’
그 힘은 감히 인간이 엄두를 내서는 안 되는 수준이었다. 쏟아지는 화살의 빛을 단숨에 지워 버리고 방벽을 삼킨 포악한 힘.
다시금 떠올리는 순간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진짜 제정신이 아니었지.’
그런 에단 앞에서 주름을 잡으며 겁박을 했으니. 정말로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했던 상황이다.
줄리엔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자신들을 사주했던 인물을 원망했지만, 정작 타미를 보자 가지고 있던 원망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뭔가 사정이 있겠지.’
티 없이 깨끗한 타미의 눈은 줄리엔과 단원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 줬다.
타미는 여전히 줄리엔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요?”
“그러니까 말이요. 형님만 치사하게 굴 거요?”
탐탁지 않아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줄리엔은 단원들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누가 뭐라고 한들 지금의 상황을 넘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절그럭.
그 순간, 지하에 스산한 쇳소리가 울려 퍼지며 단원들과 줄리엔의 만담이 멈췄다. 그들의 시선이 슬며시 돌아갔다.
‘……저 사자탈이 저렇게 무서웠나?’
우스꽝스럽고 귀엽게만 보였던 사자탈의 표면에 붉은 피딱지가 보였다. 어두운 곳에서 렉사르의 분위기가 어우러지니 소름 끼치기 그지없었다.
‘심기를 거스르지 말자.’
잘 모른다면 나대지 않는 것만으로도 중간은 가기 마련이다. 그런 줄리엔의 생각은 다른 단원들의 생각과도 비슷한 듯싶었다.
“너, 기분 나빠.”
“……!”
그때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줄리엔의 목 위에 있던 타미가 대뜸 렉사르를 도발한 것이다.
줄리엔과 단원들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타, 타미 님, 제발 조용히…….”
줄리엔이 떨리는 목소리로 만류했지만, 타미는 멈추지 않았다.
“내가 왜? 쟤 기분 나쁜걸.”
스윽.
그 순간 렉사르의 고개가 돌아갔다. 피 묻은 사자탈, 뚫려 있는 눈구멍에서 살벌하기 그지없는 안광이 흘러나왔다.
‘히, 히이이이익!’
줄리엔이 렉사르를 보자마자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짐승 새끼 주제에 기고만장하구나.”
렉사르가 살기 넘치는 음성으로 읊조렸다. 쇳소리가 섞인 거친 목소리였다. 목소리를 들은 줄리엔과 단원들은 더욱 큰 공포에 빠졌다.
“짐승?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짐승에 가까운 건 나보다 넌데.”
“……뭐라고? 지금 그 말이 무슨 소리지?”
렉사르의 음성이 떨렸다. 타미는 여전히 태연한 기색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모르고 있었어? 너는 휴고보다 더 냄새가 나. 다른 수인들은 눈치채는 것 같은데. 자기만 몰라?”
“……제대로 설명해 봐라.”
렉사르가 저벅거리며 타미에게 다가왔다.
그가 타미에게 다가간다는 말인즉, 줄리엔에게 다가간다는 소리와 일맥상통했다.
‘……주여.’
줄리엔은 평생 찾아본 적 없는 신을 찾게 되었다. 곁에 있던 단원들이 순식간에 줄리엔과 멀어졌다.
‘……부디 저 새끼들은 지옥으로 보내 주소서.’
통렬한 배신감과 함께 충격 어린 눈으로 멀어지는 단원들을 바라봤다.
“여기 있다고 하더니 무슨 상황이야?”
터벅터벅.
위층과 연결되어 있는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려오자 단원들과 줄리엔의 얼굴이 모두 그쪽을 향했다.
계단에서는 사미라가 내려오고 있었다.
렉사르가 고개를 돌려 사미라를 바라봤다.
“모자란 구석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귀여운 제자 놈들이거든. 그러니 거기까지만 하는 게 어때?”
“……방해하지 마라.”
렉사르가 으르렁거리며 경고했다. 발목을 휘감는 살기에 사미라가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블란테 아니랄까 봐 죄다 괴물 놈들이군.’
다시금 깨닫게 된다. 블란테 같은 놈들과는 결코 엮여서는 안 된다.
‘난 이미 엮여 버려서 어쩔 수 없지만.’
착잡했다.
힘의 격차는 확연했지만 사미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광견을 잡은 것도 그쪽?”
“그런 놈들은 모른다.”
“도시에 와서 아무것도 안 했다고?”
“……말꼬리를 잡는 놈들이 있어서 적당히 손봐 준 적은 있군.”
‘……정신 나간 새끼.’
사미라가 다시금 아연함을 느꼈다.
최근 벌어졌던 대규모 학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던 이들이기에 누군가에 보복을 당했다고만 여겼다.
악명 높은 광견은 그 뒤로 완전히 폐인이 되었다.
‘그놈들을 고작 손봐 줬다고 표현하다니.’
광견은 사미라도 전력을 다해야 상대할 수 있을 만한 강적이다. 광견을 비롯해 잔뼈 굵은 용병들을 죄다 처리하는 일은 사미라조차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역시 엮여서는 안 되는 놈들이야.’
저항이 의미 없는 괴물들이 세상에 넘쳐 난다. 그것이 사미라가 은퇴한 이유였다.
검은 도끼라고 칭송받으며 싸움터를 누볐지만, 결국 그녀는 일개 용병에 불과했다.
“……이제야 알겠군.”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쇠창살 안에 갇혀 있는 드워프들의 목소리였다. 자포자기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드워프는 말없이 렉사르를 바라봤다.
“허, 설마 여기서 그쪽 녀석들을 보게 될 줄이야. 너무 오랜만이라 떠올리지 못했어.”
“……그게 무슨 소리지?”
렉사르가 쇠창살을 향해 다가서며 물었다. 멍한 표정의 퉁가가 렉사르를 응시했다.
“저 꼬맹이, 그리고 아까의 소년은 알겠지만, 너는 이질적이야.”
곰곰이 생각하던 퉁가가 입을 열었다.
“족장, 설마 내가 생각하는 게 맞는 거요?”
“……그 정신 나간 놈들이 결국 저런 괴물을 만들어 버렸군.”
“지금 무슨 개소리를 내뱉는 거냐고!”
쾅!
렉사르가 소리치며 사자탈을 벗어던졌다. 누렇게 물든 안광과 얼굴을 가득 덮은 흉터가 선명하게 보였다.
저벅. 저벅.
“지금 뭐 하고 있냐?”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와 함께 에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을 게 있습니다.”
“내 용무가 먼저야. 그리고 상품을 관리하고 있으랬지. 누가 협박하랬어?”
에단이 거들먹거리며 쇠창살 앞에 섰다. 렉사르가 입술을 깨물더니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미라가 작게 감탄했다.
‘……저 괴물을 뒤로 물러나게 만들다니.’
보고도 믿기지 않는 모습이다.
에단이 씨익 웃으면서 드워프들을 바라보자, 바크락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우리를 어떻게 할 생각이지?”
“말했잖아, 상품이라고. 그 말이 뭐를 뜻하겠어?”
“……허, 정말 우리들을 팔아넘길 생각이란 말인가?”
“내가 보기와는 다르게 마음이 여려서 말이야. 함부로 그런 짓은 못 하겠네.”
에단이 쪼그려 앉으며 바크락과 눈높이를 맞췄다. 에단이 입을 열었다.
“선택지는 줄 수 있어. 너희한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거야. 원래 남의 것 탐내는 도둑들한테는 이렇게 좋은 말로 타이르지 않거든?”
에단이 용병단원들을 흘겨보자 그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우리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면 ‘그분’이 찾아올 거야.”
“뭘 또 ‘그분’까지야. 내가 도마뱀 새끼는 잡을 거라고 말했지.”
“……그 말 진심이었단 말인가?”
바크락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단이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인간이었다. 인간은 드래곤을 이기지 못한다. 그것이 가능한 이는 전설에서나 언급되는 용사들뿐이었다.
“그럼 거짓말인 줄 알았어?”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바크락이 말없이 에단을 노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들어 보지.”
에단은 드워프들의 역할을 충실히 설명했다. 에단의 계획을 듣던 드워프들의 얼굴이 충격과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정말 그 계획이 통할 것이란 말이오?”
“안 될 건 뭐가 있어.”
“……허.”
“그럼 허락한 걸로 알고 여기서 대기나 하고 있어. 너희들은 얘네 잘 감시하고. 밥은 때 되면 넣어 줄 테니까 그리 알고.”
에단이 몸을 돌렸다.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렉사르를 향해 에단이 말했다.
“너는 탈 쓰고 올라와.”
“…….”
렉사르가 불만을 억누른 채 다시금 사자탈을 뒤집어쓰고는 에단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 * *
영지는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영주의 병사들, 정확히 말하면 한니발이 다루는 병사들이 영지 내를 철저하게 통제한 덕분이었다.
그 탓에 처음에는 겁에 질려 있던 시민들도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놀라운 결과였다.
보통 영지전을 비롯하여 이후의 안정화 작업에서도 많은 피해가 발생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 과정 모두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그렇기에 영지민들은 가족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며 점령군의 통제에 잘 따랐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점령군이 언제 태도를 바꿀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하나 그 모든 것도 얼마 뒤 영주가 공표한 사실로 모두 일단락되었다. 영주는 체이베르와 협상을 마쳤고, 대대적인 교역을 진행할 것이라 말했다.
영지민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방금까지 칼을 겨누던 상대에서 갑작스레 협력자가 되었으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보잘것없는 영지와 대도시와의 교역이라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체이베르 입장에서는 얻을 게 전혀 없는 내용이었다.
어쨌든 모든 게 잘 풀렸고, 영지민들이 영주를 칭송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바뀌고 있었다.
‘역시 일 처리는 빠르군.’
과연 거상이었다. 한니발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능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렇게나 빠르게 일을 처리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에단이 뒤통수에 느껴지는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말했지. 조급해하지 말라고.”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에단도 바크락의 말을 들었다. 렉사르에게 감춰진 비밀. 그것의 단서가 그중 하나였다.
‘뭔가 집힐 것 같긴 하지.’
하지만 그건 당장 급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에단에게는 렉사르의 비밀이 우선이 아닌, 그의 쓸모가 먼저였다.
“어차피 걔네가 나불거려 봤자 신빙성 있는 소리는 아니잖아?”
“…….”
렉사르가 입을 다물었다. 드워프들의 말은 결국 근거 없는 주장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 일을 벌이려는 겁니까?”
“어. 이 기회에 바퀴벌레 새끼들 싹 쓸어버리려고.”
에단은 벌레를 싫어했고, 지금처럼 벌레를 처리하기 좋은 기회는 드물었다.
‘다른 소득도 챙기고.’
일을 벌이는 장소가 자그마치 블랙마켓이다. 심지어 최대 규모의 판이 벌어질 예정이었으니 괜찮은 물건이 많이 등장할 확률이 높았다.
‘운이 좋으면 찾겠지.’
물건과 더불어 다른 녀석들의 약점도 잡기 좋은 상황.
렉사르가 물끄러미 에단을 바라보았다.
에단의 말은 무모했다. 블랙마켓은 수많은 사람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었다. 에단이 제아무리 일신의 무력에 자신이 있다고 한들 위험한 계획인 것은 분명했다.
‘누가 혼자서 한대?’
에단이 품속에 수정구를 어루만졌다.
자신의 뒷배를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