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격투천재-179화 (179/398)

◈ [179화] 영지전 (3)

예상치 못한 상황에 모두가 혼비백산하던 와중, 헨리가 앞으로 나섰다.

헨리가 손을 들어 올리자 대지가 진동하며 그녀의 의지에 세상이 반응했다.

쿠구구구구.

격동하던 대지에서 흙과 나무가 생겨나 하늘을 가렸다.

쿵!

거대한 충격과 울림이 느껴짐과 동시에 화살을 막아 냈다는 걸을 알 수 있었다.

살면서 처음 목격한 광경에 병사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오.”

에단이 낮은 감탄사를 흘리며 나무와 흙으로 이루어진 벽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손쉽게 공격을 막아 내는 걸 보니 헨리를 잘 데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 어떤가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헨리가 가슴을 내밀었다. 에단이 피식 웃었다.

“역시 쓸 만해졌다니까.”

에단의 말에 휴고도 고개를 끄덕였다. 둘을 번갈아 보던 헨리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칭찬인 것 같으면서도 칭찬 같지는 않네요.”

“기분 탓이야. 그나저나 생각보다 대비를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에단이 영지의 외벽을 바라봤다.

투두두두두둑!

그곳에서 쏘아진 화살의 비가 체이베르 영지군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헨리, 넌 여기서 보호에 집중해.”

“넵.”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을 가린 벽이 몸집을 불려 나갔다.

“자, 가 볼까?”

생각보다 영지전의 양상이 재밌게 돌아가는 듯보였다. 에단이 뛰쳐나가려 하자 단원들이 주춤거렸다.

“저, 저희도 갑니까?”

“당연할 걸 왜 물어?”

“…….”

줄리엔이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듯 화살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저기를 향해 뛰어들라니. 불길 속에 달려드는 부나방이랑 다른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출발.”

줄리엔은 위에 올라타 있던 다비가 앞을 가리키며 말하자 눈을 질끈 감았다.

‘나도 모르겠다.’

에단과 엮인 순간부터 인생이 꼬였다.

이미 꼬인 인생 한탄해서 무엇 하랴. 줄리엔은 괴성을 내지르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으아아아아!”

당황한 얼굴로 줄리엔을 지켜보던 단원들도 곧이어 그의 뒤를 따랐다.

“으아아아아! 죽여 봐라 이 개자식들아!”

화살의 비를 뚫고 달리기 시작하는 단원들을 보며 에단이 피식 웃었다. 사미라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쟤네들 미친 거 아니야?”

그녀가 보기에 저들의 행위는 자살행위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너는 여기 있어.”

“정말 저기로 뛰어들라고?”

“왜, 못 믿겠어?”

에단이 씨익 웃으며 지면을 박찼다.

발을 뗄 때마다 지면이 움푹움푹 파였다. 에단이 순식간에 앞으로 뛰쳐나가자 그 뒤를 헨리와 렉사르도 따랐다.

‘주, 죽는다!’

앞으로 달려 나갔던 줄리엔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역시 이건 정신 나간 짓거리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에단이 줄리엔의 앞에 섰다.

“용기가 가상하네.”

에단의 칭찬에 줄리엔이 눈을 끔뻑이며 멀뚱히 바라봤다.

“어, 어쩌실 생각입니까?”

“뭘, 어째.”

에단이, 곁에 다가온 렉사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검 한 자루 줘 봐.”

“…….”

에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렉사르가 마지못해 품에서 검을 건넸다.

적당한 롱 소드를 고쳐 든 에단이 자세를 갖췄다.

후우우.

호흡이 무거워진다.

몸속에 잠재되어 있던 마나의 바다가 파도치기 시작했다.

에단이 쥐고 있던 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하며 막대한 마나가 모여들었다.

에단의 기술은 단순하고도 무식했다. 몸 안에 있는 마나를 외부로 방출하는 것 하나.

검에만 국한되던 진동이 에단의 팔로 올라갔다. 에단은 자신의 몸이 가진 내구력을 믿었다.

그리고 몸속에 잠재되어 있는 마나를 믿었다.

― 허…… 너는 미친 게 분명하다.

들려오는 페온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에단이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억눌러져 있던 마나가 쏟아져 나오자, 역천하는 마나의 해일이 화살 세례를 집어삼켰다.

일전에 렉사르와 교전할 때 보여 준 공격과는 궤가 달랐기 때문일까. 에단을 바라보고 있던 일행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나가 퍼진다.

엄습하는 화살들을 지워 버린 마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 나아갔다.

이윽고 마나의 해일이 방벽을 집어삼켰다.

콰아앙!

영지를 보호하고 있던 방벽이 무너져 내렸다.

* * *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바크락이 허망한 표정으로 앞에 벌어진 참극을 바라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 이미 그의 주도하에 병사들을 물렀기 때문이다.

팔론의 영지에서 준비한 대비책은 모두 드워프들이 준비한 병기들이었다.

그렇기에 바크락은 승리를 자신했다.

아무리 상대의 숫자가 많다고 한들 자신들이 준비한 병기와 무기들로 방어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들은 자신의 기술력을 자신하고 있었고, 머릿수만 많은 인간 따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

한데 이 광경은…….

바크락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방벽이 통째로 사라지다니.

당연하게도 그곳에 미리 배치해 둔 병기들은 모조리 증발해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바크락 님!”

“……무기를 들어라.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바크락은 결사 항전의 의지를 표명했다. 여기서 모두 죽더라도 쉽게 넘겨 줄 수는 없는 물건이다.

저들의 손에 마석이 넘어가게 되면 결국 파국을 맞이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드워프들이 굳은 얼굴로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무기의 대부분은 짧은 신장을 지닌 그들의 몸보다 길고 두꺼웠다.

한편 멀리서 무너진 방벽을 바라보던 영지민들과 병사들의 얼굴도 충격으로 물들어 있었다.

두 눈으로 목도하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이게 무슨…….’

팔론이 비틀거렸다. 이건 재앙이었다. 사상자가 나오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방벽이 왜 방벽이며, 수성보다 공성전이 힘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이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방벽이 무너진 지금은 회전(會戰)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조차도 성립되지 않는다.

황당하고, 참담했다.

‘드래곤이라도 나왔단 말인가?’

전설로만 전해지는 드래곤이 아니고서야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헛된 희망을 품었구나.’

드워프들의 말을 믿은 탓에 죄 없는 영지민들만 희생시키게 되었다. 짙은 절망감이 팔론을 덮쳤다.

“……미안하다.”

병사들과 기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의 눈은 결의로 가득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들은 영주를 원망하지 않았다. 지금껏 보아온 팔론은 결코 악인이 아니었다. 비록 풍족한 삶은 아니었지만, 궁핍하지도 않았다.

병사들이 창을 쥐고, 기사들이 검을 쥐었다. 그 모습에 팔론이 눈을 질끈 감았다.

* * *

무너진 방벽 사이로 에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얘들은?”

예상외의 인물들이 방벽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드워프가 여기에 왜 있지?’

드워프와 팔론의 병사가 적의 가득한 눈초리로 에단을 노려봤다.

‘끝까지 싸우려나 보네.’

저들의 눈빛에서 의지가 엿보였다. 때마침 에단의 곁에 단원들과 휴고, 렉사르가 도착했다.

드워프를 마주하자, 가면 쓴 렉사르의 눈에서 살의가 흘러나왔다.

“……전부 죽이면 됩니까.”

렉사르가 품에 손을 집어넣자, 에단이 렉사르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가만히 있어.”

에단이 턱을 매만지며 드워프들을 바라봤다.

이건 전쟁이다. 자신들이 없었다면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했을 것이다. 심지어는 패배했을 수도 있었다.

급조된 병력인 만큼 결속력은 형편없었으니까 영 가능성 없는 일도 아니었다.

에단은 전쟁에서 함부로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구태여 쓸모없는 원한을 등에 질 생각도 없었다.

‘드워프의 존재가 걸리는군.’

드워프들은 결코 이유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뭔가를 알고 있나 보네.’

엘프들과 달리 드워프들은 욕심이 많은 녀석들이다. 그걸 떠올린 에단의 입꼬리가 슬쩍 비틀렸다.

“더 싸울 건가?”

드워프들과 적 병사들이 말없이 무기를 들었다.

“그래, 그래 보였어.”

에단이 말없이 피어를 일으키자 막강한 기세가 그들을 덮쳤다.

“휴고, 타미, 렉사르. 싸우진 말고 기세만 일으켜.”

휴고가 마나를 일으키자 골격이 뒤틀리며 눈빛이 바뀌었다. 반쯤 수인화한 휴고의 입에서 짙은 야성이 흘러나왔다.

줄리엔의 목 위에서 폴짝 뛰어내린 타미에게선 웅혼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렉사르도 말없이 진득한 살기를 뿜어내려 하자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넌 가면부터 벗어라.”

“…….”

렉사르가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벗자, 짙은 피 냄새와 끈적한 살기가 그들을 휘감았다.

팔론의 병사와 드워프가 몸을 떨기 시작했다.

단 네 명의 기세였다. 하지만 그들의 기세만으로도 충분했다.

“마지막 경고야. 여기서 항복하면 죽이진 않을 거야. 그런데 만일 또 거절한다면…….”

에단이 드워프들을 가리켰다.

“너희들은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 줄게.”

드워프들은 태생부터 겁이 많은 종족이다. 지금의 경고에 의연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들의 심장은 쪼그라들었을 것이다.

에단이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이곳의 영주인 팔론……이라고 합니다. 가능하다면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팔론이 고개를 조아렸다. 바크락이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영주! 그게 무슨…….”

팔론의 항복 선언에 에단이 히죽 웃었다.

“영주가 선언한 일에 너희가 나서는 건 좀 아니지 않냐?”

“……빠득.”

바크락이 이를 갈았다.

“빨리 정해. 나는 몰라도 이 녀석들은 좀 피에 굶주려 있거든?”

“어찌하여 수인들이…….”

기세가 점차 강해지기 시작했다. 드워프들의 눈이 점차 공포로 물들기 시작했다.

“바크락 님…….”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결국 저들의 손에 들어갈 운명이었단 말인가.’

참담함을 느꼈다. 드워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항복하겠소.”

그렇게 전쟁이 끝났다.

* * *

싱거운 전쟁이었다. 뒤늦게 다가온 병력들은 아무런 성과도 건지지 못했다.

“……이게 말이 돼?”

병사들과 용병들은 깔끔하게 지워진 방벽을 바라봤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충격적인 광경이다.

“제기랄, 우리는 뭐 건진 게 하나도 없잖아.”

“대충 영지라도 털자고.”

소득이 없는 용병들이 혀를 차며 영지에 발을 들이려 하자, 줄리엔과 단원들이 그들을 제지했다.

“뭐야?”

용병들이 사나운 눈초리로 줄리엔과 단원들을 바라봤다.

“이 앞은 지나갈 수 없다.”

“누구 마음대로? 너희가 전세라도 냈냐?”

“영지전은 우리가 끝냈다. 너희가 낸 성과가 뭐가 있지?”

용병이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사실이었다. 그들이 올린 전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이 한 것이라고는 낙하하는 거대한 화살에 혼비백산한 모습을 보인 것뿐이었다.

숫자는 용병들이 훨씬 우세했다. 하지만 그들은 방금 전까지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했다.

무수한 화살이 지워지고, 방벽이 사라지는 광경을.

“……쳇.”

용병이 혀를 차며 몸을 돌려 멀어지기 시작하자, 줄리엔과 단원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십 년 감수했네.’

에단이랑 같이 지내면 정말이지 제 명에 살지 못할 것 같았다.

“……잘했어.”

줄리엔의 뒤에 있던 타미가 줄리엔의 허벅지를 토닥였다.

“감사합니다.”

타미의 위로에 줄리엔은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