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과욕 (2)
렉사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아니, 격렬하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일방적인 도륙이 펼쳐지고 있었다. 렉사르는 양 떼에 뛰어든 늑대처럼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는 냉정하고 교활하며 잔혹했다.
끔찍한 비명과 절규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렉사르는 자비를 보이지 않았고,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톱날 검에 살이 뜯겨 나가고 피가 낭자한다.
용병들은 처음 겪는 공포를 느꼈다. 사방으로 퍼지는 비릿한 피 냄새에 상대가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도살이며 도축이다.
결과는 정해져 있다. 토끼는 아무리 발악해 봐야 사자를 이기지 못한다. 머릿속에 도망쳐야 한다는 글자가 새겨졌다.
하지만 렉사르는 그들의 도주를 허용하지 않았다. 유일한 입구인 정문을 막아섰다.
“괴, 괴물 새끼!”
뒷문이나 창문을 이용해 도주하려는 자들도 있었지만, 렉사르는 그들도 놓치지 않았다.
차르르륵!
서늘한 쇠사슬 소리. 사슬이 마치 뱀처럼 움직여 도망가려는 이의 다리를 붙잡았다.
“이, 이거 놔! 놓으라고!”
용병이 비명을 내지르며 발악했다. 렉사르는 무심하게 남자를 끌어당겼다.
휙!
끌려온 용병의 머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푸슛!
피 분수가 솟구치고, 악취와 비린내가 진동했다. 건물 안이 피 안개로 자욱해졌다.
흠칫.
칼릭스의 눈이 부릅떠졌다.
광견. 미친개.
두려움을 모르며 잔학하기로는 따라올 이가 없다는 악명 높은 용병.
하지만 칼릭스는 지금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금빛 안광.
그 시선이 지금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격의 차이가 느껴졌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으며, 손가락 하나라도 함부로 까닥거리면 목이 떨어질 것 같았다.
저항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지금 칼릭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생각은 오직 생존이었다. 칼릭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뚜벅뚜벅.
렉사르가 다가오는 소리가 천둥처럼 귓가에 파고들었다.
“……당신은 대체…….”
“내가 말했지.”
렉사르의 불쾌한 목소리가 좌중을 압도했다. 뱀이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등줄기에 닭살이 돋아났다.
“용건이 있어서 왔다고.”
렉사르가 칼릭스의 면전까지 다가왔다. 얼굴이 닿기 직전의 거리였다. 칼릭스의 눈이 흔들렸다. 잔뜩 겁에 질린 눈이었다.
‘그래. 이게 정상이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저 눈빛. 렉사르에게는 한없이 익숙한 시선이다. 저 표정을 짓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자는 가문을 통틀어 둘밖에 없었다.
빈센트와 첸.
그 둘만이 렉사르가 인정한, 진정한 강자였다. 그렇기에 렉사르는 그들의 명령을 수행한다.
철저한 약육강식.
그런데 그것에 이변이 생겼다. 아직 다 성장하지도 않은, 어린 사자가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가볍게 주제 파악을 시켜 주려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당한 것은 렉사르였다.
기가 차고 황당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에단은 분명 사자의 피를 이은 자였으니까. 다만, 에단의 밑에 있는 기사는 인정할 수 없었다.
짐승의 냄새, 짙은 누린내.
그 냄새가 렉사르의 코를 자극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치밀었다. 렉사르는 휴고라는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다.
야수의 팔과 날카로운 발톱.
지끈.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렉사르가 흉흉한 안광으로 칼릭스를 노려보자, 그는 곧장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게 자연스러운 이치이자 순리였다.
렉사르가 칼릭스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충분히 모욕적인 행동이었지만, 칼릭스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저 덜덜 떨며 렉사르의 분노가 사그라들기를 바랄 뿐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큭큭.”
학살극을 벌인 자가 웃고 있었다.
칼릭스가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봤다. 대부분이 죽어 있었고, 살아 있는 이들조차 신체 한 곳 정도는 분리된 채 바닥을 기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지옥이었다. 인간이 이런 참극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는 줄 모르겠군.”
렉사르가 으르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용무가 있어서 왔고, 정신 나간 개새끼한테 물을 게 있어서 찾아왔어. 순순히 대답했으면 아무 일이 없었을 텐데.”
렉사르가 움켜쥔 멱살을 잡아당겼다. 거구의 칼릭스가 끌려왔다. 렉사르가 칼릭스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전에 찾아왔던 녀석들. 어떤 일이 있었고, 어디에 있는지. 전부 말해라. 하나도 놓치지 말고.”
핏빛 안개 속에서 렉사르의 금빛 안광이 빛을 발했다.
* * *
휴고가 퀭한 얼굴로 스튜를 먹고 있었다. 평소처럼 허겁지겁 먹어 치우는 것이 아닌,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미적거렸다.
“어디 아프냐?”
“……아닙니다.”
에단의 질문에 휴고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프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휴고는 본인이 숟가락질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며칠 내에 모두 회복될 거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타미가 말했다. 휴고는 물끄러미 타미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다행이네…….”
과연 이게 진짜 다행인지는 알 수 없었다. 휴고는 착잡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진짜 수인이었어.’
그것도 수인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웨어울프, 바로 늑대인간이었다.
‘……털이 숭숭 나고.’
휴고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이 손에서 강철 같은 발톱이 돋아났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고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보다 큰 충격은 받지 않았다. 모두가 대수롭지 않고 태연한 탓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심란한 표정을 지어봤자 우습기만 할 것이다.
달그락달그락.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를 끝나자 에단이 입을 열었다.
“며칠 뒤에 또 할 거야.”
“……네?”
휴고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이 말은 못 들은 것으로 치부하고 싶었다.
“왜, 너도 좋냐?”
에단이 히죽 웃으면서 말하자 휴고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네.”
이미 선택지는 없었다. 휴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여관의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칼센이었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빨리도 찾아오네.”
에단이 피식 웃으며 대꾸하자, 칼센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저, 저에게도 설명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칼센이 흔들리는 동공으로 에단과 같이 식사를 하고 있는 타미를 바라봤다. 에단이 저택에 잠입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한니발의 저택에는 많은 괴담과 괴소문이 떠돌아다녔다.
저택의 주인인 한니발은 대륙에서 유명한 대상인이었고, 그만큼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었다.
당연히 승냥이 같은 도둑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정보원인 칼센은 저택에 침입한 자들의 결말을 잘 알고 있었다.
‘모조리 실종됐어.’
그렇기에 내심 에단을 걱정했다.
일전에 에단이 보여 준 무력에 압도되었지만, 한니발은 베일에 싸여 있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아무리 에단이라 한들 무턱대고 들어가면 생명이 위험했다.
하여 걱정을 안고 찾아왔는데…… 에단은 태연자약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칼센이 황당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물끄러미 칼센을 바라봤다.
“배고프면 와서 밥이나 먹어.”
“그것도 좋…… 그게 아니라…….”
“얘 안 보여?”
“저분은…….”
새로운 인물이 그의 눈에 띄었다. 붉은 기가 감도는 머리칼을 지닌 소녀였다.
칼센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에단이 저 소녀를 가리킨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설마……?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에단 님이 그러실 리가…….’
칼센이 침을 꿀꺽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혹시 저분이 붉은 곰…….”
“정답.”
에단이 씨익 웃자, 칼센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혐오와 경멸의 눈빛이 섞였다.
“에단 님…….”
“왜?”
“실망입니다.”
“……또 뭔 지랄이야?”
에단이 눈살을 좁혔다. 칼센이 참담하고 실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신의를 가진 채 행동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최대한 협조했던 것이고요. 하지만 이건……. 저는 더 이상 협력할 수 없습니다.”
칼센의 얼굴은 결의로 가득했다.
에단과 휴고, 그리고 헨리가 눈을 끔뻑였다. 지금 칼센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은 탓이었다.
“그래, 네 마음은 잘 알겠고. 그래서 왜 대뜸 찾아와서 지랄하는 건지 이유나 한번 들어 보자.”
“몰라서 묻습니까? 아무리 붉은 곰이 위협적인 존재라고는 하나 딸을 인질로 잡다니요. 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
기가 찬 에단은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휴고와 헨리, 그리고 타미를 바라봤다. 타미는 눈을 깜빡이며 칼센을 가리켰다.
“쟤, 바보야?”
“……어?”
타미의 발언에 칼센이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툭. 툭.
에단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 네 의견은 잘 들었고. 일단 여기 앉아 보지?”
“…….”
그쯤 되자 칼센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 *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사건의 전말을 들은 칼센이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헛다리를 짚어도 너무 잘못 짚은 탓에 모두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하여간 정보 길드 녀석들은 믿음이 안 가요, 믿음이.”
‘아니, 저 꼬맹이가 붉은 곰인 게 말이 되냐고…….’
억울함이 치밀었지만, 차마 에단에게 토로할 수는 없었다. 세간에 알려진 붉은 곰의 모습과 지금 타미의 모습은 전혀 매칭이 되지 않았다.
“대충 배 좀 채웠으면 애들이나 좀 확인하러 가 볼까.”
단원들을 훈련시키는 장소는 사미라에게 전달받아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는 아니었다.
에단은 열심히 훈련하고 있을 단원들을 떠올렸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체력이나 기술이 아닌, 실전이었다.
날붙이 쓰지 않고, 적을 죽이고 제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지간한 배짱으로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게 개성이 되겠지.’
용병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는 족속들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다양한 특기를 보유하고 있다.
맨몸 박투.
거친 남자들은 주먹으로 대화하기 마련이라 주먹질을 안 해 본 용병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장을 안 하는 용병은 존재하지 않았다.
맨손은 날붙이의 효율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하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지금 같은 격투술 훈련은 필수적이었다. 그렇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
몸을 일으킨 에단은 걸음을 옮겼다.
에단과 일행은 도시를 벗어나 숲으로 들어섰다. 사미라에게 전달받은 방향과 에단의 감각을 이용하면 위치를 특정하기 어렵지 않았다.
“끄아아악!”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에단과 일행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칼센이 흠칫거렸지만 에단은 거리낌 없이 발을 움직였다.
숲의 중심부에 들어서자 단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단원들은 상의를 탈의한 상태로 몬스터와 혈전을 펼치고 있었고, 단원들의 뒤편에는 사미라가 살벌한 미소를 띠며 지켜보고 있었다.
손에는 두툼한 채찍을 쥔 채로.
“어, 왔어?”
사미라가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