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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명가 격투천재-169화 (169/398)

◈ [169화] 붉은 곰 (5)

휴고는 일전에 렉사르와의 교전에서 부분적으로 신체가 변하는 것을 알았다.

‘……도련님이 주신 조각 때문인 줄 알았는데…….’

에단이 건네준 마석 파편이 신체를 변화하게 만들어 주는 특수한 능력이 있다고만 생각했지, 본인 스스로가 수인이라는 생각에까지는 차마 닿지 못했다.

‘……내가 수인이었구나.’

뭔가 기분이 묘했다. 참담하다거나 침울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아직 쉽게 실감이 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잠시 멍 때리고 있던 휴고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동안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었던 게…….”

“너 그때마다 장난 아니었어.”

에단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휴고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예전에 동굴에서 나왔을 때 턱이 아프던 것도…….”

“……어, 어. 갑자기 돌 같은 걸 주워 먹으려고 해서 내가 뜯어말렸지. 그것 때문에 아팠나 보네.”

에단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휴고는 에단의 짧은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휴고가 충격받은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도, 돌을 먹다니…….”

“…….”

에단은 휴고의 시선을 외면했다. 잠자코 있던 페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무릎이랑 팔꿈치로 턱을 작살낸 놈이…….

페온의 목소리도 가볍게 무시한 에단이 타미를 바라봤다.

타미가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멀뚱거리며 에단과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해.’

분명 경계해야 할 사람들이다. 타인을 쉽사리 믿기에는 그녀가 입은 상처는 너무 깊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들의 대화를 보자 경계심이 옅어지고 있었다.

‘……왜 이러지.’

또 다른 수인을 만나서일까. 타미에게도 자신의 일족이 아닌 다른 수인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 보는 새로운 수인이 뭔가 얼빵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피식.

타미가 작은 미소를 머금자, 모두의 시선이 타미에게로 향했다.

타미가 다급하게 입을 가렸지만 이미 셋의 눈은 타미의 입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안 웃었어.”

“그래.”

에단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타미를 위로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이제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야 할 때였다.

“타미.”

“…….”

타미는 부름에 답하지 않았지만, 에단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물어볼 게 있어. 자아를 잃고 있었을 때의 기억은 어디까지 나지?”

다소 민감한 질문에 휴고와 헨리가 당황했다. 설마 벌써부터 저런 질문을 던질 줄은 예상치 못한 탓이다.

“……전부는 기억 안 나.”

“그렇겠지. 힘들겠지만 나는 네 답을 들어야만 해. 레벨린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알지.”

“레벨린을 알고 있어?”

타미의 눈에 경계심과 적의가 서렸다.

“알고는 있지. 개 같은 년이라는 것 정도는.”

에단이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타미는 그런 에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대꾸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생각보다 잘 통하네.”

“……레벨린에 관해서는 거의 기억나지 않아. 나는 대부분 싸우면서 지냈어. 가끔 레벨린의 얼굴을 본 장소도 한 곳이었어.”

“그 장소는 기억이 나?”

“가는 길은 몰라……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 주위가 어두웠어.”

‘쯧, 실패인가.’

레벨린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타미를 찾은 것은 아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자 아쉬움이 들었다.

그때, 타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레벨린이 있던 장소에 찾아오던 이들의 모습은 기억이 나.”

“……더 말해 봐.”

타미가 주먹을 꼬옥 움켜쥐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얼굴.

“……하얀 갑옷. 하얀 머리의 남자.”

타미의 답변에 에단의 입이 비틀렸다.

‘찾았다.’

거기 있었구나.

특정되는 인물은 하나였다. 설마 레벨린이 그쪽과 협력하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건 원작에서도 언급되지 않던 사실이었으니까.

‘앙큼한 새끼들이.’

명색이 신성 왕국이라는 놈들이 레벨린이랑 결탁을 맺어?

에단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 * *

에단이 타미와 저택을 떠난 후 한니발은 난장판이 된 방 안을 바라봤다. 주변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피가 낭자했다.

하지만 한니발의 얼굴은 착잡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싸늘할 정도로 무감정해 보였다.

‘시간이 촉박하군.’

한니발은 쉬지 않고 계산하고 있었다.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참담한 내부를 뒤로한 채 움직였다. 가장 먼저 향할 장소가 있었다.

* * *

“누가 찾아왔다고?”

“한니발입니다.”

“……그 거물이 직접?”

“네, 어떻게 대응할까요?”

“올려 보내. 내가 직접 마주해야 되겠어.”

메이는 내심 적잖게 당황했다. 한니발에 대해서는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르는 게 이상했다.

거상 한니발.

대륙의 재화를 쥐고 있다고까지 알려지는 이가 바로 한니발이라는 상인이었다.

정보 길드는 한니발과도 거래한 경험이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한니발은 상인이었고, 상인에게 정보는 중요한 요소였으니까.

하지만 정보 길드와 접촉할 때는 언제나 대리인이나 수하를 이용했다. 당연한 처사였다.

한니발급의 거물이 직접 움직이는 것은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으니.

그런데 지금 한니발이 몸소 정보 길드를 방문했다. 그렇다면 정보 길드 또한 그만한 예우를 갖춰야만 했다.

메이가 옷가지를 정리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한니발이 길드원의 안내를 받고 도착했다.

“도착했습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며 한니발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한니발은 가볍게 주변을 훑은 뒤, 메이를 바라봤다.

‘묘한 분위기군.’

신선한 분위기의 방이었다. 한니발이 가라앉은 눈으로 가림막 뒤에 있는 메이를 바라봤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상인 한니발입니다.”

“저야말로 소문으로만 듣던 거상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형식적인 대화가 오갔다.

‘과연, 이자가 거상 한니발인가.’

가림막 너머로 거상의 기세와 자신감이 느껴졌다.

“바쁘신 분께서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메이의 물음에 한니발이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말을 전달받았습니다.”

“어떤 말을 전달받았다는 거죠?”

“그분이 가진 세력 중 하나가 정보 길드라는 사실을요.”

“…….”

한니발의 입에서 나온 경악스러운 말에 메이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한니발과 붉은 곰의 연관성을 말해 준 것이 자신이라지만, 벌써 접촉했을 줄은 몰랐다.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눈 거야?’

어떤 대화를 나눴길래 한니발 정도 되는 거물이 에단의 말을 듣고 여기까지 행차했단 말인가.

이성을 되찾은 메이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은 사실입니다. 정보 길드는 그분의 세력입니다.”

“……놀랍군요.”

“전후 사정이 궁금하군요. 들을 수 있겠습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군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한니발은 간략하게 에단과 조우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이런 미친.’

황당하다 못해 경악스러웠다.

막무가내도 이런 막무가내가 없었다.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한니발의 말을 모두 들은 메이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괜찮으신 겁니까?”

“어떤 게 말이죠?”

“그동안 준비하던 일이 전부 어그러진 것 아닙니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저는 상인입니다. 득실을 따지는 장사꾼이죠. 만일 제가 준비하던 계획이 더 진전됐다면 저는 더 큰 손해를 봤을 겁니다.”

“……대단하군요.”

감탄스러웠다. 확실히 거상이라 불리는 이다웠다.

“그리고 제 감이 말해 주더군요.”

한니발이 작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분 뒤에 서는 게 제게 훨씬 이득이라고 말이죠.”

한니발의 말에 메이도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조언해 줄 위치는 되지 않지만, 후회되는 선택은 아닐 겁니다.”

“많은 위로가 되는군요. 그럼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한니발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보의 일부를 풀었다. 그는 많은 재화와 사업체를 가지고 있는 상인이었다.

돈에는 옳고 그름이 없었다.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욕망이었다.

한니발은 대륙에 알려지지 않은, 뒤 세계를 알고 있었다.

“어지간한 무력으로는 넘볼 수가 없는 곳이기에 생각지도 않았지만.”

사업 수완이나 재화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그들은 어둠 속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었다.

“블랙마켓을 말씀하시는군요.”

일명 암시장.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만이 참석할 수 있는, 인간의 욕망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블랙마켓이었다.

티켓을 구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아니, 간단한 일이다.

메이는 정보 길드의 수장이며, 한니발은 위상을 떨치는 거상이다. 블랙마켓의 입장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니발이 하는 말은 그런 사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정말 전쟁을 벌일 생각이군.’

에단은 지금 블랙마켓을 통째로 수면 위로 들어 올릴 생각이었다.

엮을 수 있는 자들을 모두 하나로 묶어 목줄을 채울 계획이다.

귀족이니 왕족이니 할 것 없이 전부.

‘그를 위한 초석이 그 장부인가.’

생각보다 더욱 위험했다. 도박이나 인신매매에 연류된 이들은 블랙마켓 전체와 비교할 게 아니었다.

“귀와 입이 필요합니다.”

“돈을 뿌릴 생각입니까?”

“투자라고 생각하시죠.”

이미 뇌물은 먹여 놓았다. 귀족들의 눈과 귀는 막혀 있다. 한니발은 일부러 흔적을 남기며 움직일 생각이었다.

혼자가 아닌, 상인들과 귀족들을 동시에 묶어서.

세간에는 소문이 나돌 것이다. 돈이 더 몰리면 자연스럽게 사람이 몰리며 이목이 집중된다.

블랙마켓에 입장할 티켓이야 널리고 널렸다. 지금부터 작정하고 구한다면 더 늘릴 수도 있었다.

메이가 정보를 흘리면 한니발은 티켓을 팔아 치울 생각이었다.

판을 키운다.

커진 판에서 돼지는 몸집을 불릴 터. 그렇게 먹기 좋게 살이 오른 돼지는…….

“사자가 잡아먹을 겁니다.”

“사자가 잡아먹겠네요.”

메이와 한니발의 뜻이 통했다. 둘이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블랙마켓은 음지에 숨어 있는 만큼 삼엄한 경계를 자랑했다. 어중간한 무력으로 설쳐 봤자 처참하게 죽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무력이 과연 블란테라는 괴물에게도 통할까?

에단이 블란테를 이끈 채 작정하고 판을 뒤집어 버리게 된다면 상황 또한 반전된다.

어둠 속에 깊게 뿌리내린 나무가 활활 불타오를 것이다.

그를 위해 이용할 것이 바로 이 장부였다. 먼저 이목을 끌어 줄 개들이 필요했다.

“도박장의 위치와 귀족들의 신상 정보, 그리고 별장들까지. 오늘 내에 정리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돈의 출처는 제가 찾아 드리죠. 당연히 정보값은 치를 겁니다.”

“주책맞게 조금 설레기까지 하는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들뜨는 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본래라면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했을 정보 길드와 거상이, 에단이라는 구심점으로 하나 되어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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