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처분 (2)
원작의 주인공.
녀석은 수많은 기연과 히든 피스를 독차지했다.
‘주인공이니 가능했던 일이지.’
이해는 한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일생에 한 번도 얻기 힘든 기회들. 수많은 기회와 우연, 상황적 요인이 어우러져 주인공은 가파르게 성장했다.
‘그 시작이 세계수고.’
그 이후가 바로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은 존재한다. 하지만 드래곤에 관해서는 에단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녀석이 얻은 기연이 애매했으니까.’
주인공이 드래곤과의 접촉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드래곤의 모습이 아니었다.
드래곤의 사체.
주인공은 드래곤의 사체를 발견했고, 그곳에서 특별한 힘을 얻게 된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도 있었지만.’
다른 것도 아닌, 자그마치 드래곤의 사체.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하지 않아도 막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쯤은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드래곤의 사체를 그냥 매장하는 것으로 끝냈다.
그로 인해 얻은 것도 있었지만, 에단이 보기에는 탐탁지 않은 것도 있었다.
‘살아 있는 드래곤이라.’
드워프들이 거짓말을 늘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드워프들의 눈에 서려 있는 짙은 두려움은 연기로써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드래곤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위압감.
인간이 감히 대적할 수 없을 것 같은 막강한 존재.
‘다 허상뿐인 개소리지.’
정말로 드래곤이 그 정도로 막강했다면 ‘지하’의 것들이 침범했을 때 관망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칼을 뽑은 것은 인간들이었다.
‘처참히 발리고 있었지만.’
그 이후에 대한 일은 알지 못하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가망이 없어 보이기는 했다.
‘싸움조차 안 됐으니까.’
인간은 이기적이다.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같은 인간이더라도 망설임 없이 칼을 꽂는다.
대륙의 통합.
말은 쉬웠다. 명확한 적은 사람들을 규합시켰으니.
하지만 주인공의 태도는 미온했다. 강압적이지도, 폭력적이지도 않은 태도로 각국을 수장들을 규합하기는 부족했다.
명분과 실리가 없는 정의와 선의는 허황함에 불과했다.
에단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가 과격한 행보를 보이는 이유.
본래 그의 성향이 남의 눈치를 신경 쓰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미온한 주인공의 선택은 결국 실패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 번 실패한 행보를 답습할 필요는 없지.’
에단은 자신만의 방법을 개척할 생각이었다. 에단은 명분을 가지고 있고,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귀찮은 일들이 많지만.’
승산은 충분했고 기회도 찾아왔다.
‘하나 더 끌어들일 수 있겠어.’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 * *
혼란이 잦아들었다. 렉사르에 관한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새롭게 이름을 날리는 용병단에 속해 있는 용병. 우스꽝스러운 사자탈을 쓴 채 막강한 무력을 선보였기에 거론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먹 용병단의 행보는 파격적이다.
듣기만 해도 헛웃음이 나오는 이름과는 반대로, 단원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영지전은 주먹 용병단 홀로 끝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소문이 번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거기에 한니발도 가세했다.
한니발은 에단의 조력자가 된 입장이다. 에단의 세력이 몸집을 불리는 것은 그에게도 이득.
그는 상인이었고, 사람의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았다.
주먹 용병단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정작 단원들은 떨떠름함을 감출 수 없었다.
고단한 훈련을 견디고 견뎌, 드디어 실전에 투입되나 싶었더니 정작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손 안 대고 코를 푼 격이다.
‘……이걸 기뻐해야 하나?’
사람이라면 응당 욕망과 욕심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줄리엔과 단원들은 최근 들어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 있었다.
분에 넘치는 욕심은 독이 된다는 것이다.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나대다가 덴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세상에는 괴물들이 너무 많아.’
에단은 말할 것도 없었고, 휴고와 헨리, 그리고 타미와 사미라라는 단원들에게 넘지 못할 산이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최근에 합류한 저 사자탈.
단원들도 산전수전을 겪으며 살아온 이들이다. 도적질 자체가 어지간한 담력 없이는 시도조차 못 할 일이었다.
‘……역시 건드리면 안 됐어.’
하지만 사자탈에게 반항할 생각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본능이 경고했다. 저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존재다.
단원들은 저 사자탈이 드워프들을 어떻게 제압하는지 똑똑히 지켜봤다.
만일 되도 않는 기강을 잡겠다고 헛짓거리를 벌였다면…….
상상만 했을 뿐인데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은 비단 줄리엔 뿐만 아닌 듯 다른 단원들도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얘들아.”
“네…….”
“착하게 살자.”
“……네.”
단원들은 다시금 다짐했다. 그때 줄리엔의 목에 타고 있던 타미가 줄리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
타미의 위로에 가슴이 벅차오른 줄리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 * *
에단은 한니발과 분주하게 움직였다.
먼저 거대한 마석을 눈에 띄지 않은 곳에 옮겨 놨다. 집채만 한 크기의 마석 덩어리를 본 한니발이 작은 탄성을 터트렸다.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군요.”
“탐내면 배탈 난다.”
“알고 있습니다. 과욕은 화를 불러일으키는 법이죠.”
“……허.”
염치없는 한니발의 태도에 에단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한니발을 바라봤다. 한니발이 어깨를 작게 으쓱거렸다.
“일단 얘들부터 정리하자고.”
에단이 싸늘한 눈초리로 드워프들을 바라봤다. 저 녀석들의 처분은 일단 보류다.
결정을 내린 에단은 드워프들을 모두 지하 감옥에 가뒀다.
영주의 병사들을 신용할 수는 없기에 그들을 감시하는 역할은 렉사르와 용병단원들에게 일임했다.
마석은 헨리를 이용해 적당한 창고에 보관시켜 놨고, 마석 주변을 경계하는 역할은 휴고에게 일임했다.
“잘 지키고 있어.”
“넵.”
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서 헨리가 눈을 끔뻑이며 에단을 바라봤다.
“저는 뭘 하고 있을까요?”
“쉬어.”
“그래도 되나요?”
헨리가 반색했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꽤나 쓸모 있었으니 쉬어도 돼. 그런데 네가 원하는 건 못 할걸?”
“……네?”
“방금까지 전쟁을 했는데 여관이나 술집 따위가 열 것 같아?”
“아…….”
순식간에 침울해진 헨리가 고개를 떨궜다.
“그럼 알아서 시간이나 때워.”
에단이 한니발을 이끌고 영주의 성으로 이동했다.
“한니발.”
“네.”
“지금까지 계획은?”
“먼저 영지의 안정화를…….”
“집어치워.”
“……네?”
“마석도 얻었겠다. 괜히 쓸데없는 욕심 내지 말라고. 여기 별거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알겠습니다.”
“뭐 바른 돈이 있어서 아쉬운 건 이해하지만, 그건 다른 쪽에서 회수하면 그만이야.”
“계획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한니발의 물음에 에단이 발걸음을 멈추고 한니발을 지그시 바라봤다. 에단의 눈살이 좁혀졌다.
“지금 시험하냐?”
“……아닙니다.”
고개를 숙이는 한니발을 바라보며 에단이 콧방귀를 뀌었다.
“뭐, 됐어. 계획이 어찌 되냐고? 별거 없어. 아까 말한 그대로야. 아, 너는 못 들었겠구나.”
“어떤…….”
“드래곤.”
“……드래곤 말씀인가요?”
한니발의 눈이 커졌다.
“어, 드워프가 드래곤의 사주를 받았다고 하더라고.”
“…….”
한니발의 눈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드래곤이라니…….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세간에서 모습을 감춘 지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아직까지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두려움과 경외를 불러일으켰다.
한니발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드래곤이라는 막강한 존재가 엮인 이상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뭘 어찌해.”
떨리는 한니발의 목소리에 에단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도마뱀 새끼 잡아 봐야지.”
“……네?”
한니발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귀먹었어?”
“……에단 님께서 강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자그마치 드래곤입니다. 만일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지닌 힘이 전설과 다르다고 한들 그리 쉬이 말할 존재가…….”
“뭐라는 거야?”
에단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누가 내가 잡는다고 했어? 우리는 그냥 가진 것만 이용하면 그만이야.”
“그게 무슨…….”
“머리까지 굳은 모양이네. 너 상인이잖아. 돈 귀신 아니야? 드래곤에 관한 정보를 누구한테 팔면 애들이 혈안이 될까?”
“…….”
한니발의 얼굴이 굳었다.
“보통 죄다 관심은 가져도 혈안이 될 놈들은 얼마 없잖아?”
그렇다.
드래곤이라는 존재에 혈안이 될 만한 자들을 추리면 그리 많지 않다.
‘아니, 둘뿐이지.’
마법사의 탑, 그리고 마법 명가 아큐르.
한니발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상인으로서의 직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이건 최고의 미끼다.’
두 대어를 낚아낼 수 있는.
마법사들의 성격은 유명하다. 괴팍하고 이기적이며 욕심이 많다. 자신의 마법 성취나 지식에 관해 엄청난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아큐르와 마탑.’
사실상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검술 명가 블란테와는 얘기가 다르다.
아큐르와 마탑, 이 두 세력이 서로에게 가지는 적대감과 경쟁심은 상상을 초월한다.
‘자그마치 드래곤에 관한 정보라면.’
치열한 경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을 만큼 파격적인 상황이다.
‘……만일 드래곤의 존재가 사실로 밝혀진다면.’
얼마만큼의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벌써부터 몸이 떨려 왔다. 한니발 혼자만의 힘으로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이다.
아무리 엄청난 부를 축적한 한니발이라고 한들 감히 아큐르나 마탑을 이간질하여 이득을 취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불가능하니까.’
미끼를 흔드는 순간 끔찍하게 살해당할 것이 불 보듯 빤했다. 마법사라는 족속은 그런 녀석들이다. 협상이 통하지 않는 자들.
‘블란테라서 가능한 건가.’
하지만 그 상대가 블란테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무리 막강한 힘을 지닌 두 괴물이라고 한들, 순수한 무력으로 따지면 블란테의 적수가 아니다.
늑대한테 미끼를 흔드는 게 고양이라면 잡아먹히겠지만, 사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옳은 선택을 했군.’
한니발이 침을 꿀꺽 삼켰다. 보는 시야가 달랐다. 에단은 강하고도 교활했다. 자신의 이점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결코 적대해서는 안 될 자야.’
한니발이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에단을 바라보고 있을 때 에단이 말했다.
“정신 차리고 행동하라고.”
에단이 몸을 돌려 영주실로 향했다. 거칠게 문을 열자 영주가 황망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왔는가.”
에단은 대답 없이 영주 앞에 앉았다. 에단 곁에는 한니발이 서 있었다.
“시간 아까우니까 깔끔하게 가자고. 일단 사과부터 할게. 어찌 됐건 영지에 피해를 입혔으니까.”
“……지금 우리를 조롱하는 건가?”
“진심이야. 그쪽한테도 나쁠 것 없는 얘기일 테니 들어. 우리 측에서 억지스러운 조항을 내걸며 억압할 생각은 없어.”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건가?”
“못 믿으면 어쩔 건데? 뭐 죄다 약탈하고 불태워서 그냥 세상에서 지워 달라고?”
“…….”
“그건 아닐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냥 놔두겠다고. 교역도 적극적으로 활성화시켜 주지. 지금껏 입은 재정적 손실을 메우고도 남게끔 말이야.”
“허…….”
“물론 원하는 게 없는 건 아니야. 철저한 협력, 그리고 함구. 이 두 가지를 지킨다는 가정하에 하는 얘기야.”
“……거절한다면?”
“거절하면 뭐, 아무것도 안 해. 이대로 철수하지.”
“가지고 있는 정보를 풀어도 괜찮다는 건가?”
날이 서 있는 팔론의 말에 에단이 코웃음을 쳤다.
“되도 않는 협박이네. 퍼트려 보든가. 망해 가는 영지의 영주가 하는 말을 믿을 녀석들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팔론이 입술을 깨물었다. 굴욕적이었지만 에단의 말은 사실이었다. 에단이 다리를 꼬며 물어 왔다.
“어떻게 할래?”
“……수락하겠소.”
“잘 생각했어.”
에단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