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격투천재-166화 (166/398)

◈ [166화] 붉은 곰 (2)

‘지, 진심이야.’

에단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에단은 지금 농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신성 왕국과 맞붙을 의향이었다. 과연 대륙에서 신성 왕국과 정면으로 맞붙을 수 있는 세력이 있을까?

국가도 대적하기 힘든 게 신성 왕국이다. 국민들의 민심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란테는 가능해.’

블란테는 순수한 무력 집단이다. 민심이나 타인의 지탄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

한니발은 공포를 느꼈다. 지금껏 잠자코 숨죽이고 있던 블란테의 저력이 느껴졌다.

‘이건 잡아야 한다.’

상인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여태껏 수많은 선택을 해 왔고 거의 모든 선택이 성공적이었다.

대부분의 순간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을 가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이건 예측이 되질 않아.’

판도가 뒤바뀌었다.

에단은 아직 모든 것을 보여 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확답을 하지 않은 자신을 상대로 가지고 있는 모든 패를 드러내는 것은 멍청한 일이었다.

질끈 감았다가 뜬 한니발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부족한 몸이지만 함께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한니발의 대답에 에단이 씨익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한니발이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에단의 손을 맞잡았다.

“그럼 이제 슬슬 가진 걸 까야겠지?”

에단이 한니발을 향해 턱짓하자 한니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너부터 까야지. 그럼 나부터 까리?”

“아, 그렇죠……. 뭐부터 말씀드리는 게 좋을까요?”

“먼저 뒤 구린 새끼들부터 싹 다 언급해. 당연히 장부도 작성했겠지?”

“그걸 전부 토해 내란 말씀입니까?”

“장난해?”

에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당연히 전부지. 아니, 살을 붙여서라도 만들어내야 하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다만, 정보를 규합하고 장부를 가지고 오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필요합니다.”

“그 정도는 이해해 줄게. 그럼 나도 가진 패를 까줘야겠지.”

에단이 본인이 가지고 있는 세력들을 읊기 시작했다.

초창기에 흡수한 정보 길드부터 시작해서, 엘프들의 지지, 한니발에게 보여 준 장부, 더불어 부패한 신성 왕국의 정보와 성자의 도주까지.

무엇하나 경악스럽지 않은 일이 없었다.

‘……차고 넘친다.’

설마 정보 길드와 엘프들의 지지까지 얻고 있을지는 예상치 못했다.

‘허튼짓을 했으면 곧바로 덜미를 잡혔겠군.’

이제야 아귀가 맞았다. 에단이 어떻게 자신을 찾아내고, 저렇게 정보에서 이점을 취하고 있었는지.

‘정보 길드와도 연관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야.’

한니발도 정보 길드를 통해 정보를 수집한 경험이 있었다.

어떻게 블란테가 정보 길드를 흡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이점이다.

하나 에단이 가진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세계수와 엘프…….’

대륙인들에게 있어 세계수라는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다. 당연히 세계수와 함께 공존하는 엘프들이 가진 말의 무게도 무겁다.

‘이 정도면.’

이 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했다. 에단의 눈이 한니발의 몸을 훑었다.

“보여 준 장부. 그것을 바탕으로 엮을 수 있는 애들은 죄다 엮어. 조만간 국가 집회에 소환될 예정이니까.”

“……소환에 응하실 생각이십니까?”

“다짜고짜 전쟁을 벌이는 전쟁광은 아니어서 말이야.”

에단의 말대로 소환에 응하지 않게 되면 곧바로 연합군의 압박이 들어올 터였다. 상대가 블란테인만큼 철저한 대비를 한 채.

그렇게 되면 제아무리 블란테라도 버틸 재간이 없다.

일정 시간 버틸 수는 있겠지만, 결국 양적 우위에 있는 연합국의 승리가 될 것이다.

‘그걸 위한 대비일 테니.’

한니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단이 입을 열었다.

“그럼 예정대로 지내라고. 성과는 섭섭지 않게 보여 줄 테니.”

“알겠습니다.”

문밖을 나가기 직전 한니발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에단이 뚜벅뚜벅 그를 향해 다가섰다. 한니발이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 갑자기 왜…….”

“생각해 보니 내가 너를 그냥 믿기는 좀 그렇더라고.”

“그럼……?”

에단이 한니발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에단의 마나가 몸과 머리를 휩쓸자, 한니발은 몸을 파들거리며 경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단이 손을 뗐다. 한니발의 경련이 멈추고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이게 무슨…….”

“뭐 같아?”

에단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고 있자, 한니발의 뇌리에 불안감이 치밀었다.

“서, 설마…….”

“이제 처신 잘하라고.”

에단이 한니발의 어깨를 툭툭 토닥이며 말했다. 한니발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제 그는 에단을 결단코 배신할 수 없었다.

만일 에단을 배신하게 된다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할 테니까.

에단이 무심하게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섰다.

―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구나.

‘처세술이 늘었다고 하시죠.’

에단은 레벨린처럼 타인의 머릿속에 죽은 마나를 심어 두지 못한다. 지금 에단의 행위는 단순히 마나를 끌어올려 한니발의 몸을 훑은 것뿐이었다.

그 말인즉, 한니발이 예상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걸 알 리가 없는 그는 절망 어린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에단이 한니발을 힐긋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 * *

헨리와 휴고가 수인족 소녀와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이동하던 도중 휴고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길게 돋쳐 있던 송곳니가 작아지고, 몸을 뒤덮고 있던 털이 사라졌다.

골격이 돌아오며 누렇던 안광도 평범한 갈색으로 바뀌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신기하네.’

헨리가 묘한 눈초리로 휴고를 응시했다. 이성을 되찾은 휴고가 당황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헨리 씨가 왜? 여, 여긴 어디죠? 그리고 저는 대체…….”

“아, 신경 쓸 거 없어요. 일 다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니까요.”

“……제가 정신을 잃었었나요?”

이쯤 되면 휴고도 무언가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다. 그간 정신을 잃거나 기억을 잃은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네.”

하지만 헨리가 태연하게 대꾸하자 오히려 김이 빠진 건 휴고였다.

휴고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그때 휴고의 눈에 낯선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저 아이는 뭔가요?”

휴고가 둥실둥실 떠다니는 소녀를 가리키며 묻자, 헨리가 이번에도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저도 몰라요.”

“…….”

헨리의 반응에 휴고가 잠시 침묵하다가 재차 물었다.

“저희 이대로 움직여도 괜찮은 건가요?”

휴고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남들이 보면 납치극이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을 광경이었다.

“걱정 안 해도 돼요. 남들 눈에는 우리가 안 보여요.”

대수롭지 않은 듯한 헨리의 말에 휴고가 눈을 끔뻑였다.

“안 보인다구요?”

“말 안 했었나요? 저 투명화도 할 수 있어요. 뭇 남성들의 로망이죠.”

“……그렇군요.”

휴고는 반박하는 것을 포기했다. 세계수에 다녀온 이후로 헨리에게는 상당히 많은 변화가 있던 것 같았다.

‘……그럴 수도 있지.’

휴고는 고민하는 것을 포기했다. 에단과 함께하며 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걷던 휴고를 헨리가 바라봤다.

“휴고 씨.”

“네?”

“……돌아가는 길이 어디였죠?”

“…….”

* * *

결국 휴고의 안내로 세 사람은 여관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음, 일단 방으로 옮기는 게 좋겠죠?”

“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역시 그렇죠?”

헨리의 물음에 휴고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헨리가 수긍했다.

여관의 복도를 지나자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고, 나 죽네…….”

“내 팔자야…….”

“차라리 날 죽여줘…….”

“……내일 일어날 수는 있겠지?”

“왜 우리가 이렇게 개같이 굴러야 하는 거야?”

“왜긴 왜겠어. 누구 때문이지…….”

“이래서 대장이 멍청하면 아랫것들만 고생한다는 말이 있구나…….”

“……미안하다.”

뭔가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을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헨리와 휴고는 용병단의 대화를 애써 무시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방에 들어선 헨리가 소녀를 침대에 눕히고 등을 켰다. 불빛에 비친 소녀의 혈색은 썩 나쁘지 않았다.

헨리가 묘한 눈초리로 소녀를 바라봤다. 헨리는 두 사람의 전투를 처음부터 지켜봤기에 소녀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아이에게도 뭔가가 있겠지.’

헨리가 고개를 돌리자, 소녀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휴고가 보였다.

“……헨리 님.”

“네?”

“……이상합니다.”

“뭐가요?”

“분명…… 처음 보는 아이일 텐데 묘한 친근함이 느껴져요.”

“…….”

헨리는 휴고의 말에 명확한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일단 깨어나기를 기다려 보죠.”

“알겠습니다. 도련님은 별일 없겠죠?”

“……그 사람이 걱정돼요?”

“그건 아닙니다.”

어디 걱정할 사람이 없어서 에단을 걱정한단 말인가.

* * *

수인족 소녀, 타미는 꿈에 빠져 있었다.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운 따뜻한 꿈이었다.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은 풍족하지는 않지만 평화로운 삶을 영위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일용할 수 있는 만큼만 사냥했다.

소박했지만 행복한 삶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타미를 누구보다 아꼈고, 그만큼 자립할 수 있게 도와줬다.

“아빠, 이 숲 밖에는 뭐가 있나요?”

“……타미야. 숲 밖이 궁금하니?”

“네! 궁금해요.”

그때, 아빠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서글퍼 보였다.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빠의 얼굴은 잊을 수가 없었다.

아빠는 타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빠가 미안하구나. 나중에…… 모든 갈등이 풀린다면 꼭 세상을 보여 주마.”

“정말요?”

“그래.”

타미의 아빠는 그 누구보다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타미를 바라봤다. 그것이 타미가 기억하는 아빠의 마지막 미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평화는 깨졌다.

습격은 순식간에 진행되었고, 마을 사람들도 빠르게 대응했다.

마을 사람들은 강했다.

타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거대한 모습으로 돌변해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마을이 무너지고 숲이 타오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저 한데 뭉쳐 발악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윽고 나타난 백색의 갑주를 입은 자들의 검에서는 섬광이 치솟았고, 마을 사람들은 분노와 슬픔으로 점철된 포효를 내뱉었다.

사방에 피가 낭자했으며, 생명이 사그라드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가득했다.

“대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짓을 벌인단 말인가!”

타미의 아빠가 울분을 토해 냈다. 전세가 기울었다. 마을 사람들은 거칠게 저항했지만 습격한 이들의 수적 우위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죄?”

선두에 서 있던 백색 갑주를 입은 자가 투구를 벗었다. 그 남자는 무심하고 싸늘한 시선으로 타미의 아빠를 바라봤다.

“너희들은 존재 자체가 죄악이며, 세상에 해를 끼친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너희들은 대륙의 해충이다.”

“……그래, 그렇다면 목숨을 걸고 마지막까지 저항하겠다.”

“귀찮게 구는군.”

남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때 뒤편에서 백색 갑주를 입은 다른 기사들이 등장했다.

“단장님, 찾았습니다.”

“데려와.”

겁에 질린 아이들이 끌려 나왔다. 울먹이는 아이들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다.

“한 마리씩 죽여.”

남자가 무심하게 말했다. 기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아이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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