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영지전 (1)
한니발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가 넓게 퍼진 자산을 회수하기 시작하자, 많은 거래처와 귀족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니발은 단호하게 말했다.
“전쟁을 준비하는 탓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지를 남겨 놨다. 영지전이 끝나고 열릴 블랙마켓을 기대하라고.
그렇게 사방에 정보를 뿌렸다. 에단에게 받은 수정구를 통해 정보 길드와 직접적인 연락이 가능했다.
입과 귀, 거기에 자본까지 더해지니 소문은 일파만파 커져 갔다.
소문이 몸집을 불렸고, 사람들의 기대감은 점차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블랙마켓으로 이목이 집중되어 갔다.
본격적인 준비를 갖추자 전쟁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물자와 사람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전쟁의 긴장감은 옅었다. 상대가 약소 영지였기 때문이다.
“걔네들은 왜 항복 선언을 하지 않는 거야?”
“그러니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허, 그렇다면 진짜 주인을 잘못 만난 거네. 전력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나는데 말이야.”
“그건 그렇고…… 그 녀석은 요즘 뭐 하고 있어?”
“그 녀석?”
남자가 주변에 눈치를 살피며 소곤거렸다.
“왜, 있잖아…… 그 미친개…….”
“아! 광견 칼릭스 말하는 거야?”
“야!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뭐, 어때. 너 그 얘기 못 들었어? 그 새끼 완전 폐인됐다고 하잖아.”
“……광견이 폐인이 됐다고?”
“그래! 듣기로는 신참 용병한테 개 박살 난 이후 애들을 끌어모았다고 하더라고.”
“어. 그런데 그게 왜? 그래도 한가락 하는 애들로 모았을 거 아니야. 광견이라는 이름값이 있는데.”
“그래. 실력이 보증된 잔인하고 더러운 애들로만 꾸렸다고 하더라고.”
“그럼 뭐가 문제야? 큰일은 오히려 그 신입 놈들 아닌가?”
“그게 말이지…….”
남자가 이번에는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푸흡!
얘기를 들은 남자의 동료가 마시고 있던 맥주를 뿜어냈다.
“아이 씨! 더럽게 뭔 짓거리야?”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아니, 이렇게 큰 사건을 못 들었단 말이야?”
남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녀석들 지금 죄다 죽거나 불구됐어. 용병 생활 은퇴해야 된다고. 그 건물은 철거할 거라고 하더라. 피 냄새가 너무 짙게 배어서 도저히 쓸 수가 없대.”
“미친…….”
“쯧, 가뜩이나 원한도 많은 새끼들이라 칼을 가는 놈들이 많을 거야. 한마디로 끝난 거지.”
“그럼 그거 때문에 광견도 폐인이 된 거야? 정신적 충격으로?”
“걔가 그나마 제일 양호하지. 손가락만 몇 개 날아갔다더라고.”
“……그게 양호한 거라고?”
“다른 애들은 죽거나 팔다리가 날아갔는데 그 정도면 양호한 거 아니냐?”
“……그렇긴 하네.”
“그러니까 사람이 말실수를 하면 안 돼.”
광견이 끝났다는 소문은 일파만파 퍼졌다. 꽤나 큰 사건이었다.
광견은 한창 이름값을 올리고 있는 용병이었고, 용병 길드에서도 밀어주는 얼굴마담이었으니까.
지금 이 도시에서 광견보다 이름값 높은 용병이라 해 봤자, 은퇴한 검은 도끼와 잠적해 있는 붉은 곰뿐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용병 길드는 적지 않은 손해를 입었기에 적극적인 수사를 표명했지만, 그 또한 흐지부지되었다.
수사 의뢰를 수락한 용병들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못 합니다.”
“보수를 이렇게 부르는데도 안 한다고?”
“그 광견이 폐인이 됐는데, 나까지 개죽음당하라고? 현장을 보고도 그 소리가 나와? 거긴…… 지옥이야.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한들, 목숨이랑 바꾸고 싶지는 않아.”
의뢰를 거절하는 용병들이 속출했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정보 길드나 어쌔신들에게도 의뢰를 하려 했지만, 두 단체 모두 일언지하 거절했다.
정보 길드는 그 참극을 일으킨 자가 블란테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어쌔신 길드는 애초에 승산 없는 의뢰는 승낙하지 않았다.
결국 수사는 무산된 채 금세 잊혔다. 평소라면 두고두고 회자될 사건이었지만, 바로 앞에 영지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체이베르 브릭스가 정식으로 출전 날짜를 공표한 것이다.
남은 시간은 이틀.
전쟁의 개막이다.
* * *
에단은 렉사르에게 전말을 전해 듣고 나서 인상을 찌푸렸다.
렉사르는 에단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또라이 같은 새끼.’
광견 그 녀석들이 복수를 준비하고 있는지도 몰랐지만, 렉사르가 자신의 정보를 위해 그놈들을 죄다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었을 줄은 더더욱 예상 못 했다.
하지만 정작 렉사르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마치 남이 저지른 일을 읊는 것 같았다.
에단은 딱히 타박하지 않았다. 어찌 됐건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려던 놈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너희들이 할 걸 말해 준다.”
에단이 일행을 불러 모았다.
타미와 휴고 헨리가 테이블에 앉았다.
렉사르의 기세에 압도된 단원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고, 사미라도 팔짱을 낀 채 렉사르를 주시하고 있었다.
렉사르가 휴고와 다비를 번갈아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저 꼬마도 수인입니까?”
“어.”
렉사르의 눈빛에서 적의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눈깔 착하게 떠라.”
“…….”
에단의 한마디에 렉사르의 눈빛이 풀어졌지만, 오히려 불쾌함을 표출하는 것은 타미였다.
“……내가 꼬맹이라고?”
타미의 발언을 가볍게 무시한 에단이 본론으로 넘어갔다.
“자, 그러면 용병단은 대충 구색을 맞췄네. 나는 임시 단장.”
에단이 렉사르를 가리켰다.
“너도 임시 단원이야.”
“제가 그런 어린아이 장난 같은 일을 할 것이라…….”
“자꾸 삐딱선 타면 그냥 지금 죽여 버린다.”
“……일단은 협력하도록 하죠.”
“그래, 처음부터 그러면 얼마나 좋아. 그리고 넌 입을 다물고 있어. 목소리가 너무 튀어서 안 돼. 그리고 후드도…….”
에단이 턱을 쓰다듬었다. 렉사르의 외모는 너무 눈에 띄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에단이 고개를 돌려 사미라를 바라봤다.
“……왜 날 쳐다봐?”
“너 여기 상인들이랑 안면 좀 있냐?”
“내가 있을 것 같아?”
“도움이 안 되네.”
“…….”
에단이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칼센을 바라봤다. 렉사르가 저지른 이야기를 들은 칼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칼센.”
“네, 네?!”
칼센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에단이 칼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 그렇게 긴장을 하고 있어?”
“……죄송합니다.”
“사과할 건 아니고. 여기 도시 규모가 좀 크지?”
“아무래도…….”
칼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체이베르라는 도시는 대륙 전체를 놓고 봐도 꽤나 큰 규모에 속했다.
“그럼 볼 것도 많겠네?”
“그런 편이죠?”
“공연단 같은 거는.”
“찾아보면 있을 겁니다.”
“그럼 찾아와.”
“……네?”
“거기서 적당한 탈 하나만 찾아오라고.”
“……탈 말씀입니까?”
“어. 얘 씌우게.”
에단이 렉사르를 가리키며 말했다. 렉사르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농담이시죠?”
“농담 같아? 5분 줄 테니까 당장 가져와.”
에단이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칼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가 몸을 돌린 채 재빠르게 뛰쳐나갔다.
“저더러 탈을 쓰라고…….”
“지금도 후드 눌러쓰고 있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가오 부리지 말고 좋을 말로 할 때 써.”
에단이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벌벌 떨고 있는 종업원에게 손짓했다.
“오늘 영업은 힘들 것 같으니까 수리비랑 배상금 차원으로 줄게.”
에단이 금화를 몇 닢을 건네자 ,종업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너무 액수가 큰 것 같은데요……?”
“괜찮아. 적당히 팁 좀 챙기고 사장한테 말해.”
“……감사합니다.”
종업원이 고개를 깊게 숙이며 물러섰다. 물러나는 종업원을 향해 에단이 말했다.
“적당히 먹을 것 좀 가져오고.”
“네! 금방 준비해서 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저거 네가 갚아야 한다.”
에단이 턱을 괸 채 렉사르를 향해 말했다. 렉사르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저 정도 금액이면 제가 가문을 들렀다가 오면…….”
“뭔 개소리야? 이자는 생각 안 해?”
“……이자?”
“그래. 네가 가문을 들렀다가 오면 벌써 며칠은 걸리겠지? 그리고 내 정신적 피해는 어떻게 보상할 건데? 그걸 다 합산하면…… 오백 골드는 받아야겠는데?”
에단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에단의 발언에 렉사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꼬우면 지금 당장 갚든가.”
에단이 거만하게 다리를 꼬며 팔짱을 꼈다.
한편 두 사람의 대화를 유심히 지켜보던 일행은 경악을 삼켰다.
‘저런 날강도 같은…….’
나름대로 도적 생활을 해 왔던 줄리엔과 단원들에게조차 에단의 계산법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강하면 저런 것도 가능하구나.’
줄리엔과 단원들의 눈빛에 존경이 담겼다.
“갚을 돈 없지? 그러면 잠자코 말이나 들어.”
그때 때마침 칼센이 돌아왔다. 칼센이 헐떡이며 에단을 향해 다가왔다.
“허억, 허억…… 공수해 왔습니다…….”
“오, 생각보다 빠르네.”
에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칼센이 가져온 탈을 받아 들었다. 일행의 시선이 탈로 향했다.
“……지금 저더러 저걸 쓰라는 겁니까?”
칼센이 가지고 온 탈은 사자탈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자탈이 아닌, 맹한 표정으로 혀를 내밀고 있는 우스꽝스럽고 귀여운 사자탈이었다.
렉사르가 살기 어린 눈초리로 칼센을 노려봤다. 칼센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제, 제가 의도한 건 아니고…… 급하게 찾을 수 있는 게 저것밖에 없어서…….”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닥치고 쓰기나 해.”
에단이 탈을 건네자, 렉사르는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어디 아픈 것처럼 혀를 내밀고 있는 귀여운 사자가 보였다.
“…….”
한참을 고민하던 렉사르가 결국 탈을 뒤집어썼다.
푸흡.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사자탈을 쓴 렉사르가 고개를 돌렸다. 불편한 심기가 넘실거렸다.
“……누가 웃었지?”
당연히 입을 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일행은 애써 웃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좋네. 얼굴도 가리고 재미도 있고. 일석이조야.”
에단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렉사르의 의견 따위는 애당초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이제 조만간 영지전이 있을 거야. 전력 차이가 압도적이라 시시할 거라고 말하던데…….”
에단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렇게 확연한 전력 차이에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거나.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거지.’
둘 다일 확률도 무시할 수 없다.
패배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러기에는 에단이 가지고 있는 전력이 너무 막강했다.
에단 본인과 휴고, 타미와 사미라, 그리고 렉사르까지 합류했다.
헨리 또한 대규모 전투가 발발하면 빛을 발할 게 분명했다.
에단은 이번 기회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키울 생각이고, 용병단은 그 초석이었다.
“여유를 부리는 머저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 애초에 그럴 시간도 없겠지만.”
에단이 타미를 향해 말했다.
“타미랑 사미라는 단원들 마저 교육시키면 되고, 휴고 너는 오늘 저녁부터 훈련 재개야.”
에단의 말에 휴고의 낯이 흙빛이 되었다.
이 자리에서 웃고 있는 것은 에단뿐이었다.
“그럼 남은 시간 동안 제대로 굴러 보자고.”
에단이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