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준비
렉사르는 에단을 인정했다.
에단은 자신보다 강했고, 강한 자에게는 응당히 예를 갖춰야 한다.
그것이 블란테의 율법이며 법칙이었다.
렉사르가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럽게 바뀐 태도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말해 봐.”
“저와 교전했던 수습 기사……. 그 녀석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휴고?”
에단의 물음에 렉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지 몰라도 제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렉사르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금빛 안광이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렉사르의 모습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녀석은 인간이 아닙니다.”
렉사르의 말에도 에단은 심드렁한 태도를 고수했다. 렉사르의 표정이 굳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어.”
까드득.
에단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렉사르가 이를 갈았다. 그의 주위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인 줄 알고 하시는 말입니까?”
“몰라. 그딴 걸 내가 왜 알아야 하지?”
에단이 렉사르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번들거리는 안광이 에단에게로 향했다.
‘역시 모르겠어.’
아직도 렉사르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수인에 대한 강한 적대감.
에단이 렉사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에단을 응시하는 렉사르의 눈은 마치 맹수와도 같았다.
‘마치 휴고처럼.’
에단이 렉사르를 향해 물었다.
“너, 정체가 뭐냐?”
“…….”
“내 말을 이해 못 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건 아닐 거 아니야. 솔직히 말하자고. 너 수인이냐?”
렉사르의 눈에서 살기가 짙어졌다. 수인이라는 단어만 언급되어도 렉사르는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에단이 렉사르의 반응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휴고는 완전한 수인이 아니야. 반인반수니까. 네가 혐오하는 수인은 절반 정도밖에 없다는 거지.”
“……용납 못 합니다.”
“용납 못 하면 어쩔 건데.”
에단이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네가 감히 내 똘마니를 건들겠다고 협박하는 거야?”
꽈드드득!
에단이 힘을 가했다. 순간 렉사르에게 막대한 압력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렉사르의 몸이 덜덜 떨렸다. 에단의 기세가 온전히 렉사르에게 집중되었다.
에단은 렉사르를 주시하고 있었다. 사소한 움직임이나 변화조차도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 너의 존재는 가문에게 있어서도 이질적이야.”
“…….”
“추적하는 사자. 거창한 이름이라고 생각했지. 별달리 알려진 것도 없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움직이는 기사. 하지만 실제로 보니까 의심이 확신이 되더군.”
에단이 렉사르의 머리를 움켜쥐고 자신의 얼굴 앞까지 끌어 올렸다. 둘의 시선이 교차한다.
“이 눈빛은 사람의 것이 아니야. 목소리는 다쳐서 그런 게 아니지? 태생적일 테고.”
에단이 렉사르의 옷가지를 내렸다. 얼굴에는 흉터가 가득했지만, 목 주위에는 별다른 흉터가 없었다.
“너 대체 뭐 하는 새끼야?”
“내가…… 뭐냐고……?”
렉사르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처음 받는 질문이다. 스스로 자문한 적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충실한 사냥개 역할을 수행했다.
가끔 보이는 빈센트의 동정 어린 시선만 기억할 뿐이었고, 렉사르는 그런 눈빛을 보내는 빈센트를 이해하지 못했다.
과거의 기억.
렉사르에게는 과거의 기억이 없었다. 그는 태생부터 가문의 사냥개였다.
머릿속에 주입된, 도주하는 적을 찾아내고 찢어발긴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렉사르는 적을 쫓는 데 최적화된 인물이다. 그의 금빛 눈은 어둠이라는 제약을 받지 않는다.
낮과 밤, 언제나 선명하게 보였으며, 후각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예민했다. 한 방울의 혈흔만 있어도 그 냄새를 바탕으로 대상을 쫓는다.
모두 인간과는 거리가 먼 방식. 렉사르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무엇이지?’
그런 의문이 생겼다. 렉사르의 눈이 흔들렸다. 노랗게 물들어 있는 눈에는 이목이 끌린다. 그렇기에 늘 후드를 눌러썼다.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그 누구든 렉사르와 눈을 마주치면 두려워한다. 렉사르는 그것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블란테의 가주인 빈센트는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가끔가다 보이는 동정 어린 시선도 거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늘 혼자였고, 고독했다. 렉사르가 에단의 눈을 바라봤다.
깊고 고요한 검은 동공이 보였다. 심해 같은 눈을 보며 렉사르는 섬뜩함을 느꼈다.
‘……내가 두려움을 느낀다고?’
반대되는 입장만 경험해 왔었다. 렉사르는 늘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렉사르가 지금 에단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에단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역시 뭐가 있군.’
이질적인 렉사르의 존재.
페온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봐요, 아저씨.’
― 지금 나더러 아저씨라고 하는 게냐?
‘여기 그럼 또 누가 있습니까? 전부터 보니까 지금 같은 상황만 되면 입을 다물던데,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겁니까?’
― ……내가 섣부르게 말할 수가 없어서 그런 거다.
페온의 씁쓸한 목소리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쯧.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지만 역시 건질 건 없어 보였다.
‘그럼 저는 언제쯤 알 수 있는 겁니까?’
― 나도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블란테의 주인이 된다면 모든 걸 알 수 있겠지.
페온의 말을 듣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가주가 되어야만 들을 수 있는 비밀이라니.
‘더럽게 귀찮네.’
에단이 미간을 좁히며 렉사르를 바라봤다. 렉사르는 에단에게 있어 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때, 렉사르의 고개가 치켜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에단의 고개도 돌아갔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렉사르가 몸을 움직였다. 본능적인 움직임이다.
렉사르가 쇄도하는 장소에는 휴고와 타미가 있었다. 휴고와 타미, 헨리가 모두 반응했다.
나무 바닥이 우그러들며 파삭, 하고 부서졌다. 렉사르가 품에서 무기를 꺼내 들려는 찰나, 휴고와 다비가 준비를 갖췄다.
그러나 둘이 손을 쓰기 전에 에단이 먼저 도착했다.
“나랑 얘기하다가 어딜 가?”
에단이 사납게 노려보며 그대로 렉사르를 걷어찼다.
퍼엉!
렉사르가 허공을 날았다. 에단이 렉사르를 향해 질주했다. 순식간에 렉사르에게 도달한 에단이 그대로 무릎을 차올렸다.
뻐억!
가슴팍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렉사르가 붉은 피를 토해 냈다.
“커헉!”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에단이 렉사르의 허리춤을 붙잡고 그대로 바닥에 메다꽂았다.
콰앙!
거친 소음과 함께 바닥에 꽂힌 렉사르가 몸을 부들거렸다.
꾸우우욱.
에단이 압박하기 시작하자 렉사르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렉사르의 떨리는 눈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복잡한 심경이 느껴졌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렉사르가 자문하듯 말했다. 에단이 렉사르의 목을 움켜쥔 채 일으켰다.
“나한테 물어도 소용없어.”
렉사르는 저항의 기색이 없이 초점 없는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단은 후환을 남겨두지 않는 성격이다. 렉사르는 요주의 인물이며, 밝혀진 게 없는 녀석이었다.
‘여기서 죽이면…….’
에단은 렉사르를 처리함으로 인해 자신이 겪을 후환을 생각했다.
렉사르는 블란테의 일원이다. 아무리 에단이 블란테의 적통이며 계승권자라고 한들, 그에게 독단적으로 가문의 일원을 처분할 권한은 없다.
더군다나 렉사르는 대체가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만일 다시 한번 자신에게 이를 드러낸다면 그때는 고민 없이 죽일 생각이다.
바닥에 깔려 있는 렉사르의 눈동자는 연신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저건 지금의 에단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어.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겠지. 하지만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야. 이해해 줄 건 더더욱 아니고.”
꽈아악.
에단이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을 가했다.
“나는 귀찮은 걸 싫어하고, 주제 파악을 못 하는 새끼는 더더욱 싫어해.”
“…….”
에단이 차갑게 식은 눈으로 렉사르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다. 기다려.”
“……무엇을 기다리란 말입니까.”
“뭐겠어? 내가 가주가 되길 기다리라고. 내가 가주가 되면 모든 걸 내 눈으로 확인하고, 말해 주지.”
“……하, 그 말이 지금 어떤 의미인지 아시는…….”
“알고 있지.”
에단이 눈살을 좁혔다. 렉사르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가주 자리까지 올라가지 못할 것으로 보여?”
광오하게도 들리는 에단의 말이었다. 하지만 렉사르는 에단의 말을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가주의 재목.
흑사자들의 왕.
블란테의 주인.
렉사르에게 모든 것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하지만 그런 그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괴물이야.’
아직 장성하지 않은 나이이니 에단은 계속해서 성장해 나갈 것이다. 저 나이에 저런 성취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현 가주인 빈센트도 에단과 같은 나이에는 아직 애송이에 불과했다.
렉사르가 에단을 바라봤다. 저 오만하고 잔학한 사자가 아닌, 다른 형제가 블란테를 이어받는다고?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블란테는 에단이 잇게 될 것이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는 않아도 돼.”
“……오만하군요.”
“그럴 만하니까 하는 거지.”
에단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 경고야. 만일 기다리지 못하고, 또다시 이빨을 드러낸다면.”
에단이 무심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너는 죽어.”
“…….”
에단이 손을 놓았다. 렉사르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 말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허언은 안 해.”
“알겠습니다. 만일…… 오늘 말씀하신 것과 다른 말을 하신다면…….”
“마음껏 도전해 봐.”
렉사르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마음에 파장이 생겼다. 렉사르는 에단의 말을 믿어 볼 생각이었다.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몸을 일으켜 다시 후드를 눌러쓴 렉사르가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에단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무슨 일이시죠?”
“여길 이 꼴로 만들어 놓고 어딜 그냥 가려고.”
에단의 목소리에서 황당함이 묻어나왔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본 렉사르의 눈에 난장판이 되어 있는 건물 내부가 담겼다.
“…….”
렉사르가 입을 다물었다. 렉사르에게도 이런 일을 처리해 본 경험은 없었다.
“돈은 얼마나 있냐?”
에단의 물음에 렉사르가 품을 뒤적였다. 절그럭거리는 소리는 많이 들렸지만, 품 안에 있는 것은 죄다 무구들뿐이었다.
“없……습니다…….”
“이 새끼 이거 골 때리네.”
“…….”
렉사르가 또다시 입을 다물자 에단이 물어 왔다.
“어떻게 할래?”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돈 없다며.”
“당장은…… 그렇습니다…….”
“그러면 뭘 어째. 몸으로 때워야지. 때마침 빚 변제하기 좋은 기회가 있거든?”
렉사르가 눈을 끔뻑이며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전쟁 한번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